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형통’에 대한 예레미야의 질문과 하나님의 답변 렘12:1~17 인터넷설교 편집
◑예레미야의 불평 렘12:1~4
▶악한 자가 왜 형통하게 잘 삽니까?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불평)할 때에는, 언제나 주께서 옳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오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다 형통한가?’
이 말은 절반 맞고, 절반 틀린다.
예수 잘 믿어서.. 형통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예수 잘 믿어서.. 핍박 받아서 괴로운 사람도 있다. (예레미야, 바울 등)
반대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형통한가?’
이 말도 절반 맞고, 절반 틀린다.
예수 안 믿어도.. 형통한 사람도 얼마든지 많고,
예수 제대로 안 믿어서.. 정말 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이유는,
결국에 영생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에 영원히 영생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지,
잠깐 사는 세상에서 형통하고/형통치 못한 것은.. 큰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안 믿어도, 부자 될 수 있다.
요즘 중국, 인도에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인구가 너무 많으니까, 부자들의 숫자도 비례적으로 많다.
일본, 대만, 싱가폴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다 잘 산다.
그런데 그들이 부자가 된 것이, 예수 잘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타종교 믿는데도.. 부자로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부자로 잘 산다.
여러분, 유럽이 예수 믿어서 부자 되었다고 그러는데,
지금 유럽에 정말 진실되게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과연 인구의 몇 %나 될까? (많으면 1~2%다.)
유럽 인구의 주류가 가톨릭이지만, 명목상 신자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유아세례, 결혼식, 장례식 위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다.
(유럽이 예수 잘 믿어서 부자로 살고 있다는 말은.. 지금은 틀린 말이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 5백대 부자를 순위별로 뽑았을 때,
거기에 거듭난 기독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축복 받아 부자 된다!?’는 말은
!표와 ?표를 동시에 가지는 명제다.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완전한 명제는 아닌 반쪽 진리인 것이다.
▶본문의 예레미야처럼, 욥도 이렇게 불평한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라. 욥12:6
시편에서 아삽은 이렇게 한탄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시73:2~5
세상에 있는 장수長壽 마을 중에서,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몇 %나 될까?
해외 토픽에 장수 마을이라고 소개된 마을들은,
제가 접한 소식에 의하면, 다 예수 믿는 마을이 아니었다.
회교 마을이거나, 일본의 신사 섬기는 마을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꾸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장수 한다’ 그런 쪽으로 몰고 가면 안 된다.
왜 영생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평안이 있는데,
그런 차별화된 복과 진리는 간과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얻을 수 있는 ‘부자, 장수’ 이런 것을 거론하는가? - 잘못이다.
▶특별히 고향 사람들에게 핍박 받는 예레미야
아나돗 고향 땅에 있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1:18~23
그 문제를 대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하도 기가 막혀서,
12:1절에서, 하나님께 한탄하는 것이다.
저들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들이다. 12:2b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보고 계시는 바대로,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 전심을 다해 가고 있는데,
그런데 왜 내가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나를 괴롭히는 저 불의한 고향 사람(제사장)들은 왜 저렇게 형통한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계속 고난인가?
그게 예레미야의 딜레마였다.
그들은 ‘우리가 예레미야 같은 자 한 명 죽여 봐야, 아무 일 안 생긴다!’ 11:19
그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실 앞에서 예레미야가 황당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상상하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불평했을 것이다.
도대체 작은 일까지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 사정은 못 보시나?)
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나의 아버지요,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이렇게 처참하고 참담한 환경을 겪을 수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만약에 이병철이나 빌 게이츠의 자녀가 있다면,
그들의 자녀 중에 혹시 아무리 못난 자식이 있다 그래도
이병철 씨나 빌 게이츠가 돌 볼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세상 부자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으신 분이신데,
왜 내 예레미야 내 사정은 돌봐 주시지 않으신가?.. 는 탄식이다.
도리어 나를 박해하는 저들은 더 승승장구 하고 있으니,
예레미야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제가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하는데, 왜 내 현실은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부요함이란, 믿음의 부요함, 영적인 부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장수함이 문제냐, 천국 가서 영원히 살 것인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만...)
이러한 고민을 예레미야가 하고 있다. 주1)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1) 렘12:5~6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5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언뜻 보면, 동문서답처럼 보인다.
지금 예레미야가 당한 상황은,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자기를 반대하고 죽이려 하는 살기등등한 상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편안 땅(평지)에서 보행자(걷는 자)와 함께 경주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고난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너는.. 걷는 자가 아니라.. 말과 함께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고난 당한다.)
앞으로 너는.. 편한 맨 땅이 아니라.. 요단 강물이 넘치는 더 큰 고난을 당한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인간인데, 슈퍼맨이 아닌데,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지금 당장
악한 사람들이 이렇게 형통한 것에 대해, 변명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깐 데 또 깐다’는 말이 있듯이,
혹 떼러 하소연 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여주신다.
‘네가 고작 네 고향 사람들이 너를 핍박한다고, 내게 하소연이냐?
너는 앞으로 더 고통스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망이 내게 역사할 때, 생명이 저들에게 역사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4:12
기독교의 복음, 예수님의 방식은,
칼과 창으로, 아니면 물질과 권력의 힘으로
그렇게 사람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실 때,
그 선지자가 ‘강한 힘을 통하여’ 대언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약함과 겸손의 힘으로’ 대언하길 원하셨다.
그것이 시대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인격적인 방법인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사역자들도,
렘12:1절의 예레미야와 똑같이 탄식할 수 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데,
저는 오히려 더 궁핍하게 되고, 저들은 오히려 더 살찌고 권력을 누립니다.
하나님, 우째 이런 일이..?’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망이 네게 역사하는 그 순간에, 지금 누군가에게 생명이 역사하고 있느니라!
그리고 지금 보행자와 경주해도 그렇게 허덕거리면,
앞으로 말과 경주할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5절b에서 ‘요단강 물이 창일한다’ 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요단은 상징적으로 죽음을 뜻한다.
‘네가 죽음을 앞두고는 어떻게 할래?’ .. 이런 뜻이다.
‘네 아나돗 사람들의 박해가 점점 더 창일하고 범람해서,
이제 장차 너를 죽게끔 만들 것이다.
그런데 네가, 고작 지금 당하는 고통가지고 그 엄살을 부리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12:6
이러고서야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여러분!
이 예레미야가 당한 상황을 그대로 신약으로 갖고 와 본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공의회에 두 번째 잡혔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채찍으로 매를 맞게 된다.
맞고 나오면서 행5:41절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이 능욕 받는 자로 합당히 여김을 받았다’고 했다.
자기들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해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내가 특별히 핍박 받을 자로 뽑혔다’ 이거다.
그래서 자기가 고난당하는 것을 오히려 특권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늘 한 말이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 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예레미야처럼 고난당하는 것을
도리어 특권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 자세와 얼마나 다른지..
오늘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영광을 받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천국에 이르러서야, 어느 자랑이 합당한 자랑이었는지, 판가름날 것이다.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3) 렘12:14~17
▶하나님이 뽑아 버리시는 때가 있다.
정한 심판의 때가 있다. 그 때가 되면, 내가 악인을 다 뽑아 버리겠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내리라! :1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셔서, 당장에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게 무엇보다 우리에게 좋다.
그렇게 악인들을 즉시로, 당장에 심판하실 때,
세상에 의인들까지 다 심판받아 멸망당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신다. 심판의 시간까지!
그러나 그 심판의 때는 반드시 있다.
가라지를 뽑으시는 날이 있다.
우리는 그 분의 길이 참으심을 시험하면 안 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2:4
.................... 추가로 연구할 부분 ................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2) 렘12:7~13
-내가 다 주시해서 보고 있다. 방관하지 않는다.
▶1. 사람들이 사나워졌다. 사자처럼 변해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한다.
‘내 소유인 나의 백성이 숲의 사자처럼 변하여 나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미워한다.’ :8
▶2. 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밭을 망쳐 놓았다.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10
........................
주1)
예레미야의 첫 번째 불평 : 렘12:1~
예레미야의 두 번째 불평 : 렘15:10~
예레미야의 세 번째 불평 : 렘17:14~
예레미야의 네 번째 불평 : 렘18:18~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불평 : 렘20:7~
예레미야의 여섯 번째 불평 : 렘20:14~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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