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참 복을 - 하나님을 봄 마5:8 11.01.10.설교녹취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까?
▲복의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받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건강, 형통함, 요셉처럼 총리가 되는 출세..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요, 이것을 우리는 ‘복’으로 여기는데,
8복의 6째 복은, 받는 것은 없고, 보는 것이 복이라는데..
이런 복은 있으나마나 한 것처럼 보이고, 별로 매력이 끌리지 않는다.
‘그저 쳐다본다고..’ 밥이 나오거나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것이 ‘복’이라니.. 무슨 얘긴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도 되고, 재앙도 된다.
출19장에 보면, 출애굽한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언약)을 체결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불 우뢰와 빽빽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는데, :16
하나님은, 백성들이 산 앞에는 이르러도, 산 위로 올라오지는 못하게 경고하셨다.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러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당시 별로 문화 컨텐츠도 없었던 시절에 얼마나 궁금했을까?
저 같았어도, 막 시내산 위로, 불과 연기가 나는 그곳으로 구경하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차 이렇게 경고하셨다.
출19:21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그렇다. 죄인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면.. 죽는다. 출19:21
그런데 마5:8절 본문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라고 말한다.
이 복 잘 못 받았다가는.. 복은 커녕, 도리어 사망이 내게 임할 것이다.
(그렇다면 느낌이 일단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똑같이 보는 것인데.. 한 구절은 ‘죽는다’고 하고,
한 구절은 복이 된다고 말한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마음이 청결한 상태로 뵈면.. 무한한 복이 되지만,
마음이 불결한 상태로 뵈면.. 엄청난 화가 되는 것이다. 주1)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주2)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이어령 박사님의 에세이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란 제목의 에세이는,
시인이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떤 시각이어야 하는가? .. 를 말하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봐야 된다는데..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에 더욱 좋다.” 주3)
여기서 이어령 박사는 ‘먼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봄이 왔다. 마을 앞 강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햇볕이 내리쬔다.
배를 띄우고 강가를 노니는데, 저 쪽 강둑에 활짝 핀 봄꽃이 보이는데..
멀리 보이는 꽃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건 아무 사심 없이, 그저 봄꽃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의 시선이다.
이 시선과, 한 번 비교해보자.
꽃이나 약초를 캐서 장에 내다파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배를 띄우고 강둑의 봄꽃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끄러미, 먼 빛에 바라보기’가 안 된다.
자기 마음에 이미 사심이나 욕심이 들어가 있으므로..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물끄러미’ 바라보기의 반대개념을 (계속해서 이어령 박사의 에세이에는)
‘노려보기’라고 설명했다.
근교에 나가서 산하와 꽃과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기 내 땅 사야 되겠다. 저기 내 별장 지어야 되겠다. 저 꽃 꺾어 집에 가져가자’
이런 마음이 생기면.. 그 사물을 ‘노려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욕심, 사심이 투영되어 보게 된다.
그 ‘물끄러미’ 바라보기가.. 사물을 제대로 정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되려면, 그런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제발 ‘물끄러미’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겠다.
뭔가 자기 사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노려보지’ 마시고!
중간 정리하면,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라는데,
‘하나님을 사심 없이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내 마음에 오복적 시각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그 6째 복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덧붙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내 이익과 관련해서 그 사람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령 박사의 표현으로는 ‘물끄러미’ 바라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 본 자의 복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물끄러미(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그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의 사명을 감당했는데.. 살펴보면..
▲1. 아브라함
행7장에,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행7:2
행7:2절의 ‘보다’와, 본문 마5:8절의 ‘보다’가 같은 단어다. (헬. 오프타노마이)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 하나님을 보고 떠났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타나셔서 보여주셨다고 해도,
그 하나님을 볼 만한 신앙이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미인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험이 뻔히 불보듯 보이는데도, 그는 순종해서 떠났다.
순종해서 떠난 것만 봐도,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부터, 그는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믿음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삶은, 그의 일생이, 하나님을 '보는' 삶이었음을,
즉 마5:8절을 살았던 삶이었음을, 그래서 그 복을 받았던 사람이었음을..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행7:2
▲예를 들어, 우리 집에 아직 자식이 없다고 치자.
그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식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물끄러미 보기’가 안 되고, ‘노려보기’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가.. 내게로 내려와서, 나를 조정하지 않고,
내 뜻, 내 의지가 너무 강력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내가 마구 쥐고 흔들려 한다.
(물론 강청하는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등,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인 경우도 있다.
그런 예도 성경에 나온다. 수치를 들면 안 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면,
8:2(팔 對 이) 혹은 9:1 정도로, 하나님이 사람을 움직이시지,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이진 않는다.
굳이 확장하면, 전자를 칼빈주의라면, 후자를 알미니안 주의라 할 수 있겠다.
성경에 둘 다 나오지만, 둘의 무게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라고 본다./편)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갖게 해 달라’고 강력히 기도한 적이 없다.
가나안 땅을 주십사고 구해 본 적도 없다.
그냥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타나셔서, 주권적으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고,
가나안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창15:5~7
아브라함은 그냥 평소에 하나님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자기 마음에, 어떤 필요, 자기 목적을 갖고서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마5:8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다. 약2:23
창18:17, ‘나의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만약 오늘 하나님이 누구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처럼
‘나의 하는 일을 네게 숨기겠느냐?’ 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그는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것이다. 그 만큼 ‘보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이다.
*관련글 :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의 ‘수’가 보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다. 창12:2
이어령 박사의 에세이를 인용하면,
(‘노려보기’가 아니라, ‘물끄러미’ 바라보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숲은 송두리째 자기의 비밀을 드러내 보인다... 는 것이다.
▲2. 의인 욥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의인 욥도, 극심한 연단을 받은 후에, 받은 복이 <하나님을 보는 복>이었다.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기 위하여,
욥은, 욥기 42장에 이르기까지, 지루한 고난을 계속 받았던 것이다.
▲3.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예레미야
하나님을 ‘보는 것/뵙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인데,
예레미야가 그랬다. →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할 때 (강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복이라는 뜻이다.
▲마치는 말
세상의 오복을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올바로 볼 수 없다.’
마5:8절의 ‘하나님을 뵙는 복’은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래서 오복 위주로 신앙생활 할 때,
하나님을 왜곡하게 되고 (‘스스로 속는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래서 오복을 조금 받게 될지 못 받을지는 모르나
아브라함, 욥, 예레미야처럼,
시대를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지금 천국/영생을 못 살면, 나중에 천국/영생에 못 들어간다.
오늘 이 시대, 세상, 공동체는.. 하나님을 보는/뵙는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이 시대, 세상, 공동체를 살리기 때문이다.
오복을 받아서 제 혼자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
주1)
비슷하게 ‘주님이 낯을 향하신다’는 구절도,
주님이 낯을 우리에게 향하셔서.. 우리가 은혜와 복을 받기도 하고, 시31:16등
주님이 낯을 우리에게 향하셔서.. 우리가 진노와 벌을 받기도 한다. 벧전3:12등
주2)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나님을 보는 것’ 이전에, ‘보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두 눈이 있어서 세상을 다 보고 산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세상을 제대로 보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야단치신 말씀이
‘너희 눈 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아!’
바리새인들은 몸과 행위의 청결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말씀하셨다.
‘너희 눈이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 하셨다. 요9:41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6
꼭 마5:8절 말고도, 평소에 예수님은 ‘보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기도 하거니와, 또 제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3)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에서, <봄>편 마지막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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