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이 깨어지다 렘11:1~17 편집자 글
본문에 충실하게 설명하려다 보니, 실력이 없어서 ‘딱딱한 설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구약과 연결해서 보는 바울의 믿음론-클릭- 을 보시면, 더 도움이 됩니다.
◑서론 : 언약과 믿음은 동일선상에 있다.
오늘날 얼핏 생각하면,
구약의 언약은 잘못된 것이고,
신약의 믿음은 바로된 것이므로,
‘언약(또는 율법)을 버리고, 믿음을 취하자.. 그래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런 생각은 ‘구원 받기에 상당히 위험하고, 성경을 오해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구약의 신앙을 대표하는 언약
'언약'covenant 이라는 말은, ‘아주 깨어지지 않는 강력한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언약식’을 맺었다... 는 말이 들립니다.
절대 깨어지지 않는, 절대 깨어져서는 안 되는.. 강한 약속, 계약을 뜻합니다.
그런데 ‘언약’이란 말 대신에, ‘계약’이란 말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약’이란 말속에는 ‘계약조건’이란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계약’이란 말속에는 ‘계약조건’, 즉 쌍방이 이행해야 하는 어떤 의무조항이
반드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집을 사거나, 전세를 얻거나, 물건을 사거나, 사이트에 가입할 때도
거기 ‘계약조건’이 까다롭게 나오잖아요. 귀찮아서 다 안 읽습니다만,
과거에 미국에 이민가신 분들이.. 그 ‘계약조건’ 영어로 자잘하게 써진 것,
안 읽고 계약 체결했다가.. 손해 보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계약조건’ 없는 계약은.. 계약이 아닙니다. 계약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노아언약,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 뭐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만, (각 성경구절은 인터넷 찾아보세요)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 여러 언약들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가 계약백성으로 의무조항(계약조건)을 성실히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지켜주고, 복 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더 줄여서 말하면
‘너희가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너희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계약(언약)이 파기되는 것이고,
너희는 내 백성도 아니고, 나는 너희 하나님도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신앙을 대표하는 ‘새계명’
구약의 ‘언약 신앙’이 잘못되어서, 하나님이 새롭게 ‘믿음 신앙’을 주셨다..
이건 난센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뭔가 실수하셔서, 잘못된 것을 애당초 주실 리 없습니다.
구약의 언약 신앙은,
신약에 와서 새계명이요, 마음의 계명, 마음의 언약입니다.
구약의 언약/계명을 좀 더 보완한 것인데,
구약시대에 ‘계명’ 하니까.. 다들 ‘외적으로/행위로’ 지키더라는 것이에요.
구약 언약에 문제가 돌출되었는데, 외식적으로 지키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새계명’이 렘31:31-34, 겔36:26-27 등에서 예고편으로 언급되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본격적으로 새계명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 새계명의 특징은 ‘계명을 마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십계명을 지키되, 마음 근본 동기로부터 지키라는 것입니다. 마5장 산상수훈 등
▲다시 말해서, 신약에서 ‘계명’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더욱 보완된 것입니다.
‘행위의 계명’에서 → ‘마음을 다해 지키는 계명’으로
보다 본질에 가깝게 제정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면,
구약은 율법이고, 그건 잘못된 것이니까,
신약은 은혜니까, ‘모든 율법/계명은 다 버려야 한다...’
이런 개념은 대단히 큰 오해입니다.
정리하면,
신약신앙, 새계명, 새언약에서 ‘계명’을 없애버리는 것은
(신약이라는 말이, 새로운 계약이라는 뜻이지요.)
찐빵에서 앙코 빼기, 계란에서 노른자위를 빼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믿음’은 무엇인가?
롬1: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4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거기서 ‘믿음으로 산다’(히. 에무나)는 말은,
어느 교수님이 컨코던스 작업을 잘 해 주셨는데, ‘버티다’는 뜻입니다.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데..,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오직 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끝까지 버티며 사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11장을 ‘믿음장’라고 그러는데,
거기 나오는 위인들이 모두 ‘어려운 환경 속에서 버티고 사신 분들’입니다.
‘2+2=4’, ‘인도에 겐지스강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런 사실을 믿는 믿음, 지식적 동의는,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로마서의 믿음은 뭐냐고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신칭의'의 믿음은, 말 그대로 '칭의'입니다.
칭의는 '믿음' 또는 구원의 한 측면입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글 맨 하단에 더 자세히 설명했으니, 일단 넘어가시고요)
▲복음과 관련해서 정리하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과
‘언약’ 쉽게 말하면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거기에 ‘계약조건=계명’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는데,
언약 백성이 그 언약을 ‘외적 행위/외식’으로 지키면서,
자기들이 ‘언약을 지켰다’고 자처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언약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의 마음을 씻어주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보다 자발적으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 피와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의 소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죄의 소욕’도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서
마음이 변화된 사람, 즉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진정한 동기로..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죄짓는 소욕처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키기로 애쓴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입니다.
신약에는, 그 일을 즐겁게 하는 마음판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http://blog.daum.net/rfcdrfcd/15972063
지금까지 길게 설명한 내용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신약시대에 새계명이다. 믿음이다... 하는 신앙에
계명이 빠진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습니다.
외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내면 근본동기로(성령의 소욕으로) 지키는 것이니까요’
믿음으로 사는 삶은.. 믿음으로 끝까지 버티면서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둘 다 수용해야지,
하나를 취하고, 다른 쪽을 버리면.. 그건 말이 안 되지요.
◑렘11장 본문 설명
▲문단 구분
1~5절, 과거에 그들은 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켰다.
6~10절, 그런데 지금은 거듭되는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와 언약을 깨뜨렸다.
11~17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보호해 줄 의무가 없다. 도리어 재앙으로 치겠다. 언약이 파기되어서!
11절, ‘그들이 나에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겠다.’
12절, ‘재앙의 날이 이를 때, 그 우상들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14절, ‘그들에게 닥치는 재앙 때문에, 그들이 내게 부르짖어도 내가 듣지 않겠다.’
15절,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반복해서 강경하고 매몰차게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이유는
‘언약이 깨어졌다. 그리고 바알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10, 11절
(18~끝절, 예레미야에 대한 음모, 별개의 단락이므로 이 지면에서는 다루지 않음)
▲렘11장을 주욱 읽어보면, 대조되는 2가지 개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언약’과 ‘바알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바알 우상’을 버린다는 것이요,
‘바알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언약(계명)’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글의 주제
여러분, 우상숭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사람들이 만든 신’입니다.
그 특징은 ‘계명은 없고, 무조건 신도가 원하는 복만 준다’는 것입니다.
*관련글 : 고등종교와 하등종교 http://blog.daum.net/bible3/6715877 (7항)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셨던 바알,
백성들이 그토록 버리기 어려웠던 바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알을 규명할 고대문헌자료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렘11장에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바알의 특징은.. 언약(계명)신앙과 정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언약(계명)도 지키고, 바알도 잘 믿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언약(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알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여타종교들은 '바알주의'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인격적 계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상적 결혼 관계는 '인격적 언약/계약'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에게만 충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관계는, 그런 '인격적 계약'관계가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만큼 성경(계명)을 가까이 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회교가 코란을 가까이 한다고 하지만, 코란의 극히 일부분(몇 장)만 외고 암송합니다.
불교가 불경을 가까이 한다고 하지만, 불경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불교신도들이 집에서 날마다 불경을 읽는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마치는 말
렘11장은, ‘언약이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알을 섬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약신앙과 바알신앙의 대조점을 보게 됩니다.
참 신앙은 언약신앙=계약신앙=계명신앙입니다.
바알 신앙에는, 계명이 없습니다. 바알과 신도의 인격적 계약이 있나요?
‘바알의 십계명 이런 게 있습니까?’
예레미야 당시에, 번제를 드리면서도, 바알우상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번제 제사를 드리면, 벌을 피하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렘11:15
바알 산당이 유다의 성읍 가운데,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13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깨드린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고 있더라도..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도, 바알우상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알우상으로 빠질 수 있는 것은,
언약신앙=계명신앙=믿음신앙에서
‘계명’을 교묘하게 빼 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그것도 자기 마음으로)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언약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됩니다.
언약(계명)은 지키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 빌며 ‘달라 달라’ 하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와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런 신학을 아예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한 번 백지 상태에서 신구약 성경을 끝까지 읽어보십시오.
‘이신칭의’ 신학이 생긴 것은, 중세교회가 워낙
‘교회에 온전히 복속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식으로 겁을 주니까,
마르틴 루터가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 받지, 로마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로 죄를 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라고 반발하며 나온 것입니다.
이신칭의 신학은 올바르고, 정말 필요한 것이지만,
오늘날 그로 인한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해해서, 신자들이 ‘계명’을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루터도 부랴부랴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바로잡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초대교회에 정경제정자들이
‘믿음’이 중요하고, ‘계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더라면,
지금 66권 성경에서 구약은 대부분 다 빼 버리고, 신약성경만 정경으로 채택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채택한 것도, 그냥 역사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필두로 하는 구약의 계명들이 (할례, 절기법, 의식법, 시민법을 제외한 도덕법이)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가르침 속에 고스란히 나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계명이) 필요없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애당초 시내산에서부터 ‘다 필요 없다. 나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다 된다!’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새계명은 사랑이고, 요13:34, 요일2:8~11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요14:15, 21
계명을 (계속해서) 지키지 않는 것은, 언약의 파기이며,
그러면 하나님의 보호(구원)도 파기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견인의 능력이 크고 놀라워서, 그게 잘 파기되지는 않지만,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신약시대에 (구원의) 언약이 파기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때에 이르러, 그 언약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이 그 언약의 준수사항(계약조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렘11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관련글/ ‘구원’에 관한 성경의 입체적 이해
관악산은, 같은 산이지만,
남쪽 과천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북쪽 서울대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동쪽 사당동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서쪽 안양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4복음서는, 똑같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관점이 약간씩 다릅니다.
왕, 종, 인자, 로고스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약간씩 다른 각도로 설명함으로써
더욱 입체적으로 복음과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주사위 같은 6면체를 생각해 봅시다.
1) 사복음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합니다. (믿음도 말하지만)
2) 사도행전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은사가 나타나야 구원의 증거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3) 바울서신 중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은혜로 구원(칭의)얻는다고 말합니다.
4) 히브리서는.. 그래도 구원의 길에서 중도 탈락할 수 있으니, 끝까지 조심하라 말합니다.
5) 베드로서는.. 고난 가운데 끝까지 인내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6) 요한서신과 계시록은.. 형제를 사랑하고, 고난을 ‘이기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성도가 구원 받으려면, 선택/예정/부르심/중생/칭의(의화)/성화(성장)/견인/영화 등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칭의’를 설명하는 성경 몇 구절만 붙들고, 나머지 성경은 다 무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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