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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 2780

LNCK 2010. 12. 7. 19:35

 

◈이신칭의 결과                  롬5:1~11                      09.09.22.설교스크랩, 출처 


 

이신칭의의 복음은, 우리의 신분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시작하면서 - 과거의 신분으로 사는 사람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이 지나도, 그 상황에 대한 꿈을 계속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 너무나 힘들게 공부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꿈을 꾸면

고등학교 때의 상황이 연출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데 답안지를 다 쓰지 못했는데

뒤에서부터 시험지를 걷는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얼른 시험지에 있는 답을 옮겨 쓰다가, 꿈에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한 동안은 군대에 제대한 후에도, 군대의 꿈을 계속 꾸었습니다.

제가 군대에 제대할 날짜가 되었는데 나라가 위급해져서

다시 이등병부터 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26개월의 군 생활을 하고 제대할 때가 되었는데

또 다시 한 번 더 근무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안 돼!’라고 소리를 치다가 꿈을 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결혼에 대한 꿈을, 제가 계속 꾸는 것입니다.

제가 꿈속에서 결혼할 상대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저와 결혼해 주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꿈속에서 아무리 그 이름을 부르려고 해도 불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겨우 깨서 보면,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저와 같은 경우의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힘든 상황에 있다가 보면 그 상황에서 모두 벗어났는데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그 때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 그렇게 음식을 숨겨 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언제든지 사 드릴테니

제발 음식을 숨겨 두지 마세요!’ 라고 말해도.. 항상 음식을 숨겨 두셨습니다.


예전에 못 살던 때 기억이 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염려가

그 마음속에 계속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는 과거의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고통과 아픔으로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근심과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까?

또 지금 어떤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근심과 염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여전히

이런 쓸데없는 근심과 염려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

이런 모든 근심과 염려들을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화평            롬5:1


앞서 롬4장에서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자격도, 복음의 은혜를 누릴 자격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신학용어로 ‘이신칭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오늘은 이신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롬5: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 우리가 처음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화평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단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란 단어입니다.


‘샬롬’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전쟁 속에서 살았고,

가나안 땅에 나라를 이룬 후에도 계속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은 바로 전쟁이 없는 상태,

‘샬롬’의 상태입니다.


이들은 이 샬롬이 정치적으로나 전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가 오는 그 시기에 모든 전쟁이 그치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그런 평화가 온다가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지금 현재도, 종말에 메시야예수님 아님가 와서,

이런 ‘샬롬’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이 ‘샬롬’을 이미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1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심령 가운데 이미 화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설교의 맥은 ‘이신칭의의 결과’를 살펴보고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과 사이에서 화평을 얻었으니, 이제 그것을 알고 누리자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평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평하면, 세상에서도 화평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왜 두려워하고 염려합니까?

많은 물질을 가지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더 마음이 피폐하지고 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화평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육신적으로 안락하고 쾌락을 누리지만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형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도 모르게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심령 깊숙한 곳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날마다 흘러 넘쳐 나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에

더욱 더 풍성하게 누려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평화가 없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근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 안에 화평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상황을

남북 전쟁 후의 한 노예 할아버지의 예를 통해 설명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노예해방문제로 남북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북군이 승리해 모든 노예가 해방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부 시골에서는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흑이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 흑인 노예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주인이 오면 벌벌 떨었습니다.

주인의 표정을 살피며 혹시나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래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할지에 대해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인생에 대한 슬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여러분! 이 흑인노예가 갖고 있는 두려움, 근심, 걱정은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흑인노예는 자신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주인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노예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고,

해방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근심합니까? 우리가 왜 눌려 삽니까? 우리 마음 에 왜 싸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를 주시면서

내게 주신 그 화평의 진정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미래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미래의 부분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있고, 그 평안을 누려야할

의무와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두 분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 두 분은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직접 만났던 분들입니다.


한 분은 한 권사님입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10년 전이였는데 그 때 당시 8백만원을 손해 보게 된 것입니다.


이 권사님이 마음이 상해서 그 자리에 드러 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중풍 끼가 와서 5년 가까이를 누워서 지내다가

하늘나라를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8백만원은 큰돈입니다.

그러나 그 돈과 마음의 평화를 바꾼 것입니다.


 

또 한 분은 한 집사님이십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은 사업을 했습니다.

거의 25년 전인데, 이 집사님이 당시 돈으로 1억원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1억원이면 그 당시 집사님의 형편으로는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집사님이 새벽예배만 갔다 오면 찬송을 하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편이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알아? 이 때 찬송이 나와?’


그러자 아내가 남편 앞에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보! 만약 우리가 앞으로 10억 적금을 탈 예정이면 지금 근심하겠어요/안 하겠어요?‘


남편은 ‘그걸 말이라고 해? 10억이 적금이 있으면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해!’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억짜리 적금보다 더 큰 것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 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내의 말처럼 비록 1년이라는 힘든 기간이 있었지만

그 빚을 모두 갚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권사님과 집사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똑같이 돈을 잃어버렸지만 한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누렸고, 한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준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사업에 실패해도, 돈을 손해 보아도, 자녀가 어려운 일을 겪어도

(이미 믿음을 통해 내가 얻은)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은혜           5:2

 

두 번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 누리는 신분은 은혜의 신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그 은혜들어감을 얻었으며....”


오늘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들어감’은 헬라어 ‘프로사고게’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①첫 번째는 성소에 들어가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또한 그 피를 통하여 죄인이 정결케 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은 유대인이어야 하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은 제사장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제 그 은혜의 장소에

값없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왕에게 나가는 이미지입니다.

당시 이 단어는 황제 앞에 나갈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분은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감히 왕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이지만,

믿음으로, 은혜로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왕에게 초대를 받은 한 거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한 거지가 왕의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자신의 초라한 상황을 비관해 자신을 갈 수 없다고 왕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왕은 왕의 옷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거지가 왕의 옷을 입고 왕궁에 들어가자 아무도 그 거지를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왕의 옷을 입은 거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존재들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무슨 의미입니까?

은혜, ‘카리스’라는 헬라어의 원래 의미는 호의와 친절입니다.

그것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받는 호의와 친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와 친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호의와 친절이란 무엇입니까?

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고 있는 손길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친절한 손길이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고

지금도 인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를 비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상황과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나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사역을 하면서 제 자신에 대해서 많이 비관을 했습니다.

건강도 약하고, 활동적이지도 못하고, 무엇보다도 찬양이 약하니 어떡하나?

그래서 그 당시에 ‘똑바로 보고 싶어요’ 라는 찬양을 많이 불렀습니다.


그 찬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마치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비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은혜로 된 것이고,

내가 사역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내가 사역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구원시켜 주시고,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는 나를 주의 종으로 만들어주시고,

은혜 끼칠 수 없는 나를 통해서 은혜를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관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관은 또 하나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은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은혜로 살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기쁨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5:2절 후반부에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2b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항상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신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야기 하는 구원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동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계속해서 내 삶에 이루어지고,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 구원의 과정에서 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즐거움입니다.


때로는 고난과 핍박과 환란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의 과정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확신 가운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부터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는데요...

 

▲1. 우리가 기뻐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3~4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란이란 단어는 ‘튤립시스’라는 단어입니다. 압박이란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세상에서 압박과 눌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완성시켜 갑니다.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인내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성품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다시 연단을 이룹니다. 이 연단이란 ‘도키메’라는 단어입니다.

철을 불로 제련하는 과정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연단이란 고난과 환란을 통해 죄된 성품이 제거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이야기 합니다. ‘성품의 연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환란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내 안에 죄된 성품이 조금씩 빠져 나갑니다.

마치 금에서 불순물을 빼내듯 내 안의 성급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성품들이 다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우리가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을 이룸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란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이룸이고,

또한 작게는, 우리 삶에서 매순간 나타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의 과정을 즐거움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때로는 환란과 고난이 있지만

결국에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성품을 성화시키고,

우리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기뻐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5: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평과 은혜, 그리고 기쁨의 신분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여기서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는 구절에서

‘붓는다’는 단어는 ‘에퀴노’인데

‘키노’가 붓는다 이고, ‘에크’는 밖으로 입니다.

즉 이 단어는, 부어 넘쳐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모양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부어지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기뻐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6~8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연약함이란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우리 안의 죄에 의해 계속해서 공격당하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가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내가 구원의 과정에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기뻐하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환란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고, 구원의 과정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맺으면서

그러기에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5:9~11


결국 우리의 구원은 확증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세상의 염려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지금 우리의 마음의 상황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화평과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신분이 되었건만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근심과 염려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 믿음론 (순종)   

................................ 참고 내용 .....................................

 

 

◑로마서 1~8장의 대강 주제


▲롬1~3장 : 칭의에 대해 설명                *칭의 : 믿음으로 구원 받음. 의화라고도 함, 영어로는 Justification by faith


▲롬4장 : 아브라함을 통한 칭의의 예

아브라함이 믿을(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더니 진짜 아이가 생겼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처럼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으면,

영생(칭의)을 잉태하고 낳을 수 있다는 논지. (이렇게 4장에서 칭의 얘기가 끝남)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4장까지가 ‘칭의’ 얘기라는 뜻)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5: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소망하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한다’는 기분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만한 소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되었다’는 뜻이다. 5:1~2절이.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받았다/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칭의에 들어간 성도는, 구원의 완성까지 별 탈 없으면, 거의 성공한다는 뜻!


우리가 야구/축구 경기를 시청할 때는

‘이길까 말까’ 대단히 초조해 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신감이 넘치는 소망이다. ‘거의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5:3절,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연단을/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다.

 

여기서 ‘소망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성화)의 완성을 뜻한다.

현재 상황을 보면, 핍박도 많고, 구원을 이룰까/못 이룰까 걱정도 되지만,

하지만 환란 중에도 우리가 자신감이 있는 것은

인내와 연단을 거쳐, 소망 즉 종국의 구원의 완성을 이룰 줄 알기 때문이다.

 

5:4절부터는 십자가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 다른 것 안 주시겠냐?’ 이다.

1~4장의 칭의가, 끝/구원의 완성까지 간다는 얘기다.


http://blog.daum.net/rfcdrfcd/15972046 에서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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