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9장, 남유다의 패망 이유 렘9:1~26 편집자 글
하루아침에 ‘방대한 예레미야서’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포기하기 보다는,
금년에 10% 이해했다가, 3년 후에 20% 더 이해했다가.., 저는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재미도 없는 내용이라서 죄송합니다. 써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네요.
해외신학교에서 <예레미야서> 장별로 강의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편
▲렘9장의 내용분해 주1)
9:1~9 : ‘유다의 죄악’
9:10~11 : 예레미야의 애가
9:12~16 : 남유다 멸망의 이유 1
9:17~22 : 예레미야의 애가
9:23~26 : 남유다 멸망의 이유 2
아래에서는 '남유다 멸망의 이유 1, 2'만 살펴봅니다.
◑남유다 멸망 이유 1 :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따름 9:12~16
9:12절 ‘왜 이 땅이 폐허가 되었습니까? 황무지가 되었습니까?’
13 ‘그것은 내 가르침을 버리고, 내가 하라고 명령한 일을 하지 않았다.’
14 ‘그들은 거짓 바알을 따랐다.’
15 ‘그래서 내가 이 백성에게 쓴 음식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
16 ‘내가 그들을.. 그들과 그 조상들이 모르는 낯선 나라들 가운데 흩어 놓겠다.
(그래서 너희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진멸시킬 때까지 나의 칼은 그들을 뒤쫓을 것이다.’
9:12~16절의 내용을 줄여서, 이해하기 쉽게 위에 축약해서 써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더 이해하기 쉽게 딱 한 줄로 줄이면,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버리는 것은, 바알을 따르는 것이고,
바알을 따르는 것은.. 계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기독교가 참 성경적인 길을 버리고 타락하면
바알주의로 기울게 되는데요. (시소를 연상하세요! 한쪽으로 기울면 반대쪽이 올라가는)
바알주의란 쉽게 ‘풍요와 다산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 짝은 아세라인데 ‘쾌락의 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확인 요
어쨌든 바알과 아세라는,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주고 있습니다... 풍요, 다산, 쾌락(정욕)
이렇게 참 성경적 기독교가 점점 바알주의로 기울게 되면,
거기에 나타나는 가장 큰 증상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소위 ‘율법폐기론’ 또는 ‘반율법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계명이란 ‘율법’(중에 도덕적 명령)을 고상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율법이 ‘율법주의’로 빠지는 역기능적 요소가 있지만,
율법(계명)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릴 리 없습니다.
*율법론 http://blog.daum.net/bible3/7373110 을 꼭 참조하세요.
▲그러므로 남유다, 예루살렘의 멸망에는.. 제사장, 선지자의 큰 ‘기여’가 있었습니다.
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것(바알주의)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말씀의 대언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제쳐 놓고
‘자기 계발이나 처세술’
‘예수 믿고 물질적, 성공의 복 받자’
이게 나쁜 이유가.. ‘계명’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계명을 가르쳤고요, (대표적으로 산상수훈)
사도바울도 계명을 가르쳤습니다. (서신서의 전반부는 복음, 후반부는 계명)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에서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이 가르쳐지지 않고,
다른 것(바알주의)이 가르쳐 지고 있다는 것은
‘멸망의 서곡’이 연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서곡이 625이후 처음 있은 포격사건입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갈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을 거슬러,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서가 지적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입니다.
적어도 렘9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유다 멸망 이유 2 : 세상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았음 9:23~26
9:23절 ‘자기 지혜, 자기 힘, 자기 부유함을 자랑 말라.’
24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라’
25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지 못한 자와, 할례 받은 자를 내가 다 멸하겠다'
(내 백성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 다 함께 처벌하겠다. 남유다를 이방과 함께 멸망히키겠다.)
26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
▲윗 단락에서 ‘계명-바알주의’가 대비되었다면,
이 단락에서는 ‘세상 자랑-마음의 할례’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육신의 할례만 받은 사람은
늘 자랑하는 것이
‘자기 지혜(세상 학벌), 자기 힘(세상 능력), 자기 물질’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거 자랑할 수 있죠.
그러나 그런 것 자랑하다가.. 남유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자랑’은 기독교를 세속화/타락시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고,
육체의 할례(오늘날의 세례)만 받은 사람은,
믿고 나서도, 그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학벌을 자랑하고, 능력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저 loser' 운운 합니다. *루저 : 사회에서 뒤쳐진, 성공 못한 사람을 일컫는 속어
그런 사람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만 예수를 믿었지, 속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 예수를 믿는 이유는.. 그저 (학벌, 능력, 물질) 복이나 더 받자는 것입니다.
▲본질적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마음의 할례' 주2)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은 거짓 신앙에 있었고,
거짓 신앙이란.. 신앙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었습니다. 제사도 있었고, 절기 준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외적인 것이었지, 내적인 ‘마음의 할례’는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전체가 거짓 신앙/바알주의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선민이 망했는데,
그렇게 된 근본적 원인이
국방이 약해서가 아니요,
경제가 붕괴되어서가 아니요,
정치를 잘못해서가 아니요,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신앙을 그릇되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백성들이야 뭘 알겠습니까!
가르침 받고, 시키는 대로 했겠지요.
▲하다하다 안 되면 뒤집어엎으신다.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을 불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도저히 좋게, 말로는 안 되니까..
저들을 돌이키기는 돌이키게 해야 하겠는데,
그래야 천국에도 가고,
또한 이방에 선교적 사명도 감당하겠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니..
가장 마지막에 써야 될 카드(예루살렘 멸망)를 꺼내 드신 것입니다.
그 전에 벌써 예레미야를 감동해서
40년을 줄곧 예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관성의 법칙’을 거스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듣기 싫다고, 왜 자꾸 ‘틀린 소리’ 하느냐고,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나중에 보면, 예레미야가 감옥을 3번이나 옮겨 다닙니다.
그런데 결국에 예루살렘이 불 탄 이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가르침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까지,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선지자였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선민, 남유다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과 그 거룩한 성전이 (절대로 망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불타고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정치/군사/경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근본에 신앙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타락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못하고,
겉으로 신앙은 있었으나, 속으로/마음의 신앙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일차적으로,
제사장, 선지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예수님 당시에도 똑같이 반복되어,
예루살렘은 또 다시 한 번 불에 타고, 2천년 동안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제사장, 선지자들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하나님을 믿는)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 복음 관련
...............................
주1) 렘9장 내용 분해
로날드 클레멘츠,「예레미야」 *Ronald E. Clements Jeremiah Interpretation
렘9장의 내용 참조했음. 이 책, 추천할 만합니다. 단, 신학적 책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는 <쉬운성경>이 제게는 딱 좋습니다.
개역성경보다는, 적어도 예레미야서/소선지서에 있어서는,
<쉬운성경>이 전체 줄거리, 흐름 파악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개역이 제게는 이해에 어려웠습니다/ 편.
주2) '마음의 가죽을 베기' *이 단락 유착과 이개이동 에서 가져옴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4:4
위 구절이, 사도바울이 말한 ‘마음의 할례’의 출처이다. 롬2:29등
마음의 가죽을 베라는 말씀이다. 의학적 용어로 ‘박리수술’이다.
왜 마음의 가죽을 베어야 하는가?
‘이개이동’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유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엉겨붙어 있기 때문에,
장기박리수술이라고 있는데, 그 막과 막이 붙은 상태를,
두 장기가 유착된 상태를 잘라서 떼어내는 것이다.
‘마음의 가죽을 베라’는 뜻은, 렘4:4↑
내 마음에 자식이 우상처럼 유착되어 있으면, 그것을 베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의 성공과 형통을 꾀하려는 마음을 베어내야 한다.
그러면 자식은 하나님께로 이관되어 버리면서,
내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유착되는 것이다.
편안할 때, 십자가 붙잡고 박리(잘라내는)수술 해야 한다.
가정이 편안할 때는, 내 마음이 얼마나 자녀에게 들러붙어 있는지 잘 못 깨닫는다.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는, 내 마음이 얼마나 사업에 깊게 엉겨붙어 있는지, 못 깨닫는다.
그러니까 평안할 때, 우리가 스스로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박리 수술'(고난과 징계)을 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욥을 생각해 보자.
욥이 상실하게 되는 모든 것들, 자녀 재물 사업 건강, 배우자, 친구..
이런 모든 것들이, 욥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욥에게 다 엉겨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떼어내어 주셨을 때,
욥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뵙고 만날 수 있었다.
욥의 고난은, 동방의 의인 욥을 더욱 성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대 수술이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설교를 듣는 이유는,
그런 징계와 고난이 오기 전에, 미리 미리 깨닫고,
그런 징계와 고난을 피해 가자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나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내 모든 우상에 대해 죽음을 선언했을 때, (내가 정말 마음의 틀을 바꾸었으면)
하나님이 굳이, 내게서, 가족/직장/명예를 빼앗아 가실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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