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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체험과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LNCK 2011. 1. 15. 21:15

◈영적 체험과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의 위험        민12:1-8         10.11.29. 설교스크랩

 

 

▶서론 / 자기가 받은 신비한 은사 때문에 속은 사람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영적체험 때문에, 자기 위치를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주1)

 

모세하고, 아론과 미리암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형제인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에게도 ‘신비한 은사’가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아론과 미리암처럼,

자기에게 나타난 체험이나 은사, 기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려고 하면 속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교만해지고,

권위에 불복하고 불평과 원망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영적인 체험이 대단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계시와 위대한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그것에 속은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론과 미리암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모세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

 

 

◑1.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의 권위

 

첫 번째 차이점은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지도자가 아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입니다.

 

미리암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일 뿐이지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적인 은사가 임했다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론도 나중에 대제사장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모세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부르신 자는 모세입니다.

 

심지어 아론은 모세의 형이지만 모세의 대언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바로에 대하여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섬기는 우상의 능력들을 모세가 뛰어넘었기 때문에

바로가 볼 때, 모세는, 자기에게 신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받은 ‘신적 권위’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만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는 영적 지도자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그 권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은사는 비슷했을런지 모르나..

 

아론이 하나님께 받은 권위는 ‘모세의 대언자’였습니다.

정당에 수장이 있고, 대변인이 있는 것처럼, 아론은 그저 대변인일 뿐입니다.

 

나중에 아론이 11절에 ‘슬프다, 내 동생이여.’ 라고 하지 않고

‘슬프다, 내 주여’라고 했습니다.

뒤늦게 자기 권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른 사람은 모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여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는

그에게 영적인 권위를 주십니다.

 

권위/권한이 없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권위가 있고 권한이 있어야 일을 추진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는데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온 권위이기 때문에

거스르게 될 때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대적하는 자는 나를 대적하는 것이고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이것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체험이나 은사로 모세와 권위에 있어서 같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기름 부어 세우신 종들에게는

체험이나 계시, 은사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직접 선택하셔서 기름 부으시고 권위를 주어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체험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시고 기름 부어 영적인 권위를 주었는지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모세가 없으면 아론도, 미리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권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고 권위 아래 순복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자살행위입니다.

어떤 은사나 체험, 계시를 받았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 아래 거하고 복종해야 안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미리암처럼 문둥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신 권위자는.. 친밀함이 다릅니다. (은사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주님과 얼마나 친밀하느냐.. 이것입니다.

언뜻 생각해볼 때에는 모세나 아론과 미리암이 동등하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동등한 것이 아닌 비슷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에 있어서,

모세는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후에 직접 말씀하시기를

민12:4~6a,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3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아론과 미리암이 들어야 될 말(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민12:6b~8

 

이것이 친밀감입니다. 똑같이 환상을 보고, 똑같이 음성을 들었는지 몰라도

‘친구가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주님의 얼굴을 모세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는 모세에게만 보이셨습니다.

 

은사로 자신을 평가해선 안 되고,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자신을 재어 보아야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품거나 믿음의 분량을 뛰어넘어선 안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으로 부르셨는지 알아야합니다.

 

성경에서 자기 지위를 떠난 것이 사탄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것처럼

그 역할이나 속성이 사탄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이 사람이 사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성이나 행동이나 역할이 사탄과 유사하기 때문에

잠깐 사탄적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을 주셨고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혜롭게 생각해야 되요.

자기의 위치를 떠나면 안 되는데,

교만하여 져서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부르심 받은 대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탄은 자꾸 자기가 부름 받지 않은 데도.. 스스로 뭐가 되려고 해요.

미혹의 영에 붙잡히면.. 자꾸 자기가 부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뭐가 되려고 해요.

 

특히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 그런 미혹이 들기 쉽습니다.

은사가 전부가 아니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부르심◑1 과, 하나님과의 친밀함◑2 이 없다면.. 기다리세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을 대적하지 마세요. 그게 본문의 교훈입니다.

 

그 다음에 차이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신 권위자는.. 인격이 다릅니다. (은사가 아닙니다.)

 

민12:3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인격과 성품은, 진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예요.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예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주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 이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랬잖아요?

 

주님의 권위를 받아, 주님과 친밀하여, 주님을 대면한 모세는,

변화되어.. 주와 같은 형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뵈니까.. 자꾸 주님의 형상을 닮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죠.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말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정말 대면한 사람들은,

 

단순히 예언을 잘하고, 병을 잘 고치고,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수님을 자주 보고, 천국에 자주 올라가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모세처럼 온유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자기를 평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 모세하고만 말하였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런 체험가지고 자기를 평가하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어떻게 되었느냐, 주님을 봐서 어떻게 되었느냐,

천국에 갔다 와서 어떻게 되었느냐,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어떻게 되었느냐,

강력한 기름부음과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그래서 예언사역자가 되었다... 이러면 안돼요.

그래서 난 잘나가는 치유사역자가 되었다... 이러면 안돼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온유해져야 되요. 겸손해져야 되요.

예수님을 닮아야 되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됐어야 되요.

이게 그 사람의 ‘크기’입니다.

그때 그가 받은 모든 은사가.. 올바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사람의 크기를 재는 자가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과 닮으면 닮을수록,

그분과 같으면 같을수록 천국에서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으로 자기를 재는 자, 은사로 자기를 재는 자,

나타나는 능력으로 자기를 재는 자, 자기가 가진 직분으로 자기를 재는 자.

이것은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로 자기를 재야 되요. 겸손으로 자기를 재야 되요. 거룩으로 자기를 재야 되요.

사랑으로 희생으로 자기를 재야 되요. 여러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스스로 속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뭐에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게로 와서 배우라’

내게로 와서 성경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 자신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겸손한 자는 (점점) 높아지고 교만한 자는 낮아진다.’

그것이 자라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큰 자인지. 그것이 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겸손한가, 얼마나 온유한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이것이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을 대면해서 보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까지 이끌려 올라갔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예수님을 아는 것인데요...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는지 이런 것이 아니고,

그분의 음성을 알고, 외모를 알고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예수님을 아는 것인데...

예수님의 마음이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다...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함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것을 닮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입니까.

 

그 말씀을 거울로 삼아서 제 자신을 보니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 위의 모든 사람들 보다 승하더라.’ 그랬는데

나는, 저를 공격하는 자들과 싸우다 보니,

그런 부분에서 많이 망가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원래도 본질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아닌데다가..

다투다 보니, 더 험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그래서 요새는 제 스스로 온유해지려고 많이 애를 씁니다.

의도적으로도 온유해 지려고 부드럽게 말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겸손하게 말하고, 온유해지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아무튼 여러분 중요한 것은, ‘주님을 얼마나 많이 닮았느냐?’

그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재봐야지. 다른 것으로 재면 미혹되는 것입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이지만 착각한 것이 그것입니다.

미리암이 여선지자이지만 착각한 것이 그것입니다.

대제사장이라고 같은 것이 아니에요.

선지자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지도자들이 있어요.

그 권위① 앞에 겸손해야 됩니다. 순복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체험이 아니고, 은사가 아니고 주님과의 친밀감②입니다.

모세가 가졌던 주님과의 친밀감. 그 친밀감이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 온유함③입니다.

은사체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가장이었을 뿐이에요.

좀 부자였을 뿐이고, 식솔들이 좀 많았을 뿐이고, 그냥 가장이에요.

아브라함이 엄청난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엄청난 사람들을 이끌고 사역을 하고 그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그냥 평범한 가장이에요.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인물로 성경에 나옵니까. 왜 그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어요.

그것이 아브라함을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들 것입니다.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큰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래도 아브라함은 독특하고,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①주님께 ‘많은 민족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권위가 있었고 창12:1~3등

②주님과 친밀했기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비밀이 없었어요.

 

진짜 친한 친구들은 비밀을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어요.

그게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영적인 위대성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얼마나 친밀한가!

 

 

.................................. 쉬어 가는 곳 .........................

 

 

◑4. 이런 지도자의 증거는 - 충성됨입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12:7

 

하나님이 모세하고는 대면해서 얘기했어요.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참이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모세에게 만큼은 보여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 그랬다고 그랬어요? 왜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특별하게 대우했습니까?

 

왜 다른 선지자들하고 다르게 모세를 그렇게 특별하게 대우했어요?

그가 충성됐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특별하게 대우했어요? 그가 순종했기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독자 이삭을 드려라.’그는 철두철미하게 순종했어요.

순종이 아브라함의 특징이었다면, 충성은 모세의 특징이었습니다.

모세가 충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식으로 영적세계에서도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슨 집회에 참석해서 불덩어리 받으면 갑자기 슈퍼스타가 되어가지고

큰 은사와 능력으로 가지고 크게 쓰임 받고... 그런 것 없어요.

 

기도하고, 집회 쫓아다니고, 40일 금식하고 능력 받으면

뭐가 갑자기 그 사람이 슈퍼스타가 나타나는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브라함 같은 순종입니다.

삶 속에서의 순종입니다.

 

진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모세와 같은 충성입니다.

그런데 그 충성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요? 큰일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일을 맡긴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일에도 충성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합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사역을 했던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처럼 일상 삶속에서의 순종이에요.

오랜 순종이 쌓이고, 독자 이삭을 드리라 한다고 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도록

그렇게 순종이 성숙하고 깊어지고 온전해 질 때에

그 사람이 위대한 영적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충성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해지는 방법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 일을 오래하면서 보아온 것은, 진짜 위대해지는 사람은 불이나 능력을 받거나,

예수님 보고 천국 갔다 온 사람이 아니라

삶 속에 아브라함처럼 평범한 일에 계속 순종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입니다.

 

진짜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은 작은 일에 이름도, 빛도 없이

순수하게 충성되었던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쓰임 받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에 사심이 없이 순전한 동기와 기쁨으로 순종하다 죽으면

그게 영광이고 행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역의 크기가 아니라 중심, 순종과 충성을 보시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부각되는 사역을 하지 못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죽었다고 해도

억울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4장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야한다고 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5

진실로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의 잣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품으로 자기 자신을 재어보아야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고

쉽게 자기 자신에게 미혹이 되어 비판하고 원망, 불평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올바른 잣대로 자신을 재어보게 하여주시옵소서.

 

계시나 주님의 방문을 받아 갑자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 매일을 순종, 충성되게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의 증거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길입니다.

 

........................

 

 

주1) 예언사역을 하는 교회는 예언사역 때문에 힘을 얻고 부흥하던지,

아니면 교회가 풍비박산 납니다.

예언사역을 일으켰던 많은 교회들이 문제가 생기고 교회가 파괴되었고,

성공한 경우는 소수입니다. 그 문제가 바로 아론과 미리암의 고백에 들어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신을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고 조종하려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예언사역이 교회에 기여되는 것이 아니라

분란과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성향이 되어버렸습니다.

 

저희는 계시나 체험이나 영적인 은사들이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은사를 계발시키는 것보다도, 교만을 깨트리는 데 초점을 맞추어

사람들의 교만을 깨트리고,

 

단순히 은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하게 만들고,

목회자의 권위에 철저하게 겸손히 순복하고, 예수님을 닮고,

주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예언사역이 교회에 큰 도움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사역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 것입니다.

은사사역에 있어서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한국교회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왕들이 전쟁할 때, 자신의 머리로 전쟁한 사람들은 패배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 말에 이해가 되든지, 안되든지 순종한 사람들은 모두 승리했습니다.

그런 자세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성경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면 사모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면 사모하고,

풍성할 것을 구하라고 하면 신령한 것이 풍성할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희의 강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리나 전통, 사람들의 생각이나 우리들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문맥을 통해 정직하게 살피고 무조건 쫓아갑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저희가 걸어온 길이고 효과가 있었습니다.

 

      부목사님들도 같은 목사님이지만,

이 교회에 대해서는 제게 기름 부으시고

부목사님들은 저를 도와 주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지

절대 동등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은사와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과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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