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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교감

LNCK 2010. 11. 18. 17:24

◈신앙의 교감 交感        시18:24~26, 마16:13~16     05.07.17.설교스크랩, 편집

 

 

◑1. 내가 누구니?  날 좀 알아다오!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매년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치는 남편들은

아내로부터 종종 핀잔을 듣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앞두고는

아내는 남편에게 대놓고 압력을 가합니다.

달력에다 커다랗게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표시해 놓고,

기억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호소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것마저도 잊어버리면, 아내는 너무 실망하고 화가 나서,

남편 앞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당신에게,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이런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댄 후에

다음번에는 당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꼭 지키겠다고 찰떡같이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뜬금없이 싱거운 소리 하네, 아 당신이 어떤 사람이긴,

착한 내 마누라지, 당신이 누구긴 누구야? 000의 엄마이자, 000의 아내지.

별 싱거운 질문 다 하네,

아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내 와이셔츠나 다려줘.’

 

만약 이렇게 나온다면,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질문하는 아내의 의도를 전혀 읽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심정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 한지가, 3년쯤 되었나 봅니다.

어떤 사람하고 3년 정도 같이 살아보면,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됩니다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제자들아,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니?’

 

제자들은 들은 정보나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합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데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내가 너희에게 누구지?’

 

이 질문과 연관 지어서, 종전에 아내가 남편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에게 내가 누구야?’ 라는 질문을 던진 아내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해?,

당신의 마음에 나란 사람이 들어 있기나 한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에 얼마나 차지하고 있어?’

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런 의도로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적 성장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질문’의 차원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제자들에게 ‘날 좀 알아주겠니?’ 라는 ‘확인’ 차원

어쩌면 더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이를 칭찬하시며, ‘이렇게 나를 보도록 한 것은

너의 육신적인 눈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그렇게 보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오늘 다루는 주안점이 아니고요)

 

 

◑2. 내 기분에 따라, 하나님 이해가 달라진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묻고 싶어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누구니?’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지와 답을 외워서 맞춘 답안이고요.

 

사실은..

-언제나 ‘주여, 주시옵소서!’ 하며 매달리는 대상

 

-아무리 매달려도 응답 못 받으니까, 자포자기한 대상

 

-남들은 잘 풀리는데, 나는 안 풀리니까.. 편애하시는 계모 같은 하나님

 

-내가 당하는 고난이 너무 길고 끝이 안 나서.. 나에게 무서운 하나님

 

-적당히 믿어야 삶이 지혜롭고 편할 것 같아서..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

 

-그 외에도 많겠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하나님 형상에 보면 보통 4면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 겔1:10)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서, 사람/사자/소/독수리로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제 각기 다릅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는

내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이 제각기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못 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면) 내 믿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마음의 ‘거울’(안경과 동일)에 비춰진

사물이나 대상을 보고 판단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판단과 이해에 있어서.. ‘자기’가 기준입니다. (이것은 잘못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

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 해결이 빨리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 당신이 틀렸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하지 맙시다.

 

▶고전적인 예화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솝이 어느 날 아테네를 떠나 아르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아르고스에서 오는 사람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길 옆에 앉아서, 함께 쉬게 되었습니다.

 

아르고스에서 아테네 쪽으로 오던 사람이, 이솝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테네에서 오고 있는 중인데, 그곳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이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아르고스 사람들에게 대해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주 예의도 없고, 거짓말 잘하고, 남을 이간질 시키며, 다툼만 일삼는 족속들이라,

아주 넌덜머리가 납니다. 다신 보기 싫은 족속들입니다. 거기에는 다시는 안 갈랍니다.”

 

그의 표정에서도 그런 느낌이 아주 역력했습니다. 이솝이 그에게 말합니다.

“안된 일이지만, 아테네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당신은 아테네에서도 아르고스 시민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조금 더 가다가 이솝은 다시 아르고스에서 오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역시 길가에서 쉬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먼젓번 사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솝이 말합니다. “당신이 먼저 아르고스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느새 향수어린 표정으로, 아르고스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대단히 유쾌하고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이솝이 말했습니다.

“나 역시 당신처럼 말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테네에서도 똑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느 곳을 가든지,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마음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통해

대상을 보며,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처럼,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누구지?”

 

이 질문에, 우리 각자는, 지금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대답할 것입니다.

‘원망스런 하나님!’ - 자기가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짜증나는 OO님!’ - 자기가 지금 OO님께 짜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쳐야 합니다.

 

 

◑3. 하나님이 내게 ‘좋으신 하나님’이 되려면..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시18:25~2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시18:24

 

▶하나님이 내게 ‘거스리는 하나님’, 즉 내게 대적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 내가 사특하기 때문입니다.     *사특 : crooked, 굽은, 속이려는, 간교한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그게 사실입니다.

‘주의 판단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제가) 의로우시다 말하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언제나) 순전하시다 말하리이다  시51:4

 

▶하나님이 내게 ‘좋으신 하나님’이 되시려면,

지금부터 내가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22:26~2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

 

 

▶마치는 말 : 신앙은 교감交感이 필요

자신이 행복하면

모든 것이 행복이요, 행복으로 보일 것이며, 행복한 일들만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하면

모든 것이 불행으로 보이고, 불행한 것이고, 불행만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괴로운 하나님’으로 믿게 됩니다.

 

자신이 짜증이요, 불평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고 그런 일들만 다가 올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고, 내게 은혜를 주시고, 선물을 주시고..,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내 쪽에서 그에 대한 응답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내가 서로 교제/교통/사귐이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시고, 나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좋으신 하나님이 되려면,

내 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함이 필요합니다.

내 쪽에서도 자비함, 온전함, 깨끗함으로 응답할 때,

하나님은 더욱 자비함, 온전함, 깨끗함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내가 누구니?'

                                                                                                               

       (배치섭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