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절의 성령을 구한 이유 왕하2:1~25 10.12.12.인터넷설교스크랩,녹취
◑목숨 걸고 스승 엘리야를 따를 필요가 없었다.
▲목숨 걸고 스승을 따른 엘리사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셨다. :1
그리고 결국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승천한다.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1
이것은 멋있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다.
엘리야는 때가 되어 하늘로 승천하지만,
엘리사는 괜히 천사를 보았다가, 죽을 수도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리고 엘리사까지 덩달아 데려갔으면.. 어쨌든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엘리사는 죽지 않았고, 천사가 둘을 떼어놓고 엘리야만 데려갔다. :11)
아마 그런 이유로, 엘리야는, 자꾸
'여기 머물고,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 :2, :4, :6
그러나 엘리사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 스승의 만류를 거부하고
길갈-벧엘-여리고-요단으로 계속 스승 엘리야를 쫓았는데...
▲단순히 부富를 목적으로 했다면, 스승 엘리야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이미 엘리사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2겨리 소를 몰면서 밭을 갈 사람이라면, 아마 그 밭의 크기가 굉장했을 것이다.
그는 땅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래서 왕상19:19절에 '사밧의 아들 엘리사'라고 나온다.
성경에 '누구의 아들'이란 표현은.. 가문이 있는 집안이라는 뜻이다.
(이에 반해 엘리야는, 그냥 '디셉 사람 엘리야'이다. '누구의 아들'이 아니다. 그가 평민 출신이라는 뜻)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른 이후에, 스승처럼 가난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스승처럼 과부 집에서 얻어먹었던 적도 있었고,
그 제자 게하시가 나아만의 선물을 탐낸 것을 보아도, 그의 삶이 매우 궁색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른 이유는.. 부자 되는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꾸 스승 되신 주님을 따르면서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승 되신 주님도 부자로 살지 않으셨는데... 제자가 그러면 못 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절실히 간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다른 것을 구하면 잘못이다.
우리가 절실히 간구해야 할 것은.. 아래에 나온다.)
▲단순히 지위를 목적으로 했다면.. 스승을 끝까지 목숨 걸고 따를 필요 없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딱 집어 거론하시면서,
자기를 뒤 이을 선지자가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상19:16
누가 뭐라고 해도 엘리사는, 명실상부 엘리야를 뒤 이을 후계자였다.
지금 엘리사가, 후계자로 낙점되려고,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왕하2:3, 5절을 보면, 선지생도들이 엘리사를 부를 때, '당신의 선생'으로 불렀고,
(선지생도들도, 엘리사가 벌써 엘리야의 수제자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특히 왕하3:11절에, 엘리사를 소개하면서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로 소개한다.
'높은 사람의 손에 물을 붓는 행위' .. 이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손에 물을 부어 손을 씻거나,
혹은 식사하기 전에 손에 물을 부어 손을 씻었는데,
-보통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인이 초대한 손님에게,
-또는 제자가 스승에게 손에 물을 부어주었다. 아무나 붓는 게 아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라는 것은
그가 엘리야의 수제자다... 라는 뜻이다.
지금도 시내 식당에 가면,
제법 높은 사람이 가면, 홀 서빙을 아무 직원이나 하지 않고,
그 식당 주인이나, 혹은 지배인이 직접 나와서 홀서빙을 한다.
컵에 물도 따라주고, 음식 배식도 직접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당신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서빙하지 않고, 주인/지배인이 직접 서빙 합니다...'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정리하면
지금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 자리를 이미 굳히고 있었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자리도 없다.
굳이 승천하는 자리까지 엘리야를 따라나서지 않아도,
'엘리사는 엘리야의 대를 이은 공식 후계자'였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 목숨까지 걸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나선 것은,
저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데... (갑절의 성령을 받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엘리야가 3번이나 부탁한다. '너는 여기에 남아 있으라!'
이것은 더 이상 내가 네게 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뭘 더 줄 것이 있었다면, '계속 나를 따르라'고 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이미 모든 것을 물려받은 위치에 있었다.
그냥 스승을 계속 따르는 것이, 작별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다면,
길갈까지 가거나, 혹은 벧엘까지 따라가서 배웅했더라면.. 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가, 3번이나 스승의 만류를 뿌리치고,
끝까지 스승을 자기 목숨까지 걸고 쫓아간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제게 갑절의 성령을 주시옵소서!
▲엘리사가 따른 목적은 갑절의 성령
최종적으로 그가 엘리야에게서 구한 것은.. 본문 9절에 나타나 있다.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성령의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a double portion of thy spirit be upon me 왕하2:9 주1)
▲이것은 '장자의 명분'이라고 해석하지만..
구약에 보면, 장자에게는 다른 아들보다 두 몫을 주었다.
그래서 엘리사가 갑절을 달라고 구한 것은
'많은 선지자 중에 나를 장자로 세워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들린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저는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구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엘리야의 장자/후계자였음을 앞서 설명했다.
▲그가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구한 진짜 이유는?
그는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성령의 능력이 갑절로 필요함을.. 그는 절감했던 것이다.
마치 왕이 된 솔로몬이, 자신의 왕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저는 아이라, 사물을 분별할 줄 알지 못하니 내게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던 심정과 같다고 하겠다.
지금 엘리야의 대를 이어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는 엘리사는
자신의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능력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사역은 아합왕의 부패에 맞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의 사역에서 가장 큰 승리는, 갈멜산의 승리였다. 왕상18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엘리사가 감당한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보다 (그것도 큰 승리였지만) 더 크고 어려운 것이었다.
엘리야는 아합왕 하고만 싸웠지만,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왕과도 싸워야 했지만, 이방 나라, 아람 군대와도 싸워야 했다. 왕하6장
그래서 엘리사는 (선지자라서 그런지 미리)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스승 엘리야의 뒤를 이어서 사역해야 하는 그의 미래는,
'정말 스승의 능력의 갑절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갑절의 능력으로 자기를 강권적으로 이끌어가지 않으시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엘리야에게 부어주셨던 성령의 갑절을 구한 것이다.
그의 구함은 응답을 받았고, 그래서 엘리사는 정말 자기 시대적 사명을,
그 어마어마한 사명을.. 잘 감당했다. :12~13
그가 받은 '갑절의 능력' 때문이었다.
◑적용 / 이 엘리사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들은, 갑절의 성령이 아니다.
신자들이 보통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가지느냐? 누리느냐? 무엇이 되느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
심지어는 사역자들도 똑같다.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갑절의 성령을 구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없다.
혹시 갑절의 성령을 구해도.. 자기 출세, 자기 영광을 위해서 구할 뿐이다.
오늘 그 갑절의 성령을 얻기 위해서
이미 명예와 지위를 충분히 다 가졌지만,
자기 목숨까지 걸고 스승인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엘리사의 참된 마음과 열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갑절의 능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열정,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한 관심..
- 이것이 엘리사와 비교해 볼 때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이다.
엘리사의 마음은,
그가 지금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싶은,
그 간절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지위, 존경, 물질..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 내게 성령을 갑절로 주시지 않으시면,
엘리야를 통해서 주셨던 그 능력이 갑절로 제게 있지 않으면,
저는 제 직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이루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게 선지자로서 능력을 감당할 성령의 영감을 갑절을 주시옵소서..'
이 마음, 이 열정을 오늘 우리가 닮아야 하겠다.
다른 것들(물질, 인기, 승진, 명예)을 우리가 구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면서도, 세상 영광을 안 구하기가 힘든데,
엘리사가 구한 것은, 세상 영광이 아니었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시면서,
'성령을 받을 것을 구하라'고 당부하셨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본문에 엘리사가 갑절의 성령을 구한 것과
행1장에 120문도가 간절히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성령을 구한 것과
장면이 겹쳐지는overlap 것을 느낀다.
엘리사가 갑절의 성령을 구한 것은, 마가 다락방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본문 다, 구한 대로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엘리사처럼 갑절의 성령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영적전쟁은
어쩌면 '엘리야 시대'가 아니라, '엘리사 시대'에 비유된다.
이전 세대보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영적전쟁이 더 치열해 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엘리사처럼, 갑절의 성령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세상은 더욱 타락하고 있고,
나 한 사람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도 힘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엘리사가 구한 것처럼 (이전 세대보다 더한) 갑절의 성령인데..
혹시 오늘도 나는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엘리사처럼,
갑절의 성령을 주님께 구하고, 그것을 받아서 능력 있게 섬기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시대가
'엘리아의 시대'가 아니라, '엘리사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갑절의 성령이 필요한 시대라는 뜻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와중에서, 내 본성은 '세상 영광'을 자꾸 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단락이 주제인데, 너무 줄여서 쓰다보니, 본래 설교의 뉘앙스가 많이 감소되었습니다만, 각자 묵상해 봅시다.)
..........................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이 단락 편집자 글)
저도 늘 관심을 갖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만,
성경에 보면,
갈3: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믿음으로다)
갈3: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롬8:2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구절들은,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라고 증거합니다.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많은 생각을 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로 성령을 구하거나, 성령의 충만을 받을 필요는 없다.'
라고까지 확대해서 주장하는 것은.. 오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동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일반적 관계'가 아니라요.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가 믿음의 도를 통해,
성령이 내 안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그저 일반적 관계가 아닌,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비가 온 세상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바깥에 나가서 비를 흠뻑 맞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은 살5:19
믿는 사람이라도, 그가 성령충만할 수도 있고, 반대로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믿음을 통해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엡5:18
안 구해도 자동적으로 주어진다면서요?
믿음의 도를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건 세상에 성령이 오시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이제 보혜사 성령님이 대신 오시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자동적으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바깥에 소낙비가 내리고 있는데, (성경은 종종 성령을 비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가서 비를 흠뻑 맞아야 합니다. 믿으면 자동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 연구할 과제입니다. (이 단락만 편집자 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이 오시게 된 소위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구절을
성경을 읽다가 또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딤전3: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He generously poured us the Spirit upon us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Saviour did. NLT
주1)
※'갑절의 성령'에 대한 한글번역이 약간씩 다르다. '영감의 갑절', '능력의 갑절',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 등
히브리어는 '루아흐'(바람, 숨결, 영)인데, 아직 사도행전 2장 시대가 오지 않았으므로, '성령'으로 번역하기를 피해 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구약시대에 간헐적으로 임한 성령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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