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1장 인터넷 설교 스크랩
※지난 회 성도가 항상 기뻐해야 하는 이유 2858 에서
성도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성도의 최후승리가 작정되어 있다... 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최후승리가 작정됨, 완료된 구원.. 이것이 90% 맞지만,
반면에 '구원 받은 성도라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도 성경의 엄연한 가르침입니다. 10%
그 성도의 타락을 경고하는 성경이 히브리서와 → 히브리서 5대논증과 5차경고 2708
오늘 살펴볼 유다서(아래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적동의'를 통해 자기 스스로 (값싼)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하면,
구원받은 성도의 타락 가능성은 10%가 아니라, 30%+로 높다고 하겠습니다.
*%수치는 편집자 개인의 추측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균형을 위해, 유다서 설교를 찾아서, 스크랩해서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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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하려는 말씀의 부제목은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네가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받는 줄 아는데
그 믿음이 잘못되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
이것을 말씀하는 게 바로 유다서입니다.
교회들 속에서 유다서가 아주 언급이 잘 안됩니다.
우선 한 장밖에 안 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약간 거슬리는 게 좀 많아요.
유다서에 외경에 나오는 내용(모세의 시신)등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교훈에 좀 어긋나 보이는 것들이 있어서
목사님들이, 특히 장로교에서 별로 안 좋아할 것입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서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고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그래서 비평적으로는 여러 가지 학설도 있지만
교회에서는 정통적으로 '예수님의 친동생인 유다가 이 서신을 쓴 것이다'라고 봅니다.
유다는 자기를 ‘야고보의 형제’라 말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이것은 성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그러니까 유다는 이 편지를,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지키심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쓴 것입니다.
어떤 외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받는
그러한 성도들을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못한다는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구원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갖고 있으되 구원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놀랍게도 구원 얻을 수 없는 믿음을,
야고보 사도는 ‘행함 없는 믿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하는데,
'이익'이라는 단어는 장사하시는 분들이 쓰는 말입니다.
그분들은 어떤 물건을 들여와 가지고 되팔아서 나중에 계산을 해봅니다.
원가, 운송비, 저장 및 보관료, 전기세, 인건비를 들여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익이 남지 않고 손해를 보면 밑지는 겁니다.
장사하는 이유는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손해가 나면 장사 잘못한 것입니다. 모든 수고한 게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 믿고 믿음 생활하는 데는 유일한 목적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못 내고 손해를 보듯이,
열심히 믿음 생활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구원받지 못한 믿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 성령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야고보서는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약2:18-22절 봅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0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22절에도 믿음을 가졌는데 행함이 없으면 헛것이고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온전치 않다고 말합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그 믿음이 온전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은 헛것을 '헤벨'이라고 말을 합니다.
전도서에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게 '헤벨'이란 단어인데, 기본 의미는 호흡, 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입김‘입니다.
우리가 겨울철에 ‘호오’하면 하얀 입김이 나오는데 금방 없어져 버립니다.
바로 그 입김처럼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잡히는 게 없고 구원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약2:23-2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 끝에 보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 자체가 죽었습니다.
죽은 믿음이 어떻게 그를 구원합니까.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이 없어서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나 유다서를 쓴 유다는
두 사람 다 예수님의 형제이고
이 두 사람 다 우리에게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는 걸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는 용감합니다. 이상하게 야고보와 유다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에게 분명히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다 보면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으로 그 믿음이 변질될 수 있다는 걸 경고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잘 갖길 바랍니다.
▲3절,
유다서는 왜 기록이 되었는가. 유다서 3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절을 보면 유다가 왜 편지를 쓰고 있는지 그 저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서의 저술 동기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저라고 해서 좀 쉬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라고 해서 더 특별한 믿음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좀 별스럽고 이상한 믿음을
주님이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과거의 삶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르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일반입니다.
그래서 '일반으로 얻은 구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왕도 똑같이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종도 그렇습니다.
도둑질하던 사람도 그렇습니다. 창기였던 사람, 세리였던 사람, 군인이었던 사람,
바리새인, 서기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일반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 믿음이 변질되면
구원에서 떨어져버릴 수 있다는 걸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교회 안에 구원을 얻었던 믿음이 변질되려는
뭔가 위협과 위기가 오는 걸 바라보면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편지 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이집트 파피루스나 양의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요즘 같이 종이에 볼펜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그것도 잘 안 쓰고, 메일로 써서 보내기만 누르면 되니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만큼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일이 생긴 겁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져야 구원받습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과 자기 백성간의 중보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백성이고 안 지키면 아닌 것입니다.
새 언약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파쇄되고 변질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의 도를 위해서 힘써 싸워야 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이렇게 싸워야 될 믿음의 싸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계14: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 믿는 믿음을 잘 지켜야 구원을 얻는데,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종종 생깁니다. 환난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난을 겪고 계신 분들은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환난을 못 이기고 믿음을 잃어버리면 천국에 못 갑니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환난 속에서 죄를 그치고 정결하게 연단되어서
주님 앞에 더 단장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의 유혹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해서 믿음을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쾌락을 좇아 살다가
믿음을 저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싸워서 믿음을 지켜야 됩니다.
그런데 유다서는 그런 종류의 믿음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믿음의 싸움인가? 4절 봅시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교회에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습니다.
가만히 어떤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교회 안에 다른 성도에게 속닥속닥,
이래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의 믿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색욕거리로 바꾸어서
성도의 믿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할렐루야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환난 때문에, 어떤 죄의 유혹 때문에,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교회 밖으로 나가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고 믿음 생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12절 봅시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거룩한 성찬과 애찬에 동참합니다.
성찬이 무엇입니까. 기본 자격이 세례인 아닙니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
이 사람들만 성찬식에 참여하는데 놀랍게도
그 성찬 예식에 참석하는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그 중에는 목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하고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그런 믿음의 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떠냐 하면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오면 비가 내려야 합니다. 과실수가 있으면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나무는 나무인데 열매가 없고 구름은 구름인데 비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으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인데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니고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고 함께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데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확장 일로에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목자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 몇 사람'은 이단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세워 둔 참 믿음, 그것이 2000년이 흐르면서
수없이 가만히 들어온 것들이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교회의 어떤 절박한 상황 때문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화가 돼서 교리로 자리 잡고 교회를 꽉 쥐고 있으면서
믿음을 잘못되게 만드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자에 의해서!
꼭 신천지가 들어오고 해서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 사람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니까 경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라고 사도 유다는 말합니다.
그런 필요를 안 느껴야 되는데 느낀 것입니다.
믿음 생활하는데 구원 얻을 믿음이 타락해 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붓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신앙생활하고 믿음을 가졌는데 왜 멸망당할 사람이 생겨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고 주재 아니십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지 5-7절 말씀을 봅시다.
▲5~7절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이 5-7절은 성경 역사를 쭉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속성 중 대표적인 속성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는데 그 구원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신고와 압제를 돌아보시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얼마나 고통으로 인하여 울부짖었는지,
어떤 분들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이 들었다고 그러니까,
그 울부짖음을 ‘하나님!’ 그랬다고 해석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 울부짖음은 ‘아이고 죽겠네!’ 그것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짜아카’입니다.
얼마나 속에서 그 고통이 컸던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해서 내려와 가지고 그들을 신고와 압제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구원시켜놓고 광야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믿지 않으니까.
정탐을 보낸 후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믿지 않는 정탐꾼들의 말이
이스라엘 회중의 마음을 강타합니다.
믿음의 정탐꾼 두 사람의 말은 그들의 귀에 맴돌다가 떠나버립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한 말이 백성의 마음을 잠식하는 일로 인해서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분노로 진노하셨는지
그 백성을 광야에 엎드려지게 하지 않습니까?
20세 이하의 사람들만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지 않는 사람을 멸할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힘써 지키고 싸워야 합니다.
▲6절에, '천사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 그러는데
천사는 하나님을 가장 근거리에서 모시는 영들 아닙니까?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영들입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돌베개를 하고 벧엘에 누웠는데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존재들인데
이 천사들이 흑암에 가두어지는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라는 구절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대교 전승에 나오는 루시퍼와 천사들의
하나님을 향한 대적 영적 전쟁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되고 경배해야 될 그들이,
자기들이 북극 집회에 좌정하리라는 마음을 품고 자기 지위를 떠났을 때
심판을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집에 있는 그 영광의 주변에 있는 영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흑암에 가두신 것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7절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간음을 행하는 자들 또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여기서 다른 색은 동성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을 행하는 자와 동성애를 행하는 자들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믿는 집안에도 가끔씩 동성애 질병을 앓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다 보니까
그 형벌을 자기 몸에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는 부모 세대나 자기 세대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섬기지
않는 자들 가운데 일어나는 형벌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면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회개하고 주님 앞에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 질병은 치유 가능한 질병인 것입니다.
어떤 형벌을 하나님이 치유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몸은 이렇게 나왔으니 나는 어쩔 수 없다.'고 그걸 고집하고 나가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조상이 잘못을 했든지 내가 잘못을 했든지 회개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치유를 위해서 주님의 손이 내려와서 어루만져 주기를 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동성애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치유 가능한 겁니다.
그것은 의술로 치유되는 게 아닙니다.
상담이나 정신 치유 같은 내적 치유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치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그 마음이 상실하고 부패한 마음이 되어서 그 형벌이 몸으로 나왔으니까
영적 치유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 가지를 싫어하십니다. 특히 구원받은 사람이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한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는 것,
간음을 하고 다른 색을 따라가면서 성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라보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것을 심판할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이해]라는 역작을 남기신 하워드 클락 키이라는 분이
유다서를 이렇게 평했어요.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이 되면,
그것은 영원하며 파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유다가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보인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파기하고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은 사람도 믿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멸망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완곡한 표현인 겁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워야 될 믿음의 본은 무엇일까요?
4절 다시 보겠습니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제가 하려는 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다면 구원받기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겠네.'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리스도인인지 분별이 안 되게 생활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려 할 때 찔림이 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이런 말씀이 살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굉장하잖아요?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보혈이 내게 뿌려질 때
나의 죄는 사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감사 감격해서
'주님께서 나를, 죄의 몸을 멸하시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셨으니
주님 제가 죄악을 버리고 의를 향해 살겠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보고 있는 교회 안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유다서를 읽어야 되고
강단에서 유다서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도 잘못하면
지옥 갈 수 있으니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선포해야 됩니다.
유다서가 신약 성경 정경이 27권인데, 정경으로 확정이 될 때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다서가 정경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다가 결국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정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냐하면 여기 말씀에 보면 이상하게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도 나오고
에녹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게 외경에 있는 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외경. 종교 서적 가운데 세 종류로 나뉘는데,
정경, 외경, 위경입니다. 그래서 정경이 신구약 66권이고
외경은 엄청나게 많고 위경은 그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 외경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유다가 자꾸 인용을 하니까
이것을 넣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교회에서 고민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서가 주는 메시지를 반드시
교회에서 듣게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버린 사람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메시지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은 성령의 목소리를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귀를 닫아 버리는 겁니다.
예레미야서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곡된 구원론, 미혹 때문에 이 모든 가증한 일을 다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고
자기 죄를 행하는 것을 보호하는 방패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은 그런 헛된 방패를 부숴 버립니다.
우리는 진리에 서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맞서 싸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색욕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을 우리는 봐야 됩니다.
그것을 색욕거리로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과의 싸움이
우리가 힘써 싸워야 될 믿음의 도입니다.
▲11절,
또 한 가지 11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무슨 단어가 자주 나옵니까?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세 길이 나옵니다. 첫 번째 가인의 길, 두 번째 발람의 길,
세 번째 말씀에는 길이라는 말이 안 나왔지만 고라의 길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인이 개척한 길이 있는데 이 길은 걸어가지 말아야 되는 길입니다.
발람이 개척한 길이 있는데 그 길도 걸어가선 안 됩니다.
그리고 고라가 개척한 길 역시 걸어가면 안 됩니다.
그 세 길 걸어가면 반드시 멸망당합니다.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창4장을 보면, 가인은 그 해 농사해서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그 표가 바로 농사를 지어서 소산물로 드린 것입니다.
발람은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발람은 하나님과 직통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고라는 어떻습니까? 모세와 아론을 제외한다면 레위 지파 속에서
가장 영화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존귀한 레위 지파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인도 멸망을 했고 발람도 멸망을 했고 고라도 멸망을 했습니다.
왜 믿음을 가진 이 세 사람이 멸망을 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유다서에서는 설명도 안 해놨습니다.
①가인 - 육신적인 시기심
가인은 어떻습니까?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동생은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고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시기가 일어납니다. 독한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인아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런데 가인이 육체에서 일어나는 죄의 소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해버리고, 어느 날 들에서 돌로 쳐서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가인이 개척한 길입니다. 그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못 듣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도 드립니다.
그 속에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런데 이렇게 믿음 생활하면서 주의 음성까지 듣는데
그 음성은 애써 거절하고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은 멸망합니다.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자기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고 이걸 파하고 성령께 복종할 때
그 믿음이 행함 있는 믿음이고 산 믿음입니다.
②발람-물욕으로 멸망
발람은 어떻습니까? 민수기 22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모압 왕이 사신들을 발람의 집에 보냈는데 그 사람들이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셔서 궁금해 가지고
'발람아 너와 함께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발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집에 손님으로 왔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저 사람 뭐 때문에 왔니?'
이렇게 물어볼 정도로 가까운 사람입니다.
모압 왕이 발람에게 왜 사람들을 보냈느냐 하면,
발람이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권(영적 권세)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압 왕이 재물, 부귀, 영화, 장래에 대한 풍족함을 제시하니까
발람이 그걸 따라서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것입니다.
나귀가 그걸 보고 벽에다가 발을 문질러서 상처가 나는데도
고집을 하면서 눈이 멀어 가지고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 부귀영화와 재물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길로 쫓아가는, 어그러진 길로 가는 발람은 결국에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길을 걸어가는 분이 있으시면 빨리 영안이 열리시고
최초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 깨어서 주께서 그 양심 속에 무얼 말씀하시는지 그걸 들어야 됩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재물에 대한 욕심, 어떤 부귀영화 때문에
그걸 쫓아가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자기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③고라 -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멸망
고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제외하고
레위 지파의 족장들을 지휘 통솔할 수 있는 그런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고라의 눈에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여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들 멋대로로 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를 볼 때 그는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니까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은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눈치만 보고 하나님의 뜻만 살피면서 가는데,
고라는 그걸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본 것입니다.
'너나 우리나 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스스로 높이느냐?
우리의 왕이 되려고 하느냐?' 그래서 레위 지파 사람들의 우두머리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족장들 우두머리를 모아서 모세에게 대적했습니다.
영적 권위에 대적한 겁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진짜 미련한 짓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갈라지게 해서 그들을 삼켜버리는데
가족과 추종자들 전부를 삼켜버렸습니다. 멸망당한 겁니다.
고라가 하나님 회중에 들지 못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회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레위 지파로서 특별히 성별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멸망당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권위를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도 거짓 믿음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천국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권위를 업신여긴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는데,
어디가 병들고 어쩌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때로는 있지만,
자기 마음속에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의로움이 없습니다.
천국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권위에 복종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적 권위자들에게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힘써 싸워야 될 믿음의 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의 길, 육체에서 솟아 나오는 정욕, 분노, 시기, 질투,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믿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어도
음성에 복종하지 못하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첫 번째로 분명히 내려져서 가지 말라고 했는데
제시하는 것이 너무나 커 보이니까 어그러진 길로 갔던 발람의 길.
여러분 모두 거부하십시오.
거기다 말뚝을 박고 '출입을 금함' 표지판을 붙여 놓으십시오.
빨리 붙이셔야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철조망을 치고,
그래도 안 되면 거기다가 인분을 끼얹어야 됩니다. 절대로 가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고라의 길. 하나님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충성하다가도
이 못된 것이 일어나 가지고 권위를 업신여기고 목사님에 대해서 폄론하고
교회 중직자들을 폄론하고 교회의 사역을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가복음 4장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 조심하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은 권위를 업신여기고 사역을 불평하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으면,
씨가 잠복해 있다가 어느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라의 길을 걸어가는 악한 영이
믿음 생활 잘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금방 병들고 여러분은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듣는가 삼가 조심하십시오. 귀를 꽉 막고 그런 사람이 전화하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하고 얼른 전화를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 사람과 인간적인 감정이 상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그를 살리는 길입니다.
누군가 동조해 주면 옳은 줄 알고 더 그런 짓을 합니다.
한국 교회에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고라의 길을 걸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16절,
계속해서 16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토합니다. 정욕대로 행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자랑을 하고
자기가 마음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합니다.
왜 그렇게 공교하게 기술로 뭘 만들어서 선물도 잘하는지,
평상시는 사람 취급도 않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면 밥도 잘 사줍니다.
저는 워낙 좋은 교회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잘 안 당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일이 있습니다.
▲18-19절도 봅시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19절의 말씀은 너무나 직선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교회에서 제일 실수가 많은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께서 기뻐하는 일만을 위해서 달음질하기에
때로는 사람을 보고서도 못보고 지나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육신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인사도 안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것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이 '어? 나한테도 그러던데.'
그래가지고 동맹을 맺습니다. 이제 당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토하고 비방하고
그러다 보니 성령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코너에 몰게 되니까 교회 사역이 와해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일하는가를 우리가 봐야 됩니다.
유다가 교회를 바라보니까 이런 모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유다, 사도들이 사역하는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목회하는데 왜 이런 일이 안 발생하겠습니까.
그리고 악한 영이 이런 짓을 한다고 하면 왜 우리를 그냥 놔두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도를 위해서 힘써 싸우셔야 됩니다.
힘써 싸우는 게 샅바잡고 싸우는 것이면 싸우겠는데 그런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왜 불만을 토하는 말은 그렇게 입에 귀에 술술 넘어가는지,
우리 귀가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유다가 하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싸움을 힘써 싸워야 되는데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20-21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첫 번째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두 번째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네 번째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하나씩 설명을 좀 다시 해 보도록 합시다.
①첫째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그냥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시내산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산 위로 올라오게 해서는 돌 판에 십계명 말씀을 기록하고
출애굽기 20-23장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모세보고 그것을 낭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던 삶 이대로 가나안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위에 자기를 새롭게 건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으로 그들을 인도한 겁니다.
그들은 율법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됐지만,
이제 우리는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됩니다.
그 믿음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인데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형태하고 대조가 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믿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려면
교회 역사에 꾸준하게 가만히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잘못되게 뿌려 놓은 교리적 오류들을 깨부숴야 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세워놓았던 진리의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기록된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감 없이 쭉 읽어보니까
교리적 오류들이 교회 안에 상당히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전해 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서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이 전해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교회와 우리가 건축되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②둘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라.
에베소서 6장 18절에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앞에서 말했듯이, 가인이나 발람이나 고라 혹은 다른 색을 쫓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
당을 지어 불만과 불평을 토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본문 19절에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동료가 되지 말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임재 안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면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됩니다.
육신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정욕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적인 필요에 의해서 정욕에 이끌려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내게 뭘 원하시는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뭔지
그래서 하나님의 심장, 하나님의 마음을 갖길 갈망하고
주님의 나라에 유익한 일꾼이 되길 갈망하면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③셋째로,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
가인이나 발람이나 고라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가인이 육체의 분노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제물을 받지는 않으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가인을 사랑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발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방문해서 '누구 왔니? 가면 안 돼.'
그러시는데도 제시하는 유혹 때문에 어그러진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안 지킨 것입니다.
고라!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서 레위 지파 사람이 되게 해서 귀한 성직을 맡겼는데,
그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켜야 되는데 더 탐내는 것입니다.
불평을 말하고 불만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④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거룩한 신부로서 주님 오실 날을 기대하면서 부끄러운 모습들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자기를 단장함으로써 주님을 대망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치는 말
'믿음의 도' 이 믿음은 사실 일반적이고 평범합니다.
어떤 특별한 비결이나 어떤 특별한 노력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와서 우리의 믿음을 변질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가 양모로 된 코트를 입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때 유행이었거든요. 지금이야 옷감이 다양하지만
우리 어렸을 때 다우다 옷이었습니다. 다우다 옷 아세요?
불만 닿으면 구멍이 뚫어져버리는 그것도 처음 나왔고,
양모로 된 코트가 그 당시에 유행하게 됐는데
저의 어머니가 그것을 굉장히 입고 싶어 하셨습니다.
교회 다니고 추운데 그거 입으면 따뜻하다고.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걸 하나 사셨는데 그게 겨울만 입잖아요.
장롱에다 곱게 넣어놨는데 이듬해 겨울이 되어 꺼내서 입으려고 보니까
좀이 다 먹은 겁니다. 그래서 전 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장롱 안에 좀약 냄새가 안 나면 제 아내보고 빨리 좀약 보충하라고 합니다.
멀쩡하게 믿음이 있다가도 좀이 먹어 들어가면 쓸모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자에 대해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된 그 부르심을 바라보면서
성령 안에 행하셔서 여러분의 믿음이 구원받은 믿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금성 목사님 설교 스크랩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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