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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8장 하나님과 백성의 힘겨루기 + 절별해석

LNCK 2010. 11. 26. 22:15

 

◈하나님과 백성의 힘겨루기      렘8:1~22         펀 글 정리

 

예레미야서를 1장씩 각 장별로 설교문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렘8장이 빠져 있어서, 8장부터 보충해 나가려고 합니다. 

 

▲도입 예화 : 차라리 설사가 건강에 좋다.

음식을 먹다가, 몸에 병균이 들어오면,

구토를 하던지, 설사를 하든지.. 그것을 토하고, 배설해 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몸에 남아 있으면.. 나중에 크게 병들게 된다.

 

설사하는데 시간이 없으면,

들어온 길을 역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것을 구토라고 한다.

 

그러나 구토가 안 될 때는, 온 몸에 수분 총 동원령을 내린다.

그리고 강한 물살로 몸의 나쁜 것을 씻겨 내린다. 이것이 설사이다.

 

영적으로도 같은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원한을 품고 살아간다. 미움을 품는다.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하는 소리를 가슴에 품고 살던 사울은

결국 시기심으로 미치게 되었다.

 

영적 설사가 없으면, 미치게 된다. 자신이 썩게 된다.

 

육체는 설사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하게 만드는데,

우리의 영혼은 설사가 없어서.. 나쁜 것을 품다가 썩게 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의 장점이 무엇인가? 닭이 두 번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곧장 통곡과 함께 회개한다.

그는 즉각적인 죄의 배출, 즉 영적 설사가 있는 회개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를 살린 것이다.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영적 설사를 배워야 한다.

말씀, 기쁨, 감사는 품고,

미움, 원한, 질투는 다 배설하자.

이것이 설사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단락 펀글)

 

 

◑렘8장 본문 설명 : 신랑과 신부의 갈 데까지 가는 힘겨루기

 

렘8장을 주욱 읽어 내려가면서

<사랑과 전쟁>인지, <장미의 전쟁>인지

부부가 서로 싸우다가 갈 데까지, 끝까지 가는 .. 그런 연속극/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하 백성들)

서로 화해하면 좋으련만,

계속 서로 힘 겨루며, 절대 화해하지 않는다.

그의 백성들이, 신랑 되신 하나님과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영화 <장미의 전쟁>처럼!         (마이클 더글러스, 캐서린 터너 주연)

 

 

▲1막. (신랑의 극언) 너희 무덤까지도 파헤쳐지리라!   8:1~3

지금도 한국인들은 조상의 무덤을 존중하며,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고대의 사람들은 ‘무덤’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이 있었다.

파라오는 물론이고, 왕들이 큰 무덤과 고분을 만든 것을 보면,

그들의 ‘무덤에 대한 각별한 경외심’을 알 수 있다.

 

그런 고대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 가운데서 ‘무덤이 파헤쳐진다’는 것은,

욕 중에 가장 심한 욕설이요,

상대에게 가장 상처 깊은 공격행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얼마나 미운지,

이방인들이 침략해 와서,

왕/고관/제사장/선지자/주민들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경고하셨다.  :1~2절  주1)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겠다’ .. 이 정도까지 번지면 ‘이혼 불사’이다.

그 백성들을, 더 이상 영적인 자기 아내로 간주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부가 싸울 때 참을 수 없는 것은

‘상대의 부모를 들먹이며, 부모 욕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네 아버지도 똑 같다. 네 어머니도 같은 통속이다.’ 등

 

마치 그런 ‘갈 데까지 간 표현’처럼

하나님이 ‘너희 무덤이 훼파되리라!’는 말은

더 이상 심하게 저주할 수 없는, 가장 최악의 저주 중 한 가지다.

 

이것이 얼마나 수치이며, 큰 모욕인지

사람들은 이쯤 되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사태가 이 정도 즈음에 이르렀다면..

‘백성들’ 쪽에서 기를 꺾고,

깨끗하게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나왔으면 파국을 면했을 것을..

 

백성들은 여전히

‘우리가 뭐가 잘못이냐?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며 나왔다. ↓

 

 

▲2막. (신부의 항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8:4~7

신랑 : ‘사람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느냐?

사람이 길을 떠났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느냐?

그런데 왜 이 백성은, 돌아오지 않느냐?’   :4~5

 

신부 : 악한 짓을 하면서도 뉘우칠 줄 모르면서

도리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6  쉬운성경 참조

 

신랑 :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돌아오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돌아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계명을 알지 못하도다. 돌아오지 않는구나. 즉, 계명을 지키지 않는구나. :7

 

 

▲3막 : (신랑) 너희는 죄를 짓고도, 왜 죄를 지은 줄을 모르느냐?   8:8~13

신랑 : 너희는 누구나 돈을 욕심내고 있다.

제사장과 예언자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10

 

(그 거짓의 내용이란)

상처를 입었는데도, 벌을 받았는데도, 벌 받은 줄을 모른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하다’고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말한다. :11

 

그들은 역겨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수치를 느끼지 못하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 :12

 

그래서 내가 너희를 망하게 하겠다.

포도밭, 무화과 밭이 말라 죽을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을 다 빼앗아가겠다. :13

 

 

▲4막, 신부의 반기    8:14~16

신부 :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 앉아만 있느냐?

(신랑이고, 하나님이고 다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길을 찾자.

우리 모두 굳건한 요새 성으로 가자.

거기에서 우리 죽음을 맞이하자.  :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물을 마시게 하셨다.

(그러니까 깨끗하게 죽자)

 

웬만하면 중재자가 나서서 이 부부싸움을 좀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화 <장미의 전쟁>처럼, ‘부부싸움’은 더욱 파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그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멸망하는 사람의 특징은, 절대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갈 데까지 갑니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반항합니다.

 

신부(백성들)의 계속적인 반항:

‘우리가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것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우리를 고쳐주실 때를 기다렸으나, 봐라. 찾아온 것은 재앙뿐이었다.’ :15

 

보아라. (하나님께 기대했으나 아무 것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

도리어 적군의 말들이 내는 콧소리가 단(북쪽 국경)에서부터 들려온다. :16

 

 

▲5막 : 신랑의 폭발  8:17

 

‘보아라. 내가 독뱀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길들여 부릴 수 없는 그 뱀이, 너희를 물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17

(광야에서처럼, 독뱀을 보내는 것은.. '다 죽이겠다'는 의미)

 

 

▲6막, 파국  8:18~22

(1차로 먼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신부 :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않은가?’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안 계신가?’ :19

 

신랑 : ‘어찌하여 백성들이 헛된 다른 나라의 우상들을 예배하며 나를 분노하게 하였느냐?‘ :19

 

신부 : ‘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오래 지속되나?’  :20~22

 

 

◑적용1. 하나님과 관계에서

 

▲1. 사람의 영혼이 둔감해지면, 하나님께 맞아도 맞은 줄 모릅니다.

“내 백성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들은 약간만 가볍게 고쳐주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 하고 말한다.” 8:11  

 

“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어디가 괜찮으냐!” 공동번역 8:11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건성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6:14  

 

    이건 제 얼굴에 스스로 침 뱉는 얘기이지만,  

    느헤미야서의 ‘수문 앞 광장 모임’ 같은 것을, 좀 더 강도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100일동안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꿈쩍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판이 아니라, 저부터 스스로 회개합니다. 

 

연평도 사건이 터진 지금 '맞아도 맞은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영혼이 병들면.. '하나님께 맞아도, 맞은 줄 모릅니다.' 

 

 

▲2. 하나님께 불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듣고 심판>하십니다.

 

민14:28,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3  하나님과 힘겨루기는 절대 안 됩니다.

겸손히 회개해야지요.

 

:3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14 '굳건한 요새성으로 가자. 거기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자.'

우리가 범죄해서 우리에게 독물을 주셨으니까, 우리가 깨끗하게 마시자! 

 

이렇게 자기 목숨을 거론하며,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요나서 4장에, 요나가 하나님께 대들었을 때는, 귀엽게 봐주셨지만,

본문 렘12장에서, 백성들이 대 들지만..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화나게 해서, '독뱀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17

 

또는 14절을, '자포자기'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대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사람이 교만하면.. 회개해야 되는 처지에,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들거나,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적용2. 인간관계에서

 

'끝까지 가면 안 된다'는 내용을 확장해서 적용하면..

 

▲마귀의 유혹은 ‘갈 데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분노 중에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해서..

정말 뼈아픈 손해와 후회를 하게 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갈 데까지 가면 안 됩니다.

혹시 가고 있더라도, 빨리 멈출수록 이익입니다.

 

지금 내가 혹시 

분노 중에 ‘어떤 극단적 선택’을 내리려고 합니까?  중지하십시오.

화를 가라앉히고, 맨정신을 회복한 후에 결정하십시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인 경우가 99%입니다.

절대로 ‘갈 데까지 가면, 안 됩니다.’

1초라도 빨리 돌이킬수록, 내게 이익입니다.

 

▲참으시는 예수님

아래 말씀은 외워 둘만합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갈 때까지, 끝까지 가고 싶은 길목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암송하면서 참는.. 내공이 있어야 합니다.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주1)

렘12:1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

 

 

◑절별 해석

 

렘8장의 내용구조는

1-12절, 유다의 재난과 그 이유

13-17절, 임박한 심판에 대한 재확인

18-22절, 유다를 위한 애가

 

8: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 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유다 왕들의 뼈와...묘실에서 끌어내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유다에 침략해 들어온 자들은

패배자들을 더욱 모독하기 위해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선지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뼈들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시체가 매장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것은

큰 저주와 수치로 간주되었는데,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선상에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1-3절은 앞장 내용의 연속인 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저질러질 만행에 대한 예언이며

바벨론은 유다 백성을 능멸하기 위한 목적 외에

무덤속에 묻힌 귀중한 패물들을 약탈할 목적으로 무덤을 파헤쳤을 수도 있다.

 

8: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백성들이 사랑하고 섬기며 경배하던 이러한 천체의 우상들은

그들의 흩어진 뼈들을 무관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내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뼈들을 주워모아서

장사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뼈들은 지면의 분토처럼 내버려지는 것이다.

 

8:3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본절이 지적하고 있는 요지는 도처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죽은 자의 시체가 무덤에서 끌어내어 팽개쳐지는 등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내리실 징벌에 비하면 이는 경미하다는 내용이다.

 

즉, 살아 남은 자들의 생은 죽은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다(왕하25:5-7 참조).

하나님의 수많은 권고와 견책을 무시한 결과는 참으로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심판이란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온갖 악행을 통해 육신의 배만 불리던 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임할 영원한 심판은 아마 이보다 더욱더 참혹할 것이다.

 

8: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그런데 남유다는 안 일어나고, 안 돌아온다는 뜻)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선 완악성을 지적한다.

즉, 누구든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만

유다 백성은 그릇된 길에 빠져들어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엄숙하고도 가혹하게 예언했으며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구제 불능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8: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실수와 과오는 때로 한 인간의 심경을 변화시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

또한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서

자신의 오류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니느웨 백성처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8: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그들이...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과 경고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정밀하게 살폈다.

그러나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말을 한마디라도 내뱉는 자는 없었다.

이런 광경은 우리가 5:1-3에서도 이미 보았던 바이다.

 

그들은 전장(戰場)에서 날뛰는 말같이 제멋대로 행하였는데,

여기서 '행하다'는 본서에서 아주 빈번하게 쓰이는 '슈브'로서 '돌아가다'가 기본 뜻이다.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서지 않고 그들의 익숙한 행위로 돌아섰다.

 

8: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예레미야는 여기서 조류의 생태를 예화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연계의 새들로 하여금 그 시기와 때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지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연계의 법칙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새들은 시기가 되면 돌아오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 백성은...알지 못하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법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

알지 못한 자들처럼 행동했다. 여기서 '알다'(야다)란 동사는 단순한 지적 인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 여기에는 감정적, 의지적 차원을 포함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체험의 개념을 담고 있다.

 

8: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그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여호와의 율법이 그들과 함께 있다고

주장한 근거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종교 의식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에 대한 반론으로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내세우는 '여호와의 율법'이란 것은 분명히 '기록된 율법'

즉 성전에서 발견된 바 있는 언약의 책 또는 신명기서와 같은 책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와 실천보다는 기록된 책 그자체에 무슨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미신에 젖어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책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경우와 똑같이 오히려 선지자의 메시지를 방해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본절에는 서기관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 성경에서 서기관이 어떤 직책을 맡은

특정 계층으로 언급되는 곳은 이 부분이 처음이다.

대상 2:55에 따르면, 서기관들의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하 34:13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은 요시야 통치 때에 대단히 두드러졌던 것 같다.

 

아마 그 이전에도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 및 가르치는 자로서의

소임도 맡았던 것 같다.

 

8: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두려움에 떨다가 중에 잡히리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투 와일라케두'는 번역하기가 다소 난해하다.

70인역과 벌게이트역은 '하투'를 '크게 놀라다'는 뜻으로,

'와일라케두'를 패전의 결과 포로로서 이송될 사실에 대한 경고 의미로 각각 이해했다.

 

반면에 페쉬타역(Peshitta)과 탈굼역(Targum)은 전자를 '흩어지다'는 뜻으로 옮겼다.

어쨌거나 본절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혼비백산하게 될 상황을 가리킴은 분명하다.

 

 

8: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다 거짓을 행함이라'

여기서는 전쟁 이후 저질러지는 범행이 예화로 사용되었다.

침략군은 유다 여자들을 빼앗아 가되 심지어 유부녀까지 그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소중히 여겨졌던 약속의 땅 가나안마저 유린당하고

적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런 참변에 대한 이유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으로 눈이 멀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악행을 발벗고 나서서 말려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거짓과 사악한 행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8: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70인역에는 10-12절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6:12-15과 유사한 내용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 전체가 중병을 앓으며

파국 직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만을 심어 주었다.

 

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그들은 이런 거짓 위안으로 백성들을 속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얼굴색도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뿐이다.

설령 심판을 조금 연기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유익될 것이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죄악은 더 커지고

그 형벌이 더욱 혹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포도나무 비유는 본서에서 2:21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거기서는 극상품의 선택된 포도가 야생포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으며,

이어서 6:9에 포도나무 비유가 등장하였는데,

거기서는 예레미야가 포도를 수확하는 자로 묘사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언약의 말씀을 준행할 때 따르는 번영, 축복(신29:9, 시37:9)과는

대조적으로 언약을 파기한 자들에게는 온갖 저주가 임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8: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절망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자구책을 강구하며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만, 그 모든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성읍은 단지 파멸의 순간을 조금 지체시키는 역할을 해줄 뿐,

파멸은 이미 기정 사실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독한 물'에 해당하는 원어 '메 로쉬'는 '쓴 물'로도 번역된다.

즉 '로쉬'는 신32:32에서 '쓰다'는 의미에서 '쓸개'로 번역되었는데,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쓴 것'과 '독'은 유다인들에게 있어 밀접하게 연관된 의미를

시사했던 것 같다(민5:18 참조).

 

8: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일말의 희망도 없어진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명시하는 자들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면 그때는 뉘우쳐도 이미 늦어버리게 되는 것이다(롬 2:4, 벧후 2:10).

 

8: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바벨론의 마병이 노도처럼 내달아오는 것을 직접 보게 해주는 것 같은 생생한 예언이다.

이런 맥락에서 벌게이트역(Vulgate)과 페쉬타역(Peshitta)은 '들리고'를

'이미 들려온다'라고 옮겼다.

 

8: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13절에 이어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등장한다.

13절과 본절 사이에는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절에는 심판이 닥쳐오는 것이 독사가 달려드는 것으로 비유되었는데,

이 독사에 대한 예화는 민21:6-9의 내용을 상기시켜 준다.

 

그들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한 죄악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불뱀들로부터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불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이 있었지만,

지금 이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전혀 없다.

 

8: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본절에서부터 22절까지는 예루살렘 파멸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픔과 한탄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레미아의 이 고통스러운 한탄 속에는 여태까지는

그나마 버틸 만한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슬픔에 짓눌려 힘을 쓰지 못할 지경이라는 의미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으며, 그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충성심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과 맞물려 있었으며,

그 결과 그는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여호와께서...그 왕이...격노케 하였는고'

여호와의 왕권 사상은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본절에서처럼 여호와를 왕으로 직접 호칭하는 것은 비교적 잘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질문 사항은 구약의 다른 슬픔의 시에서도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시44:24-26, 73:25-28 등)

 

그러나 예레미야가 선호하였던 애도의 표현은 비애와 놀라움을 뒤섞어서 나타내는 형식이었다(2:14, 8:4,5, 14:19, 22:28).

한편, 문맥상 본절에 등장하는 세개의 의문절 중 첫 번째 두 개의 질문은 백성들이 제기하는 물음이고

세 번째 것은 여호와의 질문으로서, 앞의 두 질문은

'그렇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라는 긍정의 대답을 전제한 물음이다.

 

8: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백성들의 불안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추수'(카치르)는 밀수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추수 때가 지나갔고

또 여름 과실을 수확하는 시기가 지나갔다. 추수는 흔히 4월에서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밀 추수가 흉작으로 끝날 경우는 포도나 무화가 또는 감람 열매등의 수확이라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조차 수확하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바로 이런 상황을 예화로 사용하였다.

유다 백성들은 반역된 길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것들을 차례차례

다 놓치고 말았으며 그래서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받을 기회를 영영 상실하고 만 것이다.

 

8: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에 대한 책임이

그들의 극악한 죄악에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여기서는 침략군의 발굽에 짓밟히는

동포의 모습을 생생히 보고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8: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으나 치유받지 못한 환자에 비유된다.

그런데 정작 치유받지 못한 이유는 명의나 명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질병을 인정하지 않고 또 치유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치유 계획과 은혜에 순종하고

고질적인 병폐인 죄악들에 대해 회개하였다면 그들에게는 건강과 축복이 주어졌을 것이나,

그들은 정반대의 태도를 고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