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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와 그 오해 2773

LNCK 2010. 12. 3. 12:14

 

◈이신칭의와 그 오해                 롬4:1~8                    09.07.28.설교스크랩

                                                                                    *원제목 :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도하면 꼭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신칭의'가 정말 좋은 교리이지만.. 과도해서 탈이 날 수도 있는데요..

먼저 '이신칭의'를 설명해 나가면서.. 결정적 오해 한 가지를 중간에 나누고자 합니다.

 

아래 ◑1, 2, 4항에서는 '이신칭의'를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3항에서는 '이신칭의'의 결정적 오해 한 가지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 왕의 옷을 입은 거지 이야기

오래 전 영국에 한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거지는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랜 노숙생활로 인해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그의 피부는 검게 그을렸으며,

옷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거지가 구걸하는 곳에 영국의 왕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거지의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그에게 어느 정도 물질을 준 후에

얼마 후에 열리는 왕궁의 파티에 그를 초대했습니다.


이 거지는 이 왕의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흥분된 마음으로

파티가 열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자신은 파티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왕궁으로 갔다가는 왕궁 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경비병들에게 쫓겨 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왕에게 편지를 섰습니다.

“폐하! 지난번의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파티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하기도 하고,

또 이런 모습으로는 왕궁의 정문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왕은 신하를 통하여 그에게 왕이 입던 의복을 벗어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파티 당일 날이 되었습니다. 거지는 여전히 초라한 모습 이였습니다.


그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못한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지가 왕궁으로 들어갈 때 아무도 그 거지를 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지는 왕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내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4:4~5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하는 자’는.. 의롭게 됨을.. 자기가 받아야 할 마땅한 보수/공로로 여깁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할 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5


▲위 예화에서 ‘거지’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 예화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저는 이 예화를 읽을 때마다

이 이야기가 복음을 통해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장면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탄합니다.


거지는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왕의 불쌍함을 얻어 왕궁으로 초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지는 자신이 왕궁으로 들어갈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렇게 절망하는 거지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거지는 그 왕의 옷을 입고 왕궁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을 것입니다. 네가 왜 하늘나라로 왔느냐?

그 때 여러분들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사실은 제가 신앙생활을 쫌 잘 했거든요.”

“사실은 제가 십일조를 쫌 많이 냈거든요.”


그러나 천국에 가면 우리가 자랑하는 이런 우리의 의와 자랑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얼마큼 더 열심히 했는지, 무엇을 더 많이 했는지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할까요?


“나는 아무런 공로 없지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여기에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평생 붙들고 신앙생활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 배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베풀어 주신

은혜만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안의 죄를 이용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변질시켜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대신 다른 것을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의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지만

우리 안에는 계속해서 죄악된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내가 착한 마음이 있었기에 복음을 들을 수가 있었지...”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했었지...”


그러면서 우리는 내 자신의 의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변질되게 됩니다.


우리가 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진리가 중요한지

오늘 말씀을 통해 듣고, 이 진리를 다시금 확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롬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믿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바울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를 행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하시고, 그를 구원해 주시며,

그의 자손들도 구원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모두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처럼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유대인들의 헛된 믿음 속에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모두들 연약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쉽게 믿고 불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이상적인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온갖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초능력과 막강한 능력으로 지구를 구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들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누구나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시골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 잘 생기고, 말씀도 아주 잘 전했습니다.

모두 성도들이 좋아하고,

특히 아줌마 집사님들은 너무나 열정적으로 그 목사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젊은 집사님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순결하고 흠이 없다고 생각하신 목사님께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은 이 집사님에게 너무 큰 충격 이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진짜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서 이 젊은 집사님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섬기는 목사님이나 내가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을

마치 완벽한 사람처럼 여기고 그 사람을 맹종하고,

그 사람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롬3:10)”

또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바울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의인으로 생각하던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아주 냉철하게 말합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롬4:1-3)”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육신과 행위에 대해서 나옵니다.

육신은 ‘사륵스’라는 단어로 죄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행위는 그런 인간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인간의 육체와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죄된 인간이였고,

행위로 불완전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영광과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사람의 영광이 설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이 시대에 그렇게 유명한 스타 목사님들이 많이 나옵니까?

왜 이 시대에 몇 몇 지도자들이 신격화됩니까?.

왜 이 시대에 수많은 이단들이 나와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고,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자신이 성령님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말씀 가운데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복음이 선포되는데 어떻게 사람이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선포되는데 어떻게 사람이 높여질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선포되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되어 그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이 복음의 영광이 선포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고, 하나님만이 높아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기 죄와 계속 싸워 나갑니다.    ←이신칭의의 오해 단락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의인이 된 것처럼,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키고 의인이 된 것처럼 자신이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윗의 글을 인용해 유대인들의 허상을 완전히 깨드립니다.


“불법을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4:7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가리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에피칼뤼프트’라는 단어인데, ‘위를 덮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앞에서 이야기 한 왕의 옷을 입은 거지처럼

더럽고 죄된 모습이 덮어지고, 가리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가 완전한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임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죄인인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또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상황을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율법을 지키기 전에 가졌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도 할례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롬4:11-12)”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죄인일 때,

그리고 여전히 죄가 있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요사이 많은 기독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완전한 의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또한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를 믿거나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면

죄가 없는 상태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가 완전해 질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통해 무념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저 의의 옷을 입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윤리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아주 냉철하게 자신의 죄됨을 인정하고 그 죄와 싸우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몇 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간을 교묘하게 조정했던 죄의 세력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안의 죄성을 보고, 복음으로 그것과 싸울 때

죄의 세력이 내 안에서 점점 물러나가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내 심령이,

매일 나의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지금도 이신칭의 교리를 이용해서 이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너는 죄와 싸울 필요가 없다, 너는 이미 의인이 되었다.

기억해 봐라! 너 그 때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

너 지금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지 않느냐?

너 교회도 잘 출석하고, 신앙생활 너 정도면 잘 하고 있지 않느냐.

 

또한 너는 행위로는 절대 의롭게 될 수 없다. 

너는 믿음으로 칭의받은 의인이다.

그러니까 죄와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해도 되지도 않고.."

 

마치 왕의 옷을 입고 궁궐에 들어가는 거지에게

“너의 겉모습을 봐라. 왕의 공로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데,

너의 속도 이렇게 깨끗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만 깨끗해 진 것이지, 아직 속은 깨끗하다고 인정 받았지만, 완전히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 거짓말에 속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싸움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모양의 신앙생활, 사람이 보는 모양의 신앙생활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칭의'라는 말이 '의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의인이 아닌데)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칭해 졌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justice(의)가 아니라, justification라는 없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한글로 '의화'義化입니다.

 

동남아인이 한국에서 30년 산다고.. 한국인화는 되지만, (피부색이나 문화가 완전히) 한국인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민권을 따면, 한국인으로 법적인 인정을 받을 수는 있겠죠.

'칭의'는 '법적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 본질은 여전히 (내면이 변화되었어도) 아직 아담의 죄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신칭의로 모든 것은 끝!'

이제 남은 것은 '성공, 자기계발, 현세적 축복!' 이렇게 방향을 잡고 나감으로써

전통적/고전적 복음과는 별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죄와 싸우면서' 천국생활을 하고,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해야 되는데,

평생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다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후회/불안/초조/고민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신칭의의 남용'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다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내 안의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 안의 죄를 바로 바라보고

그 죄와 싸우며, 내 안에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복음은 그 싸움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복음은 내 죄된 상태를 보게 하고,

그 죄와 끊임없이 싸우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예배를 잘 드려도, 아무리 행위가 의로워도

내 안에 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그 죄성과 일평생 싸우는

거룩한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신칭의’ 신학을 극단적으로 잘못 적용하면,

이런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것 안 해도, 내가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깨끗해진 사람은.. 더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깨끗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데나 앉지 않습니다. 조심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데나 앉고 눕습니다.) 


 

◑4. 믿음은.. 죄로 인한 절망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합니다.  4:8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를 믿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의 헬라어는 ‘피스티스’라는 단어입니다.

신뢰하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반드시 뒤에 목적격 대상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절망 상태에서도 여전히 예수를 신뢰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바로보고,

그 곳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22)”

 

 

아브라함은 철저한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세가 되었고,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이 되었고, 사라의 태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에게 자손이 태어날 확률은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단순히 후손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태어날 것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기대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현실은 절망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상황이 악화되어도, 그 신뢰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절망과 믿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밤마다 사탄이 그에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얼마나 큰 죄인인 줄 아느냐? 네가 그동안 했던 나쁜 일을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런 네가 어찌 뻔뻔하게 종교개혁을 한다고 앞 장 서느냐?”


그러나 루터는 이 사탄의 속삭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네가 이야기 하는 모든 죄를 지었고,

그 보다 더 큰 죄도 지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해 주셨다. 이제 아무도 나를 정죄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를 정죄하는 너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여러분! 믿음은 내가 죄 가운데 있는 절망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상태를 보는 것이고,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신의 방법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끝맺으면서

여러분! 이 시대에는 점점 복음의 진리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사라지면 드러나는 것은 사람의 영광뿐입니다.

사람이 높임을 받고, 사람 중심으로 사람이 보이고, 사람 중심으로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며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깨닫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런 복음의 진리를 붙드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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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구원’에 관한 성경의 입체적 이해

관악산은, 같은 산이지만,

남쪽 과천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북쪽 서울대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동쪽 사당동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서쪽 안양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4복음서는, 똑같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관점이 약간씩 다릅니다.

왕, 종, 인자, 로고스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약간씩 다른 각도로 설명함으로써

더욱 입체적으로 복음과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주사위 같은 6면체를 생각해 봅시다.

1) 사복음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주로 말합니다. 

2) 사도행전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은사가 나타나야 구원의 증거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3) 바울서신 중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은혜로 구원(칭의)얻는다고 말합니다.

4) 히브리서는.. 그래도 구원의 길에서 중도 탈락할 수 있으니, 끝까지 조심하라 말합니다.

5) 베드로서는.. 고난 가운데 끝까지 인내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6) 요한서신과 계시록은.. 형제를 사랑하고, 고난을 ‘이기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성도가 구원 받으려면, 선택/예정/부르심/중생/칭의(의화)/성화(성장)/견인/영화 등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칭의’를 설명하는 성경의 몇 구절만 붙들고, 나머지 성경은 다 무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편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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