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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연약함을 극복하고 지경을 넓힌 야베스 2783

LNCK 2010. 12. 9. 11:31

 

◈자기 연약함을 극복하고 지경을 넓힌 야베스         대상4:9~10      06.06.26.설교 스크랩, 출처       

                                                                                                   *원제목 : 내 안에 있는 십자가의 흔적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9~10



◑야베스의 기도의 의미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 본문은, 브루스 윌킨스라는 사람이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통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환상 중에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와서 천국에 있는 자신의 살 집을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창고에 가서 그 창고의 문만은 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창고는 열지 않습니까? 이 창고도 열어서 보여 주세요.’


그러자 베드로가 난감해 하면서 ‘이 창고는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이 사람이 창고를 보여 주기를 요구하자

베드로가 마지못해 창고를 열었습니다. 그 창고에는 온갖 보화가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받을 복이었는데,

네가 기도로 구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창고에만 쌓아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 하고 브루스 윌킨스라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쌓아두고 있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기에 복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야베스처럼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런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내용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공감 되어서

출판계에 기록을 세우며, 오래 동안 판매 1위의 부동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아래서 설명하겠지만,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야베스의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좀 더 기도했더라면, 과거에 땅에서 40평짜리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지 못해서 30평짜리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하고 통곡하시겠습니까?


또 내가 더 기도 했었더라면, 사장이나 이사가 될 수 있었는데,

기도로 구하지 않은 결과, 축복을 다 못 쓰고, 천국 창고에 고스란히 쟁겨두어서,

과장이나 일반 평사원으로 일평생을 산 것이..

천국에서 안타까워 엉엉 통곡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저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내가 더 기도했었더라면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고,

수많은 성도를 거느리는 유명한 목사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못해서

작은 교회나 이름 없는 선교지에서 묵묵히 목회한 것이..

천국에서 땅을 치고 후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천국이 그런 곳이라고 생각됩니까?

이런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는 천국일 뿐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진정한 천국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천국 가서 후회할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땅에서 주님 앞에 더 헌신하지 못한 것 한 가지 뿐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이 나에게 씌워주시는 면류관을 쓰게 되면서

여러분이 깨닫는 것은 이것 한 가지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천국에서 예수님에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고난과 수고를 위로 받을 줄 알았다면

내가 좀 더 충성했을 터인데, 좀 더 주님께 헌신 했을 텐데,

좀 더 나눠주고, 좀 더 봉사했을 터인데....’


우리가 영원한 축복을 받는 순간 깨닫는 것은

일시적인 세상에서 예수님께 더 헌신하지 못했다는 것 뿐 일 것입니다.



◑야베스 이름의 의미와, 야베스의 연약함


야베스는 근본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본문 역대상4:9절은, 야베스란 이름의 유래를

‘그 어미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야베스’의 원래 의미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아이의 이름에, 왜 슬픔과 고통이란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우리식으로 부르자면 ‘김슬픔’이나 ‘박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어미가 그를 슬픔과 고통 가운데 낳았기 때문입니다. 주1)


아마 야베스가 불우한 가정이나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인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야베스의 근본적인 연약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의 의미로 보았을 때

그는 가정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연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이.. 그가 자라면서 그의 발목을 잡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어린 시절의 가정에서의 양육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이 아마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런 부분에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

커서도 항상 사랑을 갈급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 육체적 연약함으로 인해

항상 열등감과 두려움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드리려고 몸부림 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야베스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환난과 근심 가운데 살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1. 야베스 기도의 의미1. - 성화된 성품에서 나오는 자기 사명의 확장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9~10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사람 안에 있는 심적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자동차가 연료가 있어야 움직이듯,

사람의 생각도 심적인 부분에서 에너지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심적인 에너지가 한정적이기에, 무한적으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한 곳에 정신을 모두 집중하면, 다른 곳에 쓸 여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연약한 사람은, 모든 에너지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혹시 나를 무시하지나 않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상처에 집착하고 상처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자기 모든 에너지를 다 쏟기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도, 봉사할 여유도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육체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에너지를 자신에게 쏟기에

하나님을 섬길 에너지도, 교회에 봉사할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연약해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내 연약함을 변화시켜 주시고,

나도 남들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야베스가 기도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고, 연약한 육체와 마음을 가지고 자란 자신이,

그래서 일평생 환난과 근심 가운데서 살아서

자기 한 몸 신앙생활하기도 어려웠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받고, 고침 받아 지경을 넓혀

많은 사람을 포용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를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경’이란 삶의 터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가족과 친족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지파에서 부유한 사람이 나오면

그가 자신의 가족과 친족, 심지어는 이방인과 나그네까지

자신의 지경에서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지경이 넓어진다’는 것은   대상4:10

요즘처럼 내가 50평이나 60평 아파트에 살면서,

나 혼자 넓게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지경이 넓어져서, 거기에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야베스는, 자기 지경을 넓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자기 부동산을 넓혀 달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우겠다는, more responsibility (마25:21,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라)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자기 연약함을 극복해야 하고,

거기에다 일평생 성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없다면.. 이런 소원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혼자 부자되는 거나 원하겠지요)



◑2. 야베스 기도의 의미2. - 인간 안의 자기 연약함을 극복하려는 기도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10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더 헌신하고 충성해야 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더 헌신하고 충성하고 싶으나

내 육신이 연약하고, 내 마음이 연약하며,

내 영혼이 연약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야베스의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야베스의 기도란 내가 더 하나님께 더 드리고, 더 헌신하고 싶은데

내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연약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연약함은 단순히 개인적인 연약함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연약함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을 온전하게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건강한 육신과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후 그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병드는 육체와, 깨어진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멀어진 영혼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한은 이런 인간의 (선천적인) 본질적인 죄성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이런 본질적인 연약함과 함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만의 상황에서 생긴 (후천적인) 연약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연약함은 죄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하지만, 죄가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 죄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과 마음, 그리고 영혼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려다가도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연약함 때문에 주저앉은 적이 있습니까?

 

바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간절한 기도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의미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고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성화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성화의 삶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순간에 완전한 의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칭의란 무엇입니까? 내가 여전히 죄가 있고,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나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 죄가 없는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늘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 안에 죄가 있고, 그 죄와 싸워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내 힘과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서 싸우는 것입니다.

(물론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래서 순간적으로 완전히 성화된 게 아니라,

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이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를 갔다 오셨을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봄이 되면 춘계진지 대공사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겨울 동안 무너졌던 진지를 보수하는 것입니다.


산 능성에 일정한 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진지를 팝니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그 진지속에서 방어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중대나 소대 단위로 할당량을 주고 그곳을 파게 됩니다.


그런데 운이 나쁜 소대는 땅이 척박한 곳을 받게 됩니다.

땅을 파다가 소나무 뿌리를 만나기도 하고, 자갈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위를 만날 때입니다.

바위를 만나면, 삽이나 곡괭이가 탁탁 튑니다.


삽과 곡괭이로 그 바위를 깨뜨리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바위가 있는 곳을 비켜서 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파다가 말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군대에서는 그런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장이 명령을 하면 무조건 그곳을 파야 합니다.


이 경우 군인들은 되든/ 안 되든 바위를 깨기 시작합니다.

못 깨면 바위에 삽자국이나 곡괭이 자국이라도 남깁니다.

그래서 사단장이 와서 시찰할 때,

사단장에게 바위를 깨려고 시도한 흔적이라도 보여 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안의 단단한 바위를 만나게 됩니다.

이 바위는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일평생 그 바위를 말씀과 기도로 깨뜨리려고 해도

온전히 깨뜨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깨닫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성화의 삶이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큼 변화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 삶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내 죄된 본성과 싸웠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안에 흔적이 남습니다.

내 본성에 거슬려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흔적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 흘러가는데 묻혀서 대충 살거나,

내 본성대로 살면 편하게 살 것을.

말씀대로, 복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내 안에 아픔과 고통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증표인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그 흔적’이 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며 몸부림치며, 발버둥친 흔적 말입니다.

 

 

 

▶끝맺으면서

여러분은 하늘나라 가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네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 증표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입니까?


그 때는 내 안에 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 줘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군인들은 바위에 난 흠집을 사단장에게 보여 주듯이

내 안에 난 십자가의 흔적을 예수님께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여기 내 손에 난 못자국과 내 가슴에 난 창자국을 보십시오.

내가 연약해서 예수님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이렇게 상처가 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수고했다라’고 말하시며

내게 면류관을 씌워주고 위로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내 안의 어떤 근본적인 연약함을 발견했습니까?

그 연약함이 주님 앞에 나오려는 내 발목을 어떻게 잡고 있습니까?

그래서 주저하거나 낙담하여 쓰러져 있습니까?


그러나 그대로 쓰러져 있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연약함이 어떤 것일지라도 성령께 의지하여

그 연약함을 깨뜨리기 바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기 바랍니다.

분명히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이 여러분들의 삶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1)

이 부분은 우리가 베냐민이란 이름에서도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베냐민의 원래 이름은 ‘베노니’였습니다. 번역하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은, 성경에 기록된 여인들 가운데 한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야곱을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욕심으로 야곱의 둘째 부인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오래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시녀까지 남편의 아내로 만들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베냐민)을 낳을 때는, 산고의 고통이 너무 커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신이 낳은 아들을 보고 ‘베노미’라고 불릅니다.

그녀가 아들을 ‘베노니’라고 부를 때는,

그 이름에 자신의 삶의 아픔과 한탄을 모두 투영시킨 것일 것입니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