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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스스로 속는 신자들 2730

LNCK 2010. 11. 6. 20:20

◈스스로 속는 신자들               행5:1~11             설교스크랩, 정리



▶1. 종종 사람이 속는 것은, 자기가 원하기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 중에서도, 2부류인데,

-남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속은 사람이 있습니다.


①남에게 속은 사람은..

그가 처음에는 천사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참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②그런데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경우에는.. 어쩌면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은 경우입니다.

(물론 양쪽이 둘 다 분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쪽이 더 어렵다는 것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사람이

남에게 속든지,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속든지..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내가 원해서 속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과잉친절과 감언이설로 접근할 때,

내가 속는 것은,

그래서 속고 나서 크게 후회하고, 그 속인 자를 탓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원해서 속은 것’입니다.

그의 감언이설과 과잉친절에.. 내가 솔깃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가 자기에게 속을 수도 있습니다만,

마찬가지로 결국 따지고 보면, ‘내가 원해서 속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거짓을 말하고, 많은 명예를 얻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눈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기 때문에 속임수에 빠지면

속임수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내가 일종의 미끼 같은 것/또는 상황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고이율, 고배당에 속아서 투자했다가

    결국 속는 이유도

    ‘내가 고이율, 고배당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애당초 불로소득을 원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기에 속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속았을 때, 절대로 남을 탓하지 맙시다.

결국 ‘내가 원했기 때문에’ 속은 것입니다.


가끔 갓 결혼했는데, 신혼시절부터 삐거덕거리는 부부가 있습니다.

배우자를 탓하지 맙시다. 속았다고 하소연하지 맙시다.

사실은 그 근본바탕에는 ‘내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남을 탓하고, 사기꾼을 욕하는 동안에는,

    진정한 회개가 내 입에서 나오지 않게 됩니다.

    결국 사태 해결의 첫 단추(진정한 회개)가 아직 꿰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2. 그런데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신이 자신에게 속기 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위험에 빠져있는데도, 위험을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행5:9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베드로가 물어본 것처럼

그 부부는, 지금 자기들이 위험에 빠져있는데도 위험을 모르고 있어요.

멸망해 가는데도,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에게 속는 경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아래 ▶3.과 ▶4.를 보십시오.



▶3.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는 것이

내가 자신에게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출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초신자도 아닙니다.

기적과 이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었어요.

시내산에서 불 붓는 화염과, 천사들의 소리와 나팔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다 이것을 체험했어요. 근데 보십시오.

모세가 40일 보이지 않으니까 아론을 보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윽박지릅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는 말속에 담긴 뜻은,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가 되든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하는> 신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이 <그들이 원하는 신>을 빚어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금송아지’였습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너희 백성이 부패하였다.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다.’ 출32:7~8

그것은 ‘부패한’ 신앙입니다.   주1)

 

이 단락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스스로 속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는 것이

내가 자신에게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내가 내 자신을 우상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도 ‘나를 위하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대리자 모세가 사라졌을 때)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점집에 가지만,

    교회에 나와서 ‘나를 위하는 신’을, 내 마음으로 스스로 주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내 마음속에는 ‘금송아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하는 신을 만들 때,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속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속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게 됩니다. (환란 당하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지금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기 원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32:4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왜곡했습니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얼마나 틀어지게 만들었습니까.

어떻게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 ‘송아지’에 견주겠습니까?


롬2: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의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나,

롬2장의 ‘사람과 짐승의 형상의 우상’이나..

사람들은 자꾸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왜곡하고, 바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에서 말하는 강조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

    십자가의 도,

    믿음, 소망, 사랑,

    기도, 인내, 겸손의 덕목.. 이런 것들은 다 눈에 안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점점 진화?하여

    눈에 안 보이는 기독교를 → 눈에 보이는 기독교 신앙으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마치 금송아지를 만들고, 사람과 짐승 형상의 우상을 세우는 것처럼

    뭔가 사람들에게 어필되고, 그들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는,

    눈에 보이는 성공, 물질의 복, 현세적 부귀영화.. 이걸 자꾸 제시합니다.

    ‘그런 것도 내걸지 않고, 어떻게 전도가 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천하만국의 영광을 (눈 에보이는 것들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보여주며 복음을 전파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설교문의 주제는 ‘스스로 속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속는 이유는

-자기가 원해서 속고,

-자기를 위하는 신을 스스로 규정하기 때문에 속고 ↔하나님이 보이시는 신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자꾸 눈에 보이는 어떤 것(우상)으로 만들려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스스로 속는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격노입니다.

(그것은 출32장과, 롬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3에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친구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맞습니다. 그러나 위 표현은,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과 어긋나는 행동을 정당화할 때

자기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나를 합리화시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자신을 보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여러분 자신을 난도질(과장법 죄송) 당하십시오.


우리는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자신을 보호하는 프로그램들이, 머릿속 컴퓨터에서 막 어지럽게 작동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것은요 여러분을 죽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올 때, 여러분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거울로 비추었을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한다면.. 그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화해서 ‘내가 원하는, 나를 위하는’ 기독교/하나님으로

조치하는 것이.. 결국 금송아지(내가 원하는 신)를 만드는 행위요,

결국 내 스스로 속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롬2:2, 5


▶마치는 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조롱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속는 것은 저와 여러분뿐입니다.


내 자신의 왜곡된 생각/신앙에, 내가 스스로 속을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하면서.. 내가 나에게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도 속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행동에도 속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령/동기를 살피시는 분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 진실에 하나님은 나와 대면하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개를 통해 정상화되어야,

    그제야 모든 문제가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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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자기를 위하여'를, '자기 스스로' 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다'는 해석이 됩니다.

내용은 똑 같습니다. 사람이 스스로=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진리를 공부하는 자들이 항상 주의해야 할 것 그리고

내가 늘 주의해 왔던 것은 이것이다.

 

“무엇이 진실이냐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는지”가 핵심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성경을 보는 것-교단따라 성경 역본, 번역이 달라진다.

성도들마다 성경 구절의 해석이 모두 달라진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바를 믿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하는 대로 보고 믿는 것이다. (이 단락 펀글)                           ▣ 우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