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선행 둘 다 보기 엡2:1~10 10.12.05.설교녹취
기독교 신앙에서 선행을 무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것은 엡2:8~9절만 강조하고, 2:10절은 무시한 결과이다.
엡2:8절(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는,
2:10절(선행을 행하기 위하여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엡2:8절은, 2:10절과 동시에 강조되어져야 한다.
엡2:10절은, 성도는 선한 일들을 행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말한다.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2:10a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수단, 방편..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목적
자세히 살펴보면..
◑2:8절,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은혜는.. 너무 많이 들어서 다시 설명할 필요 없지만, 약술하면,
은혜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진노를 받고, 우리 대신 순종하시고,
우리 대신 불순종의 모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예수님이 친히 당신의 순종과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의와, 거룩과, 구원을 우리에게 값없이 공짜로 나눠주기 때문에.. 은혜이다.
받는 입장에서는 공짜고, 은혜이지만,
주는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전 인격, 전 능력, 희생, 형벌이 다 투자되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이 은혜를 설명하면서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엡2:8, 9절에서 2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8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9
이렇게 2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은혜가 풍성하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온다.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1:6,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시작도 은혜고, 과정도 은혜고, 끝도 은혜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전하고 찬양하게 되어있다. ↙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은혜)까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주 잘 가르쳐 왔다.
우리 어릴 적에 교회 다닐 때
♬돈 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 찬송을 아마 수 백 번 이상 불렀을 것이다.
선행으로도 안 되고, 착해도 안 되고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도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행위는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순전히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맞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특별히 2:10절에서는, 2번에 걸쳐서 강조해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1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번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신 목적이
선한 일들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새롭게 지으셨다는 것이다.
선행을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새로 지음 받은 존재가..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게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 받은 후에,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수학공식으로 설명하면,
은혜+믿음-행함=구원 이 아니라,
은혜+믿음=구원+행함 이라는 뜻이다.
계속 살펴보면..
◑2:10절, 성도는 선을 행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가 가르쳐야 할 부분은, 엡2:10절이다.
그것은, 성도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행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엡2:10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는, 자연스레 그렇게 선행을 행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선, 선행, 선한 일들을 행하기 위해, 새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
구원의 은혜를 입기 전에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는,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죄가 주인이 되고, 탐욕이 주인이 되고, 욕심이 주인이 되고,
그 배후에 사탄이 역사할 때는,
우리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한 번은 몰라도, 지속적으로 선과 의를 행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면이 변화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말씀이 엡4:23~24절에,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주1)
▲선행, 선을 행함 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선행’이라고 할 때, 구제한 일, 남을 도와준 일만 생각하는데,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뜻과 마음에 일치한 모든 일이 다 ‘선한 일’이다.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구분을 위해서 재차 말씀드린다.
나는 선행으로 수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선행을 위해서 목적으로 구원 받았다.
절대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선행을 하기 위해서 구원 받는 것이다.
선행 가운데 살아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셨다.
2:10, 우리가 그(선행)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아래와 대비된다.
2:2, 너희가 그(죄악) 가운데서 행하여..
구원 받기 이전에는 .. 죄악 가운데서 행하다가,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으니까..
구원 받은 이후에는 .. 선행 가운데서 행하며 살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이고,
그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가운데서
자연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선을 거스려 사는 것이 우리의 삶과 행동이었다. 이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선한 일 가운데 행하게 되었다.. 라는 사실이 엡2:1~10절의 주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에도, 선한 일(선행) 따위는 별 필요 없다.
죄 지으면 회개하면 되고..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엡2:1~10절 전체 내용에서, 일부만 믿고 있는.. 명백한 잘못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이렇게 절반만 가르쳤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운 이유는, 본문에서 2:1절, 8절. 9절 등
몇 구절만 빼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보고,
특별히 2:10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단지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을 하며 살도록.. 구원했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세 번, 네 번 재차 반복해서 죄송하지만,
우리가 과거에 잘못 배운 것을 고치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배웠으면..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남았을 터인데..)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러니까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여기부터는 잘못이다.)
→성도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구원받았다.
또한 죄를 짓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까짓것 또 회개하면 되니까)
이것이 다 ‘은혜’만 강조하고, ‘선행’을 무시한 부작용이다.
→아니다. 성도는 죄가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도록 구원받았다.
그리고 죄의 결과와 죄의 열매가 너무 비참하고.. 구원도 완성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극단적 잘못된 신앙의 행태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성경의 구절들만 찾아내어서, 편식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체적 메시지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에 대해서는 100% 잘 가르쳤는데,
신자가 선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원받았고,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고, 선행은 믿음의 표현이고,
선행을 행하는 것은, 또한 의와 거룩을 행하는 것이, 엡4:23
구원받는 백성에게 마땅한 삶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데 인색해 왔다.
▲선행을 강조하면 이단?
또 그렇게 선행을 가르치는 것에 소극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누가 선행을 성경적으로 구원의 열매, 결과로써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단이라고 오히려 닦달했던 것이다.
누가 가르치고 싶어도, ‘이단’ 정죄 받는 것이 두려워서..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 때문에
나를 새롭게 지으셨는데,
새롭게 지음 받은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며 살 자다.. 라는 인식을
성도는 날마다 새롭게 해야 될 것이다.
▲세상에 어떤 물건도 용도 없이 만들어진 물건은 없다.
자동차는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전깃불은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고,
신발은 신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사람이 만든 모든 물건은, 그 사용목적이 있듯이,
하나님이 사물을 만드시고, 또한 타락했던 우리를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려내신 것은..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셨다.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마냥 좋아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2:10a
창1장에 하나님이 ‘만들다, 창조하다’란 단어가 나오는데,
본문에도 ‘만들다 창조하다’란 단어가 나온다. 바로 ‘포이에마.. 만드신바라’이다.
이 ‘포이에마’에서 poem(시) poet(시인)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되, 시를 쓰시듯이 아주 걸작품으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뭐 하러, 무슨 목적으로 걸작품으로 만드셨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창조하신)’ 것이다.
망가진 작품이 새롭게 만들어졌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의 목적은,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아담,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 때,
그들로 하여금 살기를 원했던,
하나님이 디자인하고 계획하신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작품으로 만드신 것이오니,
만드신 목적대로 선을 행하는 삶
하나님의 소원을 그대로 이루어드리는 삶,
그것을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 것이다.
그저 마음으로, 지적고백으로 예수는 구주임을 내 입술로 고백하고,
자기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값싼 은혜요, 값싼 구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구원받았고, 과거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구원 받고 있고, 현재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나의 구원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미래
...........................
주1)
똑같은 말씀이 엡4:23~24절에, 다시 한 번 강조된다.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의, 진리, 거룩함’.. 이 세 단어는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만드셨을 때,
아담에게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살 수 없었던 삶(의, 진리,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아담으로서! 새로운 은혜와 은총을 입은 존재로서
우리는 이제 선을 행할 수 있고, 선을 행해야 되고,
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선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선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할 것은, 선행을 위해서, 선한 일들을 위해서, 새롭게 지음(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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