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은 공감하는 능력 눅10:25~37 11.01.02. 인터넷설교 스크랩, 편집
▶영어에 ‘컴패션 compassion’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보통 ‘동정심’으로 번역합니다.
저는 이 말을 ‘공감’으로 번역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compassion은 com과 passion의 합성어인데
‘~와 함께 아파하고, ~와 함께 감정을 공유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공감(공통된 감정)’입니다.
본문 눅10:33절의 말씀, “(사마리아 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여기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compassion’은 (KJV)
그 강도만난 사람과 똑같은 심정, 공감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올해 여러분들과 제가 꼭 공유하고 싶은 영성 하나는 바로 이 ‘공감’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 compassion, pity (헬, 스프라그니조마이)는,
뱃속, 창자속에서 끓어오르는 동정심/공감을 뜻합니다.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9:36
또한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멀리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서 그를 맞이했는데, 눅15:20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막1:41절에,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공감 능력
▶오늘 본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잘 돌봐 준 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얘기가 한 율법교사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본문의 주제가 단순히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구제에 관한 가르침’ 정도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영적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마5:7절에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긍휼히 여김을 못받는다는 뜻도 됩니다.
여기서 긍휼은.. 넓게 보면, '죄씻음, 구원'의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1. 공감은.. 그를 나귀에서 뛰어 내리게 합니다.
먼저 누군가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고
내면에서 공감의 영성이 발휘되기 시작하면 사람은 나귀에서 뛰어내립니다.
안전한 울타리, 누리고 싶은 기득권, 쾌적한 안전지대에서
자기도 모르게 뛰어 내립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의 안락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나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 깊이 공감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서 뛰어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나귀에서 뛰어내리게 합니다.
▶2. 공감은.. 자신의 나귀에 낯선 사람을 태웁니다.
진실한 공감을 발휘하는 사람은 나귀에서 뛰어내린 다음,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 상처 입은 이웃을 태웁니다.
그런데 나귀는 언제나 작아서 누군가를 태우면 자신은 탈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태운 채 자신은 걸어가야 합니다.
나귀에서 내리는 것도 어려운데,
내 나귀에 낯선 사람을 태우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고 너무 바보 같아서
쉽게 할 수 있는 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감의 영성 밖에서 바라 본 시선입니다.
공감의 영성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은 나귀에서 내릴 뿐 아니라,
낯선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우는 데까지 나갑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3. 공감은..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공감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을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대충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책임집니다.
당시 하루 여관비는 대략 1/12 데나리온 정도였는데 두 데나리온이나 지불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요?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일을 하겠어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미치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누군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공감의 영성이 발휘되면,
성인군자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인도 사람들의 가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나귀에서 내렸고, 자기 삶이라고 하는 나귀에 그들을 태웠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장 바니에는 프랑스의 아동 병원에서 처참하게 버려진 아이들의 외로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캐나다의 수상 아들이라는, 철학 교수라는 나귀에서 즉시 내렸고,
전 재산을 팔아서 라르쉬 공동체를 세우고
그 작은 나귀에 그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감 compassion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죄와 절망의 사슬에서 헤매는 모든 인류의 불행한 삶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라는 나귀에서 뛰어 내리셨습니다.
그 짧디 짧은 삶의 나귀, 불꽃같은 사랑의 나귀에 사람들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깊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을 진실로 공감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공감일 때, 공감의 영성은 나를 바꾸고, 너를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공감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꾸는 혁명의 첫걸음입니다.
▶죄인과 공감하신 예수 그리스도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용서하고, 같이 아파(공감)해야 합니다.
이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에게 날아오는 돌맹이를
자기가 같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상상하기를, 요8장에서 예수님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두고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녀를 감싸 안으셨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신 돌에 맞으려는 자세)
다행히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고, 모두 슬금슬금 뒤로 물러갔지만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이 능력을 잃었다고..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가, ‘죄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복음, 복음’을 외치다가도,
누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판명되면,
슬그머니 도망쳐 버리든지, 아니면 같이 돌을 던지는 대열에 합류합니다.
입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는 쉬운데,
몸으로 그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돌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과 공감하는, 그래서 그와 함께 돌을 맞는 크리스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미래의 지도자로 기름부으실 것입니다.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만, 참 영적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아니면.. 그냥 복음을 자기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8장 말고도, 죄인과 공감하신 그리스도의 예는 복음서에 종종 나옵니다.
세리장 삭게오의 집에 찾아가신 것,
‘여인’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도록 허락하신 것 등
예수님은 언제나 불쌍한 죄인들과 공감하는 삶을.. 몸소 살아내셨습니다.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지 않고, 몸소 몸으로 전하신 것입니다.
▶공감이란 하나님의 눈이고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공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공감이란 우리 영혼에서 지워져 가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공감은 착한 사람들, 섬세한 사람들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의 능력입니다.
이 공감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공감의 영성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동정과 연민의 감정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감이라는 영성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은밀한 함정 같아서 처리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바로 ‘동정과 연민’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공감과 겉모습이 아주 비슷해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분명히 다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우리와 심각한 경쟁자가 아니거나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사람들(비천한 자들)과 만날 때 나옵니다.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공감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불쌍한 마음 저변엔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누구나 연약하다는 자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결코 그 대상을 열등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훼더릭 펄스라는 심리학자는,
동정이나 연민은 자신을 드러내는 생색내기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사람들은 자신과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심리적으로 강조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자선사업의 심리적 동기가 여기에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어찌보면 지나친 주장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동정이나 연민은 감정에 머무를 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나귀에서 내리는 일, 내 나귀에 낯선 사람을 태우는 일,
끝까지 함께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이 ‘공감’이 아니고 동정 또는 연민이라는 증거입니다.
사실 이건 너무나 안전해서,
우리 속에서 진실한 공감의 에너지가 솟구쳐 오를 때도 우리는
즉시 동정이나 연민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나귀에서 내리지 않고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픈 다큐나 또는 감동적인 TV 프로를 보면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로 그 주인공을 위해 나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공감의 영성이 일어나야 할 때도.. 동정과 연민에 머무는 습관에
우리가 깊이 젖어 있다는 겁니다.
공감이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동정 또는 연민이 딴지를 거는 겁니다.
참 얄미운 훼방꾼입니다.
우리는 동정이나 연민에 머무를 게 아니라
거기로부터 공감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감의 영성이 올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더 읽으실 분 ......................................
◑사례 소개
▶최근에 어느 목사님께 들은 얘깁니다.
그 목사님의 어머님이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으시고 입원하게 돼서
외국에서 급거 귀국을 하셨답니다.
몇 주간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소식을 듣고 지인(목사님)들이 문병을 많이 왔답니다.
여러 분들이 오셔서 정말 전문가답게 간절히 기도를 해 주셨는데,
그 중에 한 젊은 A목사님이 잊혀지지 않더랍니다.
이상하게도 그 A목사님이 말씀을 읽어 주시고 기도를 할 때는
가족들이 모두 감동을 느꼈고,
이미 모든 기능을 상실하셔서 멀뚱하게 누워 계시던 어머니마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랍니다.
사실 그 A목사님은 그 목사님과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또 그날 무슨 특별한 말씀이나 특별한 기도를 하신 것도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그날 거기에 있던 목사님의 가족은, 모두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일 이후로 내내 그 젊은 A목사님 생각이 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그날 그런 깊은 감동을 일으켰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셨답니다.
그러다가 일정 때문에 다시 목회지로 들어가게 되셨는데,
출국하면서 그 A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답니다.
그때 그 A목사님 말씀이, ‘그날 어머니를 뵙자마자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가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자기는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을 읽어드렸고,
자기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고,
그래서 시종일관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고백하시더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그 감동의 비밀이 풀리더라는 거예요.
그것은 진실하게 공감하는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저/설교자는 신학교 다닐 때 차인표씨 어머니께 1년 동안 영어수업을 들었습니다.
단 1년이었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학생들이 어머니나 친언니처럼 생각할 만큼 깊은 대화도 많이 했었는데,
차인표씨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고 모두와 연락을 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들이 그 분을 좋아했던 까닭은
그 분의 한 가지 탁월한 성품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자기 일처럼 공감해 주는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울기도 잘 하셨고 직접 학생들 일에 뛰어들기도 잘 하셨습니다.
그런 고결한 분의 영향을, 아들 되시는 분(차인표)이 받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는 크고 아름다운 신전들을 많이 건축했다. 그러나 병원은 한 곳도 짓지 않았다.★
로마도 신전과 놀라운 크기의 대형 경기장들을 건축했지만 병원은 한 곳도 안 지었다.★
그것은 지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증거다.
물론 그들도 의학 발전, 해부학 등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일반 서민들에게 의료 혜택이 돌아가진 않았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교회가 고아원을 세우기 이전에, 세상에는 고아원이 생기지 않았다.
서민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병원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병원을 세우기 이전에, 세상에 서민을 위한 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고아원과 (서민)병원은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데, 만약 기독교가 없었더라면...
병자와 약자가, 사회를 위해, 빨리 사라져 죽기를 바라는 철학이 온 세상을 지배했더라면...
.......................................
▶동정심은 긍휼(엘레오, 마5:7)과 비슷한 말입니다.
롬9:15절에, 긍휼과 동정심이 병행으로 쓰였습니다.
긍휼과 동정심은 서로 비슷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롬9:15
For he saith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1653 whom I will have mercy 1653 ,
and I will have compassion 3627 on whom I will have compassion 3627 .
※이 구절에서 쓰인 헬라어는 '오이크티로'인데, (위 3627을 클릭 해 보세요)
성경에 여기 딱 한 번 나온다고 합니다. (스프라그니조마이 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동정심(스프라그니조마이)과 비슷한 말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영어로 같은 compassion으로 번역하고 있으니까요.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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