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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그리스도 2839

LNCK 2011. 1. 21. 12:25

◈선구자 그리스도                        히2:10        스크랩, 출처보기, 축약

                                                          2009 성서한국 특강/ 권연경 교수

 

※우리가 이런 '성경공부, 성경배경설명'이 딱딱하더라도 자꾸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안 그러면.. 성경의 대의와 문맥에서 완전히 빗나간,

'성경의 한 구절만 딱 빼서, 본문 삼고, 자기 하고 싶은 말'하는.. 자기 설교가 되고 맙니다.

 

 

▲내가 “이루어 가는” 구원

구원은 은총이지만, 나는 구경만 하는 그런 은총은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그 뒤를 따라 영생을 향한 “좁은 문”으로 가는 일입니다.

지금 내 삶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이요,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얻는다”는 속삭임은,

내가 “사고 쳤을” 때는 듣기 좋은 소리일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복음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아이가 클 때 일입니다. 예전에 맥도날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꽤 어릴 땐데, 자기가 가서 사이다 리필을 받아오겠다고 우깁니다.

1층 내려가는 계단도 가파르고, 컵도 깨질 수 있고,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래도 자기가 하겠다고 우겨서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따라 오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안 볼 수는 없고, 그래서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자기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우글거리는 중고등학생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리필 부탁하는 게 어려워 쭈뼛쭈뼛하고,

어렵게 직원 언니와 눈이 마주쳐 “뭐 줄까?” 하니, 그제야 모기 같은 소리로

“사이다 리필이요” 합니다. 여전히 숨어서 올라오는 아이의 표정을 봅니다.

 

힘든 일 괜히 했다는 표정이었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아마 당나라 십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표정처럼 의기양양 했습니다.

“해 냈다”는 자부심입니다. 못 할 줄 알았는데, 해 냈구나 하는 성취감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 낼 수 있도록,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지켜 봐 주시고, 우리를 배후에서 도와주십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여기에 구원의 한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대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힘겨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늘 대신 해 주고 시키는 대로 하는 나이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성숙케 하시는 예수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대신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걸어야 할 구원의 길, 성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자라게 하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소개해 줍니다.

바로 “선구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선구자 그리스도

 

선구자란 “먼저(先) 달려가는(驅)” 사람(者)입니다.     *驅:몰 구, 몰다, 달리다

 

히브리서는 예수를 3번이나 “선구자”라 부릅니다.

 

①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선구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2:10).

 

개역개정판에서는 “구원의 창시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이전 개역판에서는 “구원의 주”라고 번역했었습니다.

 

개역개정의 “창시자” 혹은 “선구자”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미래적) 영광으로 이끄시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구원의 “창시자” 혹은 “선구자”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선구자'라는 타이틀은 12장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②그러므로 이렇게 구름처럼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선구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12:1-2).

 

이 구절에서 개역이나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믿음의 주”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도 정확한 번역은 “선구자” 혹은 “창시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선구자요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깁니다.

 

이 구절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11장의 결론적 적용입니다.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인내하며 달려가자는 권고입니다.

 

이 두 구절 말고도, 또 히브리서 6장에서는

“선구자”라는 의미를 그대로 담은 표현을 하나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③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6:20).

 

여기서 그리스도는 “먼저 달려가신 분,”

말 그대로 선구자(先驅者, forerunner)로 묘사됩니다.

 

 

▲1. 선구자란.. 앞서 가서 길을 개척했다는 뜻

 

구원의 달리기에서 우리가 바라볼 결승점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이 믿음의 길을 우리 먼저 달려가셨던 믿음의 선구자이시기도 하고,

또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분,

곧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선구자”이기도 하고(2:10)

혹은 “믿음의 선구자”(12:2)이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 앞서 달려가신 분

 

히브리서는 구원의 길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여정으로 비유합니다.

예전에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그 속에 먼저 들어가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이로써 이 휘장 가운데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6:19).

 

※이 부분▲1은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연구하시면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의 연구가 되어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 대제사장 그리스도”라는 그림으론 다 담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진리를 선포하는데요... ↓

 

 

▲2. 선구자란.. 앞서서 달려가니, 나를 뒤따라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구자라는 것은, 당신이 앞서 달려가셨고,

우리가 그 분이 가신 같은 길을 뒤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의 사역에는 우리가 뒤따를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신”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속이 구원의 전모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여시고 그 길을 몸소 먼저 가신 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라 구원의 길을 걷도록 하신 분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선구자”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선구자는 먼저, 앞장서서 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선구자 그리스도라는 그림 속에는

이 분이 우리와 같은 출발점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시궁창에 그냥 둔 채

혼자서 우리 대신 구원의 묘기를 부리는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가 있는 시궁창 속으로 내려와,

여기 세상에서부터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내신 분입니다.  

 

우리의 선구자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나를 따르라” 하셨다면, 그건 불가능한 부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우리 옆에 서서,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가면서,

(선구자로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따라 갑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자신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으니까,

연약한 우리들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인용했던, '선구자'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2:10절을 다시 봅시다.

여기서 구원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향해 가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혼자서는 못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 계신 곳으로 데려 가려고,

우리가 사는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깁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 부릅니다.

 

 

고난으로 온전케 되었다.. 는 뜻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또한 2:10참조)

 

하나님은 그를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구원자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완전한 자격을 갖추신 것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라는 데요, 무슨 뜻입니까?

 

고난을 겪는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겪는 보통사람, 즉 완전한 인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들이 고난 중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혈과 육을 가진” 우리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분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고난으로부터 영광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11-13).

그래서 예수님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2:14).

 

그래서 예수님이 선구자로 달려가신 것은,

온전한 인간으로 달려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뒤따라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가 못 가진 신성神性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위 ▲1.에서 설명했습니다.)

 

혈과 육을 지닌 우리들의 삶은

한 마디로 “죽음의 공포 아래서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2:15).

이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이는 마귀입니다(2:14).

 

예수님이 이런 삶의 조건 속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2:16).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셔야만 했습니다”(2:17).

 

그래야만 우리를 위해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처럼) 시험 당하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2:18).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갖고 은혜의 보좌로 나갑시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될 자비로움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4:15-16).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는 분입니다.

우리가 힘겨워할 때,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도 안다”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힘겨울 때 우리는 종종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나 하니?”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단절시키고, 우리를 고독과 불안에 빠지게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이길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모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무의미하고, 늘 고백하던 하나님의 사랑도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내 딸을 그렇게 불쌍하게 죽게 하나?” 하는 분노감뿐입니다.

 

모두 뭐라 위로할 말이 없는데, 그 중에 나서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몇 해 전, 역시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야 했던 분입니다.

긴 말을 할 것도 없이, “나도 안다”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나눕니다.

“나도 그렇게 아팠고, 지금도 그렇게 아프다.”

이 고통의 나눔에서 우리는 희망의 빛, 구원의 가능성을 경험합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폴 포츠나 수잔 보일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성공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들이 우리들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있다가도 그렇게 올라갈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서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승리”란 바로 그런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빨간 망토의 수퍼맨으로 우리를 낚아 올리는 대신,

뿔테 안경을 쓴 신문기자 아저씨로 우리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런 모험이 필요했던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싸움 속에 있고, 우리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마귀에게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당하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순종하셨고,

이로써 우리도 또한 죽음의 공포와 그로 인한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10:20).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9절).

그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믿음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열어주신 좁은 문으로 기꺼이 들어가게 만드시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 분 뒤를 기쁨으로 따라오게 만드십니다.

 

 

▲3. 새언약을 통해서 온전케 됩니다. -여기 클릭-

 

 

▲마치는 말/ 선구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오늘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선구자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같이 시험당하고, 나와 같이 힘겨워하셨던,

그러나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이제 내 손을 잡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 예수님을 마음에 깊이 되새기면서(3:1) 혹은 바라보면서(12:2),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일어섭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열정과 결심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은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12:1).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 달려가는 것이지,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만사 오케이다'... 하고 뒤짐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 갑니다.)

 

현실이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있지만,

그럴 때에 우리는 나와 같이 고난당하신 예수,

그러면서도 그 상황을 이기고 순종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2-13).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13:12-13).

 

 

........................................... 더 읽으실 분 .....................................

 

 

◑히브리서 서론: 잘못된 회심에 대한 경고

 

들어가는 말

이번 시간은 성경 강해입니다. 여러분은 무조건 아멘 할 태세로 있어서는 안 되고,

저의 강의를 도움으로 삼아 성경 말씀 생각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와 함께 성경의 본문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며, 나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본문으로 삼아 참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뜻입니다.

그 제목을 보면, 독자들이 히브리인, 곧 유대 기독교인들인 듯싶어 보입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설교 전체가 구약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는 점,

그리고 구약의 옛 언약과 예수의 새 언약이 자꾸 대조되는 것을 보면,

아마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향한 설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로 인한 고난이 너무 힘겨워(10:32-34),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던 유대교적 삶으로

다시 “회심”하려는 유혹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도들에게 “뒤로 물러가 멸망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 구원에 이르자”고 권고합니다(10:39).

 

구원을 향해 항해하다가, 그 길이 어려워 돌아서려는 이들에게,

돛을 내리고 물러서지 말고, 고난을 인내하면서

구원의 항구를 향해 계속 항해하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혹은 “예수를 바라보자”(12:2) 등의 권고들이

이런 갈등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가지 전략: 신학적 논증, 심판의 경고, 목회적 격려

성도들의 돌아섬을 막기 위해, 저자는 기본적으로 3가지의 전략을 사용합니다.

 

①신학적 논증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더 좋다”는 식의 비교급이 매우 자주 나옵니다.

사실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위한 “모형” 혹은 “그림자”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천사들보다 더 위대한 분이며, 모세보다 더 좋은 언약을 세우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삶이 어렵다고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체를 버리고 그림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힘겨워 선지자의 시절로, 모세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구원을 향한 성숙의 길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②심판의 경고

둘째로, 돌아서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가 반복됩니다.

신약 중에서 히브리서는 심판에 대한 경고가 가장 자주, 가장 무섭게 등장합니다.

 

믿음을 버리고 돌아가는 일이 위험한 것은 그 결과가 심판과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 구원이 더 크고 좋은 만큼, 여기에 딸린 심판도 그만큼 엄중합니다.

모세의 말도 거역하면 심판을 피하지 못했는데,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 분을 욕보이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심판을 초래하겠습니까?

당장 편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③목회적 격려

셋째,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자는, 가슴 따뜻한 격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우리 길잡이로 묘사됩니다.

 

흔히 “믿음장”이라 불리는 11장에서 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잘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들처럼 우리도 믿음을 지키자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또 고난 당하셨던 예수님을 상기시키면서,

그와 함께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걸어가자고 힘을 북돋웁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부분(▲3.)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