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은혜와 선행 2738

LNCK 2010. 11. 11. 15:04

 

◈은혜와 선행                   벧전2:21~25                       09.09.24.설교스크랩



신자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거기엔 선한 행실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선한 행실은.. ‘은혜로 구원받음’을 굳게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이 중요한 나머지) ‘선한 행실’의 본을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


이렇게 크리스천들이 선한 행실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먼저 이런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 2:21~25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아래 구절은, 우리 <선행의 본>을 끼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1

 

그런데 이 구절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참았던 본>이지,

<선한 행실>의 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2:13절부터 문맥상 계속 연결됩니다.

그 주제는 <선한 행실>입니다.

-국가에 대해 복종하고,

-종이 상전에 대해 복종하고,

-아내와 남편들도 서로 복종하고,

그런 문맥 가운데,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본이란,

좁게 말하면, '고난을 참고, 보복하지 않는 본'이지만,

넓게 말하면, '시민, 종, 아내, 남편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그 은혜로 믿는 우리가 구원 얻습니다.

모두가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느냐... 하면,

우리로 선행을 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좁게 말하면, 고난 중에도 묵묵히 당하며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선행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을 무시하면 절대 안 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선행’을 무시하는 것은 절뚝발이 신앙인 것입니다.

구원의 큰 그림에서 일부만 보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사람은,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정리 합니다.

지금 우리는 3회째 ‘베드로전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회에서는, 베드로전서의 전체 주제가 <은혜에 굳게 서라>이었으며, 벧전5:12

1장을 통해서, 은혜가 어떤 것들이며,

또한 은혜를 굳게 하는 고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2회에서는,

은혜를 굳게 하는 선한 행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1:17절,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3회에서는, 2회의 연장선상에서

‘은혜와 선한 행실의 관계’를 살피고 있습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으로/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선한 행실이 뒤따른다’는 내용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은 동전의 뒷면처럼 맞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히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의 여러 예들이 나오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드렸는데,

독자 이삭을 드린 것은 분명히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합니다.

히브리 개념으로 믿음행위를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각자 찾아보세요.)


이걸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써서, 지금 말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신자가 믿음으로(=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거기엔 선한 행실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선한 행실은.. 은혜로 구원받음을 굳게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베드로전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선행(선한 행실)의 실제 사례

 

▶1.국가제도에 순복하라   벧전2:13~17


▶2. 종들은 상전에게 순복하라  2:18~20


직전 구절이 여러 방백들에게 하는 말이었다고 볼 수도 있고요,

이번에는 종들로 넘어 갑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용자들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9


그래서 좀 불의한 주인이 다스리는 집안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가운데서 선행을 중단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아도 선행을 계속 행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아내들에게 주는 선한행실의 교훈 3:1~6


▶4. 남편들에게 주는 선한행실의 교훈 3:7~6


▶5. 사회생활 가운데 주는 선한행실의 교훈 3:8~22


특별히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3:17


진리를 따라 살고 선을 행하다 보면,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다 보면.. 고난도 겸해서 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을 당합니다.

 

3:18~22절은 난해구절로 분류됩니다.

이게 무슨 의미 인지 여러 해석이 있고 주장이 있습니다.

불분명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그리고 의를 전파하고 이 은혜를 전파했다.

이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러라는 것입니다.




▶관련 예화

세계 2차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지 않은 채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집단수용소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한 일본인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장미 농장을 하여 상당히 성공했었는데,

그만 수용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때 이웃 크리스천들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 있는 동안 내가 농장을 잘 돌봐 주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도

속으로는 ‘정말 도와줄까?’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기독교인 이웃들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나 그동안 몇 번이고 전도했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던 이 일본 인은

‘우리를 믿지 못하겠거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게 되었고,

이 일본인이 2년 만에 그리운 집과 농장으로 돌아오던 날,

샌프란시스코 역에 이웃 사람들이 “Welcome back home!”이라고 쓴

큰 플래카드를 들고 역으로 환영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 보니 농장은 자신이 가꿀 때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었고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갔더니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과자통 카드가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나온 수익금을 저금해 놓은 통장이었고

카드에는 딱 두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You could start again(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다 행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은 혜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신칭의와 그 오해 2773  (0) 2010.12.03
주기도문은 공동체적 기도 2748  (0) 2010.11.17
은혜 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산다 2737  (0) 2010.11.10
은혜에 굳게 서라 2736  (0) 2010.11.10
숨겨진 하나님 2733  (0) 201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