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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델링 2787

LNCK 2010. 12. 11. 23:34

 

◈거룩한 모델링                     엡5:1-4             10.11.14.설교스크랩, 정리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어느 소년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누구를 닮고 싶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존경할만한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까?

교회 안에서 존경하는 사람,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교회가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롤 모델role model을 제시합니다.

    그 롤 모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세상교육은, 일례로 홍익인간이 되라고 합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육은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지워버렸고,

그래서 인생은 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나기에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게 죄입니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죄로 어지러워진 인간의 심성을

복음으로 회복시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자꾸 신앙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따집니다.

성경을 읽고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예배에 얼마나 빠지지 않고 잘 나왔는가?

이런 것을 중점적으로 따지는 데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찬양인도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와도,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은사가 많이 나타나도..


만약에 그 영혼이 점점 변화되어지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관련글(강추) 예수님은 나의 믿음을 보신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롤 모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우리가 모델링해야 할

삶의 본질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2절, 자신을 희생하신 모델을 본받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오늘 나는,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뭔가 나를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희생하고, 버리는 것이 없다면.. 예수를 본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하려 하지는 않고,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에서 복 받아, 가급적 인생을 남들보다 쉽게 잘살아 보겠다는데 있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믿고 기댈 데가 자기밖에 없기에, 죽자 사자 일합니다. .. (이것은 잘못이죠)


그런데 교회 다시는 교인들 중에, 세상에서 노력은 대충 적당히 하고,

하나님 믿어서, 축복 받아서, 세상에서 남들보다 잘 살아 보려고 합니다.

남들만큼 노력을 하면서, 남들보다 잘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은,

주님을 본받아 희생하려는 생각은 아예 개념 조차 없고,

신앙 생활의 목적이, 주님 덕분에 세상을 남들보다 좀 더 쉽고/잘 살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지만,

    아예 신자의 기본적 개념이, 그런 신앙적 목표나 방향이 없고,

    대신에 ‘주님 덕분에, 내 팔자 편하게 살아보자!’

    이런 분위기가 교계 주류를 형성한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성도들은 과연 우리의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가 이웃을 구원의 길(전도)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자기희생의 삶입니다.


오늘날 전도가 잘 안 되는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성도들의 이기심이 전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습니까?


과연 오늘날 나의 삶의 모습이, 비 크리스천들과 비교하여

좀 더 이타적이고, 좀 더 희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타이타닉 침몰 사건은, 이타적/이기적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타이타닉에는 그 배에 승선한 모두(2,208명)를 구조할만한

구조선이나 구명조끼가 준비되어 있지 못했고

그중에 상당수인 1,513명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내가 만약 거기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이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선박회사 사장 브루스 이스메이 Bruce Ismay가 있었는데

그는 하인, 비서, 수많은 선객을 버려두고, 자기가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고

이 일로 그는 목숨은 구했지만,

나머지 일생을 세상과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구차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많은 영웅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선장 존 스미스는 끝까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승객들을 구조하다가 죽었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 주인 스트라우스 부부

남편이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부인도 승선을 거부하고

자기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준 다음 구명보트에 태운다음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기도하며 최후를 맞이합니다.


월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이 지휘를 맡은 연주악단 8명

배의 침몰 10분전 까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여

승객들에게 마지막 소망을 선물했습니다.


이런 극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나는 평소에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삶을 날마다 연습하고 계신지요?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에서조차, 당신 옆에 매달린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며

위로하시던 주님을.. 나의 롤 모델로 본받아, 내가 지금 살고 있습니까?



◑3절, 도덕적 유혹을 극복하신 예수님을 본받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우리처럼 인성을 100% 가지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처럼 도덕적 시험을 직면하며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적, 물질적, 권력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험들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너희도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모델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도덕적인 시험의 밑바탕에 도사린 것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의 성을 탐하는 것이 바로 음행이 아닙니까?

자신 힘을 남용하여 이웃들을 무너뜨리는 모든 과도한 시도가 더러움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족한 줄 모르고 탐함이 바로 탐욕이 아닙니까?


본문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3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어서, 뭘 더 받으려는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어서, 그 분으로 만족/자족하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단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성, 돈, 권력이 주는 모든 환상)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예수님의 응답을 기억하십니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4:10

예수님께는, 참 만족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보다 더 재미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내 영혼이 허기져 있는 상태라면,

바로 그때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더라도,

지상에 살 동안에는, 세상에 대한 굶주림의 유혹이 끊임없이 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Solo dios basta-"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경건의 훈련, 예수님을 본받은 훈련을 계속 해 나갑시다.


*관련글 : 자유의 의미



◑4절, 예수님의 감사 생활 본받기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만드는 중요한 한 열쇠가 우리의 언어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을 했습니다.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정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만나고 모셨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언어생활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언어생활의 핵심이 바로 감사이셨다고 믿습니다.

마태11:25의 예수님의 기도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의 그분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1:41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앞둔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26:27

주님은 심지어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감사함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 기도하든지 말하든지 흘러나오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자와 비신자의 삶의 가장 현저한 차이가

바로 이런 감사의 언어라고 믿습니다.

감사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경험한 기독교 문화의 아름다움을

두 단어, <감사와 용서>라고 증언했습니다.

신을 상실한 공산주의 문화에는, 감사와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감사하고 사과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감사의 언어를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추한 말(폭력의 언어), 어리적은 말, 희롱의 말이 우리를 지배할 뿐입니다. :4


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고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면, 이제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새 언어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언어를 학습해야 합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했더니 나사로가 다시 살았습니다.

감사가 친구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감사했더니 사형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지난 2006년, 우리 교회 주일 강단에서 제 설교 중에

한 자매가 나와서 간증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찬양의 특별한 은사가 있어, 찬양하는 일로 섬기던 김명옥 자매의 간증 말입니다.


찬양으로 섬기던 그녀가 설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으로 섬기던 자매가 설암 때문에, 혀를 끊어야 목숨을 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말씀과 기도 중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로 주께 감사드리고

주를 더욱 찬양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아직도 내가 말할 수 있고 아직도 내가 찬양할 수 있고

아직도 내가 섬길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주일학교로 돌아가 봉사를 하고, 입원해 있던 연세대 세브란스 신우회 예배에서

찬양으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암이 악화가 안 될 뿐 아니라, 암의 징후들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온전히 찬양 사역자로 헌신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감사가 낳은 기적입니다.


이 가을, (추수)감사의 절기에, 우리들의 언어가 감사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했던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승리가 될 것입니다.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가 자랑과 은총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질병과 절망의 십자가가 치유와 희망, 부활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는 그분을 모델링하는 거룩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관련글 : 감사의 기초                                                      ▣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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