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의 전사 왕하23:26-30, 대하35:20-25 출처보기, 30% 편집
*블로그에 게시하기에 굉장히 망설여지는 글입니다.
이런 분야에 관심 있는 분만 읽어 보세요. /편
◑역사해석의 미스터리, 선왕 요시야의 전사 戰死
▶기원 전 609년경, 유다의 므깃도 평원에서
유다가 낳은 선한 왕, 요시야 왕이 전사戰死합니다.
요시야는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에 참전하러 올라가는 애굽의 바로느고를
노상에 므깃도에서 저지하는 전투를 벌이다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갈그미스에서 (여전히 주전 605년경)
애굽, 앗수르와 (신흥강국) 바벨론의 역사적인 전쟁이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바벨론(신바벨론)이, 그 후 근동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지금 애굽은, 앗수르 제국을 도와
신흥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가의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딴 마음’이 있었겠지요.
뭣 하러 앗수르 좋은 일을 시켜주겠습니까.
아마 애굽도,
앗수르도 아닌, 바벨론도 아닌, 애굽의 패권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남유다와 요시야는,
선왕 히스기야 때부터 전통적으로 앗수르와 원수였으므로,
앗수르를 도우는 바벨론을 치려는 애굽을
갈그미스로 가는 노상인 므깃도에서.. 저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유다의 선왕 요시야가 전사합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신명기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서
남 왕국 다윗 왕조의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었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다윗-여호사밧-히스기야와 더불어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는데,
그런 성군 요시야가 나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전사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주1)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동안 너무 눌려 있었던)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의한 중동세계의 판도변화에 따라
꺼져 가던 유다 왕국도,
이 틈에 재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차에
유다 백성의 희망으로 달아오른 그 뜨거운 가슴에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요시야는
(선왕 므낫세로 인해 훼파된) 성전을 수리하며,
또한 그 와중에 발견된 율법책으로 말미암아 대대적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써,
성군 요시야가 다시금 유다의 국운을 융성하게 하리라는
남유다 백성들의 가슴 벅찬 희망이 있었는데,
돌연 요시야의 사망은,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①요시야 같은 선왕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②그리고 ‘므깃도 전투’ 역시, not 갈그미스 전쟁
유다의 천적 앗수르와 동맹하려는
애굽을 저지하는 전투였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이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왜 요시야가 아깝게 죽었나요?
유다 백성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도 성경을 읽다가, 아리송해지는 대목입니다.
나쁜 왕이라면 당연하지만.. 왜 선왕에게 이런 비극이 생겼습니까?)
앗수르는 망해야할 저주의 나라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전도하기를 거부했던 나라 아닙니까!
그 못된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의 행위란
(그런데 애굽도 ‘딴 생각’이 있었다고,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행위였습니다.
(애굽의 속셈은, 앗수르와 손잡고, 신흥 강대국 바벨론을 꺾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자기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애굽의 갈그미스 원정길을 막으려고 했는데,
의외로, 하나님은 애굽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남유다의 요시야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거 웬일입니까?
▶남유다는 놀랐습니다. 유다 역사가들은 정말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트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군 요시야가 이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죽게 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깊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요시야 왕의 죽음에 대한, 역사해석의 차이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요시야의 죽음에 대하여
열왕기의 해석과
역대기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일단 두 본문을 소개하고요..
▶1. 신명기(율법)적 역사해석 왕하23:26~30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밴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고자 하여 *개역/KJV엔 '치고자'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뭐든 상관 없음.
애굼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2. 역대기적 역사해석 역대하35:20~25 ←이 글의 본론으로 다루는 대목임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고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을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신명기(율법)적 역사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스라엘로 이끌어 들인 그 종교적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너무 컸기 때문에,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의로움으로서도!
선왕 므낫세가 촉발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관점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면,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죄가 요시야 왕의 의義를 압도하였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해석은
‘요시야 왕이 이 때, 여기서 전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과연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느냐?’ 하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본문 역대기에) 등장시켰고
뿐만 아니라,
느고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하나님의 “신탁↓”oracle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요시야 왕의 므깃도 전사사건의 역사적 해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대하35:21절의 ‘족속’이 누구인가, 앗수르인가, 바벨론인가.. 애매합니다.
그러나 애굽도 ‘딴 속셈’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 때,
그게 앗수르인지, 바벨론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든 상관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금 애굽의 적은 바벨론이지만,
애굽 역시 결국 앗수르까지 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딴 속셈’이 있었다고 봅니다.
일단 지금은 바벨론을 치기 위해 앗수르와 동맹하지만,
애굽도 근동 재패의 욕심이 있다고 볼 때, 앗수르와 동맹은 ‘적과의 동침’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대하35:21
그러나 갈그미스 전쟁의 최후 승자는 바벨론이었습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승한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강력한 적수였던 앗수르와 애굽을 한꺼번에 꺾는 쾌거를 이루고,
갈그미스 전투는 이제 역사가 ‘바벨론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서곡이 됩니다.
◑바벨론 시대를 열어가시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역사의 흐름을 잘못 읽은 요시야
위 본문 역대하가 보여주는,
남유다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은,
‘바벨론 시대를 열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요시야는 그 역사를 읽지 못했던 것이어서,
불행하게도 그 역사에 므깃도에서,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역사에 제동을 걸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애굽 왕 바로느고는, 하나님의 신탁(지시)을 받고,
갈그미스에 올라갔다가 패배했는데,
그러면 그가 받은 신탁이 잘못된 것이었는가요?
하나님의 지시대로 올라갔다면, 승리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받은 신탁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성경에 대하35장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경 기자가 옳다고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신)바벨론 시대의 도래’였습니다. *다니엘의 금신상 꿈 해석 참조
그래서 바로느고를 신탁으로 갈그미스에 불러올린 것이었습니다.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앗수르를 한꺼번에 바벨론에게 패배하게 하시고
바벨론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시대섭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 시대도, 결국에는 채 1백년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요시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13년에 예언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렘1:2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약 18년 정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애굽 시대가 도래한다고 예언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가 앗수르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한 것도 아닙니다.
(방금 성경을 검색해보니, 예레미야서에 ‘앗수르’란 단어는 단 4회, 중요한 뜻 없음.
‘바벨론’이란 단어는 150회 가량 나옵니다.)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절은, 차라리 앗수르가 강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론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참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시야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바벨론이 강자로 부상한 것은,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부터였습니다.
▶마치는 말
①역대기 역사가는,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②이것은 분명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다가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가진 의미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③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즉, 신흥 바벨론을 중동 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역대기 역사가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군 요시야의 전사 이유였습니다.
요시야는 성군이었지만, 역사를 못 읽어서,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 바벨론을 등장시키시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남유다를 심판하시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성서의 진리가 지닌 진정한 역동성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통하여
역사의 주권은 인간의 이념적 판단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어떤 ‘역사 재편’의 청사진/로드맵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전통 강국 애굽과 앗수르를 바벨론에 패하게 하시고,
중동지역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당분간 넘겨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서의 예언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치게 하시려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큰 계획의 틀이었는데,
요시야가 그 흐름과 청사진을 깨닫지 못하고,
이 거대한 하나님의 중동 역사 재편의 섭리에 간섭하려 든 것입니다.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 역대기 역사가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사를 바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역사 말입니다.
덧붙혀서, 요시야의 청전 청결과 개혁운동도
사실은 본질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그 성전 앞에서 책망했습니다.
*관련 설교 : 요시야의 성전 청소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참고로, 성경에 세상 마지막의 역사에 대한 시나리오가 나와 있나요?
나와 있습니다만, 상징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풀어야' 하는 역사입니다.
일례로, 계18장(세상 마지막)에 ‘바벨론’이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전서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문안한다..’ 했는데, 벧전5:13
학자들은 여기 바벨론은 ‘로마’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세에 다시 등장할 강국은, 그래서 결국에 최후로 멸망할 나라는,
‘바벨론’ 또는 ‘로마’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17:9참조
여기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의견이 분분하므로.. 다 언급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역사의 큰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전 7세기, 요시야 왕 당시에만, 역사의 큰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후 21세기,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벨론'이라는 키워드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분변하지 못하면..
요시야처럼 오판하면..
하나님의 역사 운행에, 본의 아니게 반기를 들다가,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의 큰 그림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리신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노력하는 것은.. 그 큰 그림 속을 메꾸는 작은 그림들입니다.
말세에 바벨론, 로마(상징적 의미의 나라)는
인간이 절대 그 힘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융성하다가.. 오직 주님의 재림으로만 파국을 맞고, 꺾어질 것입니다.
덧붙혀서,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앞으로 되어질 역사를 예언하고,
실제로 그 예언대로 역사가 진행되었음을 봅니다.
오늘날에도 젊은 다니엘들이 일어나, 수 십 년 기도하면서 준비해서
성경(계시록 등)을 연구하고, 역사를 연구하고, 시대의 징조들을 살피면서
다니엘처럼, 되어질 역사를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
주1)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8.15의 역사적 사건을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를
“8.15는 조선민족에게 도둑같이 찾아 온 하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
이라고 해석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출애굽 해방 사건이나 출 바벨론 해방 사건이나
한국민에게 있었던 8.15 해방 사건과 같이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요”이었던 것입니다. ▣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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