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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참 복을 - 긍휼 2825

LNCK 2011. 1. 12. 12:54

◈새해에는 참 복을 - 긍휼                    마5:7                 11.01.07.설교녹취 


긍휼(엘레오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1. 긍휼(엘레오스)이 쓰인 성경의 용례 보기


▲1. '불쌍히 여긴다'는 뜻


성경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엘레오) 여기소서’ 라는 구절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마9:27, 15:22, 17:15, 20:30 등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6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9:18, (9:23, 긍휼의 그릇, 롬11:30.31,32등)


▲2. 긍휼이란.. ‘죄인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  (▲1.과 비슷하게 같은 뜻)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엘레오스)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3


나는 자비(엘레오스)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1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엘레오스)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23:23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12:8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9:15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10

 

 

◑2. 천국 영생 관점의 '긍휼'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긍휼히 여기는 눈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서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는.. 어떤 면에서 쉽다.

(그러나 이것도 조심해야 하는데... 아래 ◑3.을 보시라)

 

그러나 세상에서 나보다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문에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계층을 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꼭 나보다 못 살고, 가난한 사람만 불쌍히 여기지 말고!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여러분이, 결박된 것 말고는, 나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왕들의 처지가, 지금 자기 처지보다 못하다는.. 그런 ‘긍휼’의 눈을, 바울은 갖고 있었다.

참 복음을 이해하기는 쉽다 하더라도, 이렇게 실제로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네 구멍가게 하는 크리스천이, 어찌 굴지의 대기업 총수를 긍휼히 여길 수 있으랴. 

그런데 그런 긍휼함이 없이는, 우리가 주님께 긍휼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구원’과 연결되는 뉘앙스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들 예수를 적당히 믿어서 그렇지,

제대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게 쉬우면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어떤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구멍가게(천막) 주인이, 대기업 총수(아그립바)를 보면서, 긍휼히 여겼던 것이다. 


본문 말씀은, 달동네 독거 노인, 노숙자만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다 불쌍히, 긍휼히 여기라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의 삶의 증거이다.

나는 이런 증거가 있는가?


▲그들을 존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땅히 존경하지만,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한계가 있다.

‘건강, 불안, 천적, 책임감의 무게, 정신적 문제, 가족 관계, 열등감, 구원과 영생의 문제’

이런 것들은, 세상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는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예외가 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탑top이 되려고, 일평생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그들을 마땅히 존경하면서도, 그들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이렇게 쳐다볼 수 있어야 한다.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자기 목숨을 맬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등산을 가서, 산 아래 도시를 내려다 봐도,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높은 빌딩도, 산 위에서 보면, 천국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부러워할 만큼은 아니다. 주1)


▲세상에 대해 부러움인가, 긍휼인가?

세상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는데,

긍휼히 여기기는커녕,

성도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한없이 부러워하고 있으면...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께 긍휼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오복적 시각’을 갖고 있는 성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자기가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어쩌면 실제로는 전혀 ‘천국 백성’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정말 천국영생을 가진 백성으로 변화되었다면..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다.


 

◑3. 구제와 자선의 영역을 넘어서, 영적인 긍휼을 베풀자. 

 

▲구제할 때 조심해야 한다.

달동네의 독거노인, 노숙자가 불쌍히 보이는 것과 똑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불신자들을 불쌍히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부러움이 아니라!


만약 이런 가치관이 없이, (노숙자나 억만장자를 똑같이 불쌍히 여기는 눈 없이)

항상 노숙자만 긍휼히 여겨서 도와준다면..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내가 너보다는 잘났다는 자기우월감에서 나오는 긍휼이 된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긍휼이다. 건강하지 못한 긍휼사역이 될 것이다.


거듭 말씀 드린다.

억만장자가 불쌍해 보이지 않고, 오직 노숙자만 불쌍히 보이는 것은,

나의 ‘도덕적 향락주의’이거나,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가짜 긍휼’이 되기 쉽다.

 

구제가 꼭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그런 함정도 있으니까 조심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구제를 안 해 버리지 마시고)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이런 신앙을 갖기 힘들다.

내가 완전히 ‘비행기가 창공으로 이륙하듯이’ 세상에 대해 죽고,

영적인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 빠지지 않는다는 뜻)

 

그래서 참 긍휼을 베풀려면,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8복은, 내가 십자가를 붙잡았을 때, 주어지는 복의 여덟 측면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복음의 사건을 십자가 사건으로 마무리 지으셨는데,

8복도 십자가 길을 가시는 과정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니까 8복과 십자가는..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복음의 완결 사건을 볼 때,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부터..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 8복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8복’과 ‘십자가’가 처음과 끝이란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코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저는, 이 팔복을, 십자가 복의 8면체라고 정의하고 싶다.

8복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모든 공생애는, 갈보리 십자가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8복도.. 십자가와 분리해서는.. 결코 이 복의 실체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내 육신이 십자가에 죽고, 예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진정 8복의 삶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라는 본문 말씀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눅12:8~9

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정말 예수를 믿고, 아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4. '긍휼'인가, 오복인가, 나는 뭘 더 원하는가? 

 

▲ (이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조금 감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오복五福

자기가 원하는 만큼 다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복이 없어서 쩔쩔 매는 것은,

그래서 헐벗고 고생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하지만,

하나님 눈에 더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뭔지 아시는가?


오복에 취해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 푹 빠져서 헤매는 자들이다.

전혀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신앙은 천국을 향한 일평생 순례의 길인데)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철저히 현세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는, 천국 입장에서 보고 계신다.

지금은 세상에서 금값이 상한가를 찍고 있지만, 천국에는 돌맹이에 불과하다.

천국 길에 깔린 것이 금이니까..   주2)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오복에 빈약하게 살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내가 백평 아파트를 갖고, 연봉 10억을 받으면.. 그때는 내가 만족하고 주님 잘 섬길 것 같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2백평 갖고 싶고, 연봉 20억 받는 일에 혈안이 되게 되어 있다. 만족도 없다. 

그때가 되면 천국 일에 더 열심 낼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땅의 일에 더 열심 낸다.

 

▲오복이 되는 사람은, 거기에 더 열심을 내게 된다.


운동만 보더라도 그렇다. 테니스, 수영, 마라톤..

해야 될 사람은 안 하고, 안 해도 될 사람은 더 열심히 한다.

운동해야 될 사람이 안 하는 이유는.. 운동해도 잘 안 되니까 재미도 없고, 포기하는데,

운동 안 해도 되는 전문가들이 더 하는 이유는.. 하면 되니까, 더 열심히 한다.


돈 버는 것도 마찬가지다.

돈 벌어야 될 사람(재산이 없는 사람)은.. 안 벌고,

안 벌어도 될 사람(이미 많이 벌은 사람)은.. 더 열심히 번다.


운동이나 돈 버는 일이나.. 사람에겐 만족(상한선)이 없기 때문이다.

핸드백도 신발도, 도대체 몇 개를 가져야 만족이 되는가? ...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 때문에, 오복이 ‘되는’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더 거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현세적이 되어서, 영원한 천국과 영생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지금 천국 성도들이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이 땅의 오복에 취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어른들이 볼 때, ‘아이들이 딱지, 소꿉놀이 가재도구에 목숨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오복에 관심을 좀 끊고, 천국 영생 소망을 바라보라고, 오복을 성도에게 잘 주신다.

오복이 잘 되는 사람은, 되니까.. 오복 쟁취에 더 열심을 내고,

오복이 안 되는 사람은, 해도 안 되니까.. 거기에 관심을 끊어버린다.


오복에 관심이 없어져야.. 비로소 천국 영생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오복에 관심이 있는 동안에는.. 심지어 하나님도 ‘오복 덩어리’로 보인다. 죄송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조금만 덜 불쌍히 여겨 주셨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품는다.

그런데 아주 신앙이 성숙된 경지에 올라간 사람 말고는,

대부분 성도는,

물질이 많으면.. 교만해지고, 나태해지고, 오히려 타락한다.

건강하면 할수록.. 육신적인 일에 바쁘게 돌아다닌다. 충성하기 보다는. 

성공하면 할수록.. 남을 무시하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주님을 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산다.


그렇지 않은 성도가 있다면,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아주 신앙이 성숙해진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

그 결과,

다리몽댕이 분질러 놔야.. 어디 못 돌아다니고.. 기도하게 된다.

물질이 부족해서 애가 타야.. 삶에 절제하게 되고.. 겸손해진다.

그러면서 천국영생을 점점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2:5


▲그래서 진정한 긍휼을 실천하려면, 천국 입장, 천국 시각이 필요하다. 

이 세상적 시각, 현세적 시각으로는 ‘진정한 긍휼’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천국 입장, 천국 시각에서 보면.. 무엇이 긍휼인가?


-그것은 예수를 모르고, 현세에 취해서 살다가, 지옥가는 것이 제일 불쌍한 것이요,

그런 현실 가운데서도, 자신을 모르고,

자기가 잘 난 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긍휼’이라고 하면, 무조건 ‘구제’를 생각하지만,

‘구제 차원의 긍휼’은 차제의 문제이다.


........................... 더 읽으실 분 ..............................


주1)

어떤 젊은 아빠가 마침 일찍 퇴근해서 자기가 사는 아파트 근처를 지나오는데,

거기 놀이터에서 자기 아들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뛰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아들 얼굴도 한 번 볼 겸, 놀이터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대화에 열중해서, 아빠가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대화가 약간 ‘심각해서’

아빠는 약간 비껴서서 그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한 아이가 다른 두 친구들에게 이렇게 자랑하며 말했다.

“야, 우리 아빠는 시장님하고 굉장히 친해!”


그러니까 다른 아이가

“야, 우리 아빠는 경찰서장님하고 아주 친해!”


이제 자기 아들이 말할 순서였다.

이 아빠는 순간 걱정이 엄습해 왔다고 한다.

‘우리 아들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을 텐데, 이걸 어쩌나?’


자기는 지역사회의 높은 분들과 전혀 친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회사 사장님하고도 그리 가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간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자기 아들 입에서 이런 자랑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야, 우리 아빠는 하나님하고 아주 친해!”


이 젊은 아빠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첫째는, 너무 감사했고,

둘째는, 너무 놀라워서...

자기 아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주2)

우리가 이 세상을 다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좀 더 기도했더라면, 과거에 땅에서 40평짜리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지 못해서 30평짜리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하고, 천국에서, 통곡하시겠습니까?


또 내가 더 쎄게 기도 했었더라면, 사장이나 이사가 될 수 있었는데,

기도로 구하지 않은 결과, 축복을 다 못 쓰고, 천국 창고에 고스란히 쟁겨두어서,

과장이나 일반 평사원으로 일평생을 산 것이..

천국에서 안타까워 엉엉 통곡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저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내가 더 기도했었더라면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고,

수많은 성도를 거느리는 유명한 목사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못해서

작은 교회나, 이름 없는 선교지에서 묵묵히 목회한 것이..

천국에서 땅을 치고 후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천국이 그런 곳이라고 생각됩니까?

이런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는 천국일 뿐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진정한 천국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천국 가서 후회할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땅에서 주님 앞에 더 헌신하지 못한 것 한 가지 뿐입니다.             ▣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