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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야 복음의 제 맛을 안다 2844

LNCK 2011. 1. 24. 19:45

 

◈울어야 복음의 제 맛을 안다            애3:21~24               10.12.30.설교스크랩 및 녹취



◑완전히 진멸된 예루살렘, 이스라엘


예레미야애가는, 예레미야가 지은 슬픈 노래(시)라는 뜻인데,

주전586년,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2년 정도 포위되어 있다가 마침내 함락되면서,

바벨론에 의해 엄청난 살육과, 성전의 불탐과,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던 때

그 처참한 장면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지은 슬픈 노래이다.


▲복음의 역설 paradox

여러분,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리, 기쁜 소식'이란 뜻이다.

그런데 '복음은 울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은  ←설교제목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울음이 서로 역설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에 완전히 패망하고, 완전히 비참하게 무너졌을 때,

인간적 소망, 희망이라곤 바닥의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역설적으로 예레미야는 '이제 소망이 있습니다!'고 노래하고 있다. ↙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3:21


완전히 절망한 거기서, 예레미야는,

이제 소망이 시작되었다며, 역설적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본문 애3장은, 재난도 이런 재난이 없다.

지금 한국의 전역에 구제역 살처분이 내려지고 있는데, 

본문의 상황은,

소와 돼지의 살처분이 아니라, 사람이 그만큼 살처분 되고 있었다.


2년이나 예루살렘을 포위를 하고 있던 바벨론은, 그 저항에 독이 오를 대로 올랐고,

그래서 정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진멸을 단행하는데,

그 바벨론을 통한, 냉혹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 이스라엘은 깡그리 망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애가를 부르고 있다.

이 눈물의 애가,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의 애가가 1:1절부터 3:18절까지 나오지만,

애가3:1~18절까지만 드문드문 읽어보면,


1절,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절,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고,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이방인들이 그 성소에 그들이 (훼파하러)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절,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매 구절마다 기가 막히도록 참담하다.

더욱이 예레미야는 지금 이 애가를 노래하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더욱 슬픈 일이다.



◑극적 반전


그런데 이 슬픔의 애가가 이상하게 은근슬쩍, 혹은 극적으로

3:19절부터 희망의 복음으로 바뀌고 있다.


3:18절까지는, 복음과 전혀 반대의 심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3:19절부터, 심판이야기와 반대되는, 복음 이야기가 나온다.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이것'은.. 앞서 3:18절까지 열거한 여러 고초와 재난들이다.


즉, 고초와 재난을 자기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깊이 묵상해 보았더니)

완전히 망하고, 깡그리 죽어버린 것과 같은 재난이다.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나에게 소망이 되었다고 말한다.


재난, 고초, 완전한 멸망을 자기 마음에 담아 두었는데, 그게 소망이 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는 정반대로 말한다.

긍정의 마음을 가져라. 바라봄의 법칙을 가져라. 마음에 꿈과 비전을 가져라.

그러면 미래에 소망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가르치는데,


예루살렘이 깡그리 망해버린 재난.. 너무 잔인해서 입에 담을 수조차 없다.

죽임당하고, 멸망당하고, 칼에 베이고, 이 참혹한 현실

그것을 마음속에 담고 곱씹게 되었는데..,


이게 소망으로 바뀌고,

하나님을 기업을 바라게 된다는 복음적 고백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유가 뭔가?

완전히 망한 재난을 당할 때.. 오히려 소망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복음은 완전히 내 것이 된다.


우리의 젊은 자식들이 다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고,

아이들이 길거리에 던져지고, 이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억하면서, 소망을 갖게 되는가?


그렇다.

완전히 망해야.. 정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인데..

더 자세히 설명하면..


내 마음에서 붙잡고 있던 게 가정, 목회, 사업, 내 명예..

이런 것들이 깡그리 먼저 망해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에 대해 내가 완전히 죽고, 완전히 바닥을 쳐야(찍어야) 한다.


바로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에 여호와 하나님을 입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그때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그리 절실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먼 거리의 관계였다.


나와 여호와의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들이 있었다.

나와 하나님 중간에,

사업, 내 명예, 내 자녀들이 끼어들어와 있었다.


그러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가, 그렇게 절실하게 가깝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와 가까운 것들은, 내 사업, 명예, 자녀이었다.


그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와 하나님의 중간(사이)에 있던 것(우상)들

즉 내 사업, 내 명예, 내 자녀들을.. 그저 잘 되고, 복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셨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더 얻고자,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식의 관계였다.)


▲그러다가 망하는 순간이 온다. (물론 안 망하면 좋지만, 망해도 소망이 있다. 3:21)

그러나 내 마음이 갖고 있던 것들을,

이제 바랄래야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망해버리고, 다 없어져 버렸다.


막 엉엉 울고, 콧물 눈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도록, 다 잃었다.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셨다. 나는 아무 것도 없다. 재난만 가득 차 있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망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원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에.. 은혜의 웃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한 것이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맛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데,

재난과 고초로 고통가운데 울부짖던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기운이 비로소 실감나게 느껴지는데,


그 자비와 긍휼하심이, 이것은 잠깐 순간에 끝날 자비와 긍휼이 아니라,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마음에 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여호와만 바라리이다!


▲이제 나는 여호와만을 바라리이다.  :24b


그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했지만,

내 마음에 갖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가정이 잘 되어야 되겠고,

자녀가 잘 되어야 되겠고,

사업이 잘 되어야 되겠고,

목회가 잘 되어야 되겠고,

몸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야 되겠다. 등등

 

그렇게 마음에 붙잡고 있던 것들이 많으니까,

하나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가 없고,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망해 버려서,

내 마음이 붙잡을 것이 지푸라기 하나도 없으니까,

마음에 남은 것은 상실, 재난, 고초뿐인데


그런데 그 고초를 내가 당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제대로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하나님)를 바라리라 :24 


만약 이러한 재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가장 소중히 바라보던 것(내 우상)은 가정, 내 사업, 내 명예 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제대로 바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내게 절실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애가3장과 같은 고난의 풀무를 한 번 통과하고 나면,

사람의 고백이 바뀐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24  (욥42:5절의 고백이 바로 같은 고백이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24a

이전에는 내가 돈 많이 벌기를 먼저 바랬다.

가정생활이 멋지기를 먼저 바랬다.

그 외도 많은 바램이 있었다.


이후에는 다 버리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여호와의 기업만.. 최우선으로 바라게 된다.

돈도 아니고, 가정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만 최우선으로 바라게 된다.


그것이 불시험을 통과하고, 믿음이 99.9%의 순도의 정금으로 단련된 사람이다.

거기서 오히려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 원 참!)


다 없어지고서야 하나님 맛을 알게 되고,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이 진심으로 나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내가 자기 마음에 말한다.

'내 마음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요, 내가 오직 여호와을 바라리라!' 3:24


이제 내가 하나님만 바란다.

돈 안 바란다. 성공 안 바란다. 명예 안 바란다.

내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한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게 된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 마음에 소망을 갖게 된다.

절대 소망은, 절대 절망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적 고백인 것이다.


이것은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전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이 은혜를 받으면, 평생 이 은혜로 살게 된다.

이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이다.


▲애가 3장은 십자가 사건의 예표

구약의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한 것과 똑같은 것이

신약에서 똑같이 일어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깡그리 망하신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깡그리 망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각자 연구, 체험해 봅시다.)

그때 오히려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소망이란.. 하나님만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돈, 성공, 명예가 아니라!


▲마치는 말

오늘 나는 꿈과 비전,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망을 갖고 있는가? (이건 복음이 아니다.)

아니면 완전히 십자가에서 죽고, 오히려 생긴 복음적 소망을 갖고 사는가? (이것이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중간 중간에 감옥에 가면서 또는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경험을 일생에 되풀이 했다.

그러면서 잊어버릴 만하면.. 또 오히려 새롭게 '소망'을 갖게 되고, 그랬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 모두가 뒤따라갈 길을, 앞서 가는 선구자로서,

우리보다 더 많은 고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반드시 있다.↙



................................... 쉬어가는 곳 ................................



◑말린 미역 에피소드


▲2009년엔가 TV에서 방영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떤 자취하는 대학생이, 배가 고파서 간식이 먹고 싶은 가운데,

시골에서 어머니가 보내주신 말린 미역을,

오징어나 쥐포 먹듯이 조금씩 뜯어 먹었다고 한다.


무슨 TV를 보는 중에 아무 생각 없이 먹어서 그런지, 제법 많이 먹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에 자는데, 그의 위장 속에서 미역이 탱탱 불어버린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해냈다.

몇 차례 구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진전이 없었다.

결국 119구급차를 불러서, 그 밤에,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TV방송 프로에서, '진짜 그럴까?' 하며 '실험맨'을 통해서 실험해 보았다.

말린 미역 75그램을 물에 불리면, 물을 흡수하여 15배나 더 큰

1,150그램으로 불어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린 미역을, 2~3백그램 먹었다면

그게 위장에서 15배로 불어나면 3~4.5kg이 되니까.. 충분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또 마른 미역을 먹으면, 입이 짜니까, 물을 계속 마시면서 먹었을 것이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힌트를 얻었다.

'십자가는 말린 미역이다'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겉보기에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게 풀어지기만 하면, (보통 시간이 걸린다.)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붙들고 살면,

마른 미역처럼.. 바짝 말라서, 아무 쓸데가 없는 것처럼, 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거기서 생명의 역사가 반드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일례로,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니다.

바울이 방문해서, 전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다.


골로새 교회는, (아마도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에바브라가 바울로부터 말씀과 복음을 배운 이후에

자기 고향? 골로새에 돌아가서 직접 세운 교회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 ...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사도바울은, 내가 세우고, 타인이 세우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래서 골로새교회에도, 똑같이 서신(골로새서)을 써서 보냈다.

나 같으면, 내가 세운 곳이 아니라서, 편지를 안 보낼 수도 있겠다.


(표현이 죄송하지만) 바울의 역사는, '마른 미역'과 같았다.

자기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에바브라 같은 자기 제자를 통해서든지,

그의 복음전파 사역은, 미역이 불듯이, 자꾸 자꾸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말라 죽은 것 같지만, 반드시 살아서 역사하는 복음의 생명력 때문이다.

 

바울은 애가3장과 같이, 그의 일생에 종종 십자가를 지고 완전히 망하는 가운데..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서 애3:21

계속적으로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기업만 바라는 사역을 애3:24

계속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