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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제자의 길 2843

LNCK 2011. 1. 24. 14:54

◈구도 자의 길                     요20:28                  블로그스크랩, 출처

 

'방향'에 관한 훌륭한 묵상입니다.  

 

◑믿는 자 believer가 아니라.. 제자 follower다.


종종 현대의 목회자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회심의 시점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희생양이 아마 도마일 것입니다. 

만일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직접 만져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린 도마하면 떠오르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기점으로   요20:28

그의 신앙을 인정해 주곤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백 이전의 도마는 무엇일까요?  불신앙인? 물론 아니죠.


신앙인과 불신앙인에 대한 현대적 구분

사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팔로워가 되라고 말씀하셨지,

어떤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disciple'로서의 부르심은 있었지만,                    *follower와 같은 의미

교리적 believer로서의 요청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believer가 강조되고, follower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론>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believer로 가득 차고, follower가 드물다면, 그 강조되는 <교회론>을 재고해야 합니다. 


팔로워는 주님을 따르는 여정 가운데, 그 삶이 변화되는 자를 의미합니다. 

팔로워의 믿음은 결코 지나간 자리에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계속되는 삶의 여정의 굽이굽이마다 팔로워의 믿음은 새롭게 자라나고,

꺾이며, 변형 변화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우리가 기피해야 할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바로 진정한 팔로워의 모습, 성장하는 과정의 모습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의 불빛을 밝히는 조명 스위치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켜자마자 바로 불이 밝게 켜지는 light switch와

조명의 밝기를 어둡거나 밝게 조절할 수 있는 dimmer switch입니다.


회심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light switch 라기보다는, 이런 면도 있겠습니다만..

팔로워의 발자국마다 점점 밝혀지는 dimmer switch라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마치 도마의 모습처럼 말이죠.


                                                                                   *관련글  ‘거듭남’ 과 ‘제2의 중생체험’ 

            dimmer switch                                                               거듭남의 의미  

 

 


◑감수성                                                                              출처보기


영적 감수성이 부재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손해를 볼 것 같으면, 피하고, 인연을 끊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득이 될 것 같으면, 줄서고, 어떻게든 한 자리 차지하려 끙끙 대고...

지칠 만도 됐건만,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익 계산서와 비그리스도인의 그것이 전혀 구별이 안 된다면,

우리가 계속 그리스도인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손해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바뀌지 않는 한,

이득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영적 감수성으로 바르게 교정되지 않는 한,

우리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채로,

세상과 끝까지 같은 발자국으로 나아가는 어정쩡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날 밤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이 듣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 조차도 사무엘이 거듭 자신의 잠자리를 방해하자

“귀찮게 말고 꺼져버려!” 라고 말했다면요? 


골리앗을 본 다윗이 다른 이스라엘의 군인들처럼 의기소침해진 채,

‘나는 그저 막내요 목동이야’ 라고 생각하며 왔던 길로 돌아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극적인 요청 앞에

베드로가  “어부가 고기를 잡아야지, 당신 뭐야!” 이렇게 대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 모두 실재 하지 않았던 상황들이었지만,

우리에게 개발되지 않은 감수성들은, 영적 감수성이 무디면

어쩌면 지금 언급한 어처구니없는 모습들처럼 ↑


수많은 하나님의 신호를 놓치고 있고,

수많은 관계성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의 내면세계를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영적인 훈련들의 목적은 단순히 내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함이 아닙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바를 했다라는 자존감을 갖기 위함이 아닙니다. 


영성훈련은 영적 감수성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영성 훈련을 통해 내 안에 오히려 나의 음성이 커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작아지는 것이라면.. 그런 영성훈련은, 아니한 만 못합니다.


영성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보이지 않고,

내 배만 부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영성 훈련은 품질 불량일 것입니다.


결국 그 많은 영성 훈련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의 내면을 향해,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전혀 쓸모가 없는 용도폐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제자 양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