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소개하신 엄친아 - 레갑자손 렘35:5~14 10.12.02.설교녹취
바쁘신 분, 또는 성경 배경을 잘 모르시는 분은, 아래 단락을 꼭 읽어보세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축복은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폭탄도 된다. (맨 마지막에 나옴)
◑전혀 부럽지 않은 엄친아, 레갑 족속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소개하시는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는
레갑 자손이다. '요나답의 후손'과 같은 말이다. (레갑의 아들이 요나답)
보통 엄친아는.. 나와 비교되는 부러운 사람이다. 공부도 잘 하고, 돈도 잘 버는..
그런데 본문의 하늘 아버지가 소개해 주시는 엄친아(레갑 자손)는 전혀 부럽지가 않는데...
▲본문 렘35장 설명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의 한 방에 레갑 족속을 초청해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하셨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그 방에 불러다가
포도주가 가득 든 잔을 마시라고 권했다. (손님을 대접하는 이스라엘 풍습이다.)
그랬더니 이 레갑 자손들은 그 포도주 마시기를 거부했다.
'우리 레갑족속의 조상 요나답이, 250년 전에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으므로,
우리 후손들은 지난 250년 동안, 그 누구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또한 조상 요나답이 명한 대로, 우리는 집도 짓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장막에서 생활하라고 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은, 지난 250년 동안, 그 요나납의 명령에 충실하게 생활해 오고 있다. :5~10
바로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너는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
저 레갑 족속, 즉 요나단의 자손들은, ('레갑 족속'='요나단의 후손'은 같은 말)
조상 요나답이 말한 명령도 250년 동안 충실하게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너희 이스라엘 자손은 뭐냐?
사람이 아니라, 천지를 지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너희를 출애굽시킨, 너희의 여호와로서 너희에게 명령한 것들이 있는데, (↔사람)
너희들은 어떻게 나를 그렇게 불순종하느냐?' :12~16
이방인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영입된 레갑 족속들과, 너희는 너무 비교되는구나!
(그래서 레갑족속은 '엄친아, 모범생'이라는 것이다.)
▲엄친아인 레갑 족속이, 우리에게 전혀 부럽지 않는 이유 (원래 엄친아는 부러워야 정상인데)
레갑 족속의 족장 요나단이, 그 후손들에게 명령한 것들은..
-집을 짓지 마라, 대신에 장막 생활을 해라,
-농사를 짓지 마라, 밭을 가지지 마라,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아예 포도농사도 짓지 말아라.
이것은 그냥 '가화만사성' 같은 가훈이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그저 덕담이 아니다.
집을 짓지 말고, 농사도 짓지 말고, 장막에서만 생활하고,
포도농사를 짓지 말라는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절대로 잘 살기를 거부하라는 이야기다.
잘 사는 것과는 반대편으로 가라는 이야기다. 마치 거창고의 직업선택 10계명처럼!
그러니까 우리가 전혀 레갑족속이 부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모범생의 모델로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잘 살기를 거부하라'는 조상의 가훈을 충실히 지키고 사는 사람들은..
부러워서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
좀 극단적이고 정신이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대단한 신학이 있었던 요나답 *요나답은 본문보다 250년 전 레갑 족속의 족장
어느 조상이 자기 후손들에게
'너는 절대로 잘 살는 방향으로 살지 말고,
못 사는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그리로만 나아가라'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요나답이 그렇게 유언했던 이유는,
그에게 대단한 신학이 있었기 때문인데.. 설명하면..
▲요나답은 예후 왕 시절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북왕국에서 아합의 집안(오므리 왕조)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일을 예후 장군에게 맡기셨다.
그러니까 아합 왕 때, 왕비 이세벨에 의해서
북이스라엘 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만연했다.
온 나라가 그 종교적인 바알 숭배의 예식에서 행해지는,
성적인 혼잡스러움이 범람하고, 여호와 신앙에 대한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때 예후가 일어나서, 아합의 아들 여호람 왕과
아합 가문을 왕자들까지 완전히 진멸시킨다.
그때 예후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바알 선지자들을 전국에서 불러
한 자리에 초대해서, 다 죽여버린 일이었다. 왕하10장
이때 이 바알우상 대숙청작업을 시작할 때,
예후가 도움을 청하게 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다. 왕하10:15~16, 23.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
예후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하면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자기 전차에 동승시켜서,
바알 선지자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선다. 주1)
▲아래 단락은, 본문에 그 성경적 근거가 명확하게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행간을 읽을 때.. 충분히 그러했으리라고 짐작되는 대목이다.
설교자의 상상이 가미된 해석이지만, 그런데 맞는 것 같다.
예레미야보다 250년 전에 살았던 요나답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그 후손들에게 유언한 내용을 근거로,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선민이 바알을 숭배할 수밖에 없고,
왜 바알 숭배에 이렇게 강하게 매료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요나답이 그 연구를 한 결과,
선민이 점령해 들어가서 살았던 가나안 땅은 농경사회가 주업이었고 ↔유목업
바알은 바로 그 농경사회의 주신main god 이었다.
농경사회라는 것은 풍요와 다산이 중요한 덕목이요, 가치였다.
그러므로 그 농경 사회에 소속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바알 숭배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바로 그 농경사회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이방인의 삶의 스타일 이었다.
그래서 요나답의 판단은,
바알숭배를 거부하려면, 그 근본원인인 농경사회를 등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도 짓지 말고, 포도농사 짓지 말고, 장막 생활을 하라는 것은,
농경사회로 살지 말고, 철저히 유목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먼 조상 호밥 때, 겐 족속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선민이, 그 출애굽의 대단한 기적의 역사들을 경험하고,
그토록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해 들어온 선민이,
무엇 때문에 바알 숭배에 그렇게 빠져서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요나답이 연구한 결과..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하고, 집을 짓고, 성을 짓고 한 생활 속에서는
풍요와 다산, 부요함을 원하지 않을 수 없고,
그걸 원하고 있는 한, 바알 숭배처럼 매력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요나답은, 자기 후손들에게 말한다.
'집짓지 말라. 정착하지 말라, 농사짓지 말라'
바알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십계명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계명을 외운다고 되지 않고,
너희의 삶 자체가, 풍요와 다산을 원하는 그 농경문화의 뿌리를 근절시켜야 된다..
이렇게 보면, 요나답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상당한 신학적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론, 자기 족속의 유목 전통을 버리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었겠다.)
▲어쨌든 하나님은, 레갑 족속의 이런 열심을 인정해 주셨다.
이런 영적인 거장인 요나답이, 사회적으로 크게 명망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요나답의 자손들은, 예레미야 당시까지, 그저 250년 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래서 원래 그들은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했지만,
바벨론 침공을 피해서,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피난 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11
단지 하나님만.. 그들의 충성심을 지켜보고 계셨다.
지난 250년 동안,
조상 요나답이 제정해준 그 집안의 가훈을 대대로 지켜가는
그 놀라운 충성스러운 레갑의 자손들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 비교된다.)
하나님만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런 레갑 족속의 삶만, 유일한 모델로 강조하지 않는다.
구약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면..
그 백성들이 땅에서 잘 되고, 부요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 모두가, 레갑 족속처럼,
집도 짓지 말고, 포도농사도 하지 말고, 장막에 거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열매를 풍성하게 따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라고 명령하고 있다.
◑축복이란 딜레마, 그 해결책
▲축복이란 딜레마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네가 건축하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주시고,
네가 채우지 않은 물건이 가득한 집을 주시고,
네가 파지 않은 우물을 주시고,
네가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 열매를 배불리 먹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나단의 후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극단적인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들이 조상의 유언을 잘 따른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축복이 딜레마'라는 말은,
하나님은 한편으로, 자녀들에게 한없이 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아름다운 집과, 우물과, 열매들을 풍성히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걱정, 모세의 걱정, 요나답의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축복된 땅에 들어가서 축복을 누리다가.. 타락해서..
속히 망한다는 것이다. *관련글 아름다운, 속히 (강추)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신4:25~26
▲축복의 양면성, 그 딜레마를 조심했던 요나답
그래서 요나답은, 자기 후손들에게, 아예 축복을 거부하라고 유언했는데..
그 폭발할 위험성 때문이었다.
자기가 예후의 바알숙청작업 때,
바알 우상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완전히 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로 가기 쉬운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배가 부르게 되면, 반드시 여호와를 배반하고,
풍요와 부요와 쾌락의 우상(바알)을 쫓아가게 될 터인데..,
이런 인간의 본성을 알았기에, 모세는 신명기에서 거듭 거듭 주의를 주었고,
요나답은, 그 후손이 풍요와 쾌락을 쫓아가는 한, 바알 숭배를 피할 길이 없다면,
차라리 풍요와 쾌락을 버리고, 농경사회에서 빠져나올 것을 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비록 삶이 답답했겠지만,
집도 없이 광야의 장막에 거하면서, 포도주도 안 마시면서, 농사도 짓지 않고 살았다.
아마 유목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알 우상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축복은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폭탄도 된다.
이것이 축복의 양면성이요, 딜레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설교의 주제
어떻게 이 딜레마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축복과, 물질과, 기업을 주신다.
그러면 그것들에 푹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기업에 대해서.. 도리어 내가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시고, 나는 거부하고.. 이런 시스템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주시고, 나는 넙죽넙죽 다 취하고, 받아 누리고 하다가.. 폭탄이 터진다.
가나안 땅에서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마음을 붙였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걸 축복과 기업으로 주시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눈을 떼고, 하나님께 눈을 고정했어야 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다.
그러면 이삭에 마음을 붙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망할 뻔했다.
그러다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면서, 자기 마음에서 이삭을 떼어냈다.
그러면서 그는 믿음의 족장으로 승리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면, 그 주시는 모든 것들 앞에서
나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시고, 나는 거부하고.. 이런 시스템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도리어 바치는 시스템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히11:10절에 아브라함은 영원한 도성, 본향을 사모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거기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 신앙이다.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세상을 주신다. 기업과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님은 주시고, 나는 거부하는.. 이런 시스템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축복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레갑 족속처럼 살든지...
.......................
주1) ▲요나답의 동기는 순수했다.
언뜻 보면, 요나답이, 예후가 쿠데타로 새 왕이 될 것을 마음에 확신하면서
정치적으로 한 자리 얻으려고, 예후의 숙청에 참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요나답은, 야곱의 12지파 출신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인맥이나, 지연이 없으니까..
예후의 초청은, 자기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유언으로 보나,
그 후손들이 그 유언을 철저히 지킨 것으로 보나,
레갑은 오직 순수한 신앙심으로 그 바알숙청사업에 동참한 것이지,
다른 뜻(한 자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물질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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