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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기도 2747

LNCK 2010. 11. 17. 14:45

◈놀라운 기도                     마6:9-13                       출처보기



◑‘놀라다’


- ‘말씀을 듣고 놀라서 내 생각이 깨어지다’는 뜻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놀랐다고 복음서 여러 부분은 증거합니다.

눅4:32, 막1:22, 6:2, 10:26, 11:18에 의하면,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2:33, 19:25, 13:54, 7:28에서도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위 구절들에서 ‘놀라다’라는 단어는 똑같이 에크플레소 εκπλησσω입니다.

에크 εκ - ‘밖으로/밖에서부터’

플레소 πλησσω - ‘부딪히다/깨지다’라는 뜻이 합쳐져서

‘밖에서부터 부딪혀 깨지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놀라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난 후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7:28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13:54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19:25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22:33


이제 εκπλησσω ‘밖에서부터 부딪혀 깨지다’라는 뜻은 더욱 확실해 집니다.

‘밖에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의 생각이 부딪혀 깨졌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지 기분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놀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권세를 경험한 사람들이 느꼈던

실존적인 충격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이 완전히 깨어져버리는,

하나님의 파워에 대한 겸손한 반응인 것입니다.



◑‘놀라운’ 기도1 : ‘당신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너무 놀라운 진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랐다’고 했습니다. (마7:28, 주기도문이 포함된 산상수훈 전체에 ‘놀랐음’)

그렇다면, 무엇이 기도에 관해 ‘놀라운’ 가르침이었을까요?


저는 이 시간 주기도문에 대해서 한절 한절을 자세하게 풀어보기보다는

핵심 키워드 2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주기도문에, 우리말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핵심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의 이름이 높여지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도록 위해서 기도해라.


너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라.


너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제목입니다.

기도시간에 ‘우리 각자 자신의 기도제목’으로 간구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기도제목’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시작되는

이후에 이어지는 기도는  

‘기도자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마6:11-13

(그러나 이것은 '공동체적 기도'라고 다음 호 주기도문은 공동체적 기도 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주기도문의 서두 절반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먼저 구하라’는 교훈입니다.


그것이 듣는 사람들에게 ‘놀라운/기이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놀라운/기이한’ 가르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가 아니고는,

누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토록 간절히, 마치 자기 기도제목처럼 오래 기도하겠습니까?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캐내야 할 보석들입니다.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이니까요!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초대된 것과 같으니까요.



◑‘놀라운’ 기도2 : ‘아버지여’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놀라운 기도’라고 잡았습니다.

정말로,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내 소원을 아뢰기 이전에,

하나님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윗 단락)


그래서 무리들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말로 ‘놀랐던’ 것입니다.


▶1. 우리가 ‘아버지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한없는 친밀감의 교제 속에서 기도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윗 단락에서 말한 대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라면 굳이 그렇게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종은 자기 것만 챙기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관심사에 대해서.. 먼저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지/아닌지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금방 압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염려하여 기도합니다. 아버지 일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그러나 자기 품삯 챙기기에 바쁜 사람은.. 아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와 자녀 관계의 한없는 친밀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았는데,

마음이 밋밋하거나, 아무 감정이 없고, 내 마음이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어서

전혀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도리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어떤 우상이 자리잡고 있을 때

‘친밀감’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친밀감’이 고갈될 때,

내 마음/행위 속에 어떤 우상이나, 회개해야 될 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주기도문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전제로 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낮이나, 특히 밤이나 새벽에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의 교제’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친밀감이 절대 생길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친밀한 기도가 가능할 것입니다. 

 

▶2. 아들이니까, 당당히 구하는 자격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주기도문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포입니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드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인님’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누구입니까? 자신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종이라면 ‘주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가 준행하겠나이다’가 맞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인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상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놀라운 기도의 세계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께 하는 것이다’

사실, 마6장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너희 아버지’입니다. (1, 4, 6, 8, 9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이다!”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여’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여’하고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이 큰소리로 구하기보다는

주인님이 무엇을 나에게 명령하시는가를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


 

▶성경지식 : 성경 속 괄호( )의 의미

마태복음 6장에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도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눅11:2-4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부분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6:13절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가 괄호 처리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구절에도 괄호( )가 나옵니다. 요5:3~4절 등)

 

이 괄호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부분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괄호는 ‘더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성서는 수많은 사본(copy)들로 기록되어져 각처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 있고

시간적으로 나중의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흩어졌던 사본들을 모으고 정리한 결과,

오늘날 우리의 손에 한권의 성서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서에 괄호는 ‘보다 앞선 사본에는 그 내용이 없다’라는 표시입니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부분이

보다 오래된 성경 사본들-그래서 보다 권위있는 사본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잘못되었구나!’라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에서

보다 확실하게 기독교의 신앙 전통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 예수님은 괄호부분을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괄호 부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후대에 첨가된 것)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지켜야할 핵심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면서,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을 알리는 ‘송영’(頌榮)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중에 마태복음의 기도문을

초대 교회가 받아서 예배의 ‘송영’이라는 기독교 전통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우리도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도 엉뚱한 방향으로 주기도문을 고칠 수 있습니다.

바로 ‘대개’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대개’란 ‘일반적으로’ ‘대체로’라는 뜻입니다.)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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