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귀 맞은 영혼, 뭘 그 정도 가지고.. 렘 38:1-28 10.12.07.설교스크랩, 출처보기
▲주제 요약
나에 대한 사람들의 비방, 공격으로.. 내가 상처를 심하게 입는다면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신 모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항복하고,
자기 모습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저주 받고, 수치스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도 있지만..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십자가의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상처 받기 쉬운 인간성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자인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쓴 책인데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을 기초로 한 치료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모두가 다 쉽게 체험하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을 다룹니다.
저자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욕구나 상처받은 경험을 찾아내어 해소시킴으로써
그 상처를 극복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 속에서도.. 우리는 상처를 입게 되고..
또 의도적인 비난이나 따돌림 그리고 무의식적인 무시를 당하거나
하여간 의도적이건/비의도적이건.. 의식적이건/무의식적이건..
수시로 우리의 마음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자기 자존감이 건드려졌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존감.. 다시 말해서 내가 존중히 여김을 받기 원하는데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비난을 당할 때..
그 자존감이 건드려지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데..
우리의 마음이 따귀를 맞는 것으로 비유적 표현을 썼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모욕적이고 굴욕적이라는 뜻이지요.
▲이 책의 근본적 방향이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는, 상처를 받는 사람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이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자꾸 상처를 입고
아니면 나르시시즘 narcissism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상대방에 의해서 충족되지 않을 때
그때 상처를 입는다고 하면서.. 결국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그것은 배우자도 될 수 있고, 자식과 부모지간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고,
회사 동료도 될 수 있는데..
상처라는 게 보통 가까운 사람에게 입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을 리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인문학적인 접근법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따귀 맞음)에 대해, 성경적인 접근법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렘38장 설명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치시는 뺨을 순순히 맞아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멸망을 자꾸 예언합니다.
그러니까 살 길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데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태도는, 얼핏 보면 매국노와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결사항전 하는 것이 애국 아닙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치시는 매를 순순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서 따귀를 치시면.. 그것을 순순히 맞아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남유다의 패망을 작정하셨습니다.
회개도.. 그럴 기회가 이미 다 지나갔습니다. 기회 있을 때 했어야죠.
이제는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가장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뺨 맞기’를 두려워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항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19절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이미 바벨론에게 앞서 항복한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염려하건대 갈대안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 19b
시드기야가 항복하면, 이제 왕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같은 유다인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해코지 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20)
시드기야의 마음엔, 항복을 하든/안 하든 여전히 왕관을 쓴 ‘왕의 모습’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항복해서
바벨론 사람들이나, 바벨론의 유대인들이 자기를 굴욕적으로 대할 때
그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있던 자기 이미지가 다 망가진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게 마음에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염려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지금 '따귀 맞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렘38:2절에,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칼에 찔려 죽든지, 굶어 죽든지, 전염병에 걸려 죽든지..
결국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너무 무자비하고, 자비가 없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 눈에 비춰집니다.
아닙니다. 원래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그런 모습입니다.
완전히 멸망당하고, 죽어서 진멸되어야 마땅한.. 그런 모습입니다.
또한 이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나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입니다.
비참하고, 흉측하고, 수치스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셔서 그렇지..
우리가 원래 당해야 마땅하고, 받아들여야 마땅한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런 비참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따귀 맞는 일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생가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신앙입니다.
내 마음상태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 받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성숙한 신앙인은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상처는 다 받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마음의 따귀를 맞을 때.. 대처를 잘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들이 왜 그렇게 생얼을 두려워합니까? *생얼 :화장 안 한 생 얼굴
여자 연예인들은, 화장하지 않은 자기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는 것을 두려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난리가 납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수련회 같은데 가서 보면, 그 바쁜 와중에, 여집사님들은 화장하느라 분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이미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의 화장 안한 얼굴(생얼)을 보고
그 이미지가 다 망가질까봐.. 이게 마음의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뺨을 맞게 될까봐, 미리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자기 이미지가 무너져 내릴까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요즘 인터넷 사회로 인해서,
나의 추악한 모습이 만 천하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내 이미지가 무너져 내릴 때
그 아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중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내 이미지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꾸느냐’ 하는 것에
다 들어가고 있습니다.
▲방어기재가 발동해서,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사람들이 쉽게, 남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그 말을 무시해버리면 됩니다.
그 사람에게 ‘따귀 맞지’ 않으려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면 됩니다.
“네까짓 게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가 눈이나 꿈쩍 할 것 같애?”
이렇게 말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의 말을 철썩 같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책에서는 그 반대의 성향을 ‘내사’라고 합니다.
타인의 확신을, 자기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너희를 보고 있는 너희들의 모습,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너희들의 이미지를..
남유다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항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공격하는 것임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그렇게 본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방어기재가 발동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빠뜨립니다. 방어기재의 발동입니다.
▲예레미야는 구원의 길을 어떻게 제시합니까?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고 있는, 그 하나님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를
항복하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만 너희의 모습, 너희가 스스로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 쓰는 것을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칼에, 기근에, 전염병에 죽고, 불사름을 당해서 죽어야 마땅할 정도로
추악하고 부패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유다인들은.. 그것을 싫다 합니다.
▲여러분, 이 예레미야서의 내용이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앞서서 모형적으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남유다인이고,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입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오늘날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바벨론을 통해 남유다를 공격하십니까?
즉, 하나님께서 왜 나를 공격하십니까? (공격당하도록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상
내가 이렇게 공격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예레미야서는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유다 백성들보다 나은 게 있습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들입니다.
날마다 죄를 지어서, 마귀가 그 죄를 통해, 나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근과, 칼과, 전염병을 당해 죽는 것이.. 마땅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그리고 내게로 향한 저주를 다 예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내게 향한 저주가 다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믿음은..
저주받아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찢기고 찔려서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신
‘그 모습이 나’라는 것을 이제 항복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너무 멋진 모습만 기대합니다.
사업하면.. 멋진 사업가가 되려고 합니다.
결혼하면.. 멋진 남편, 멋진 아내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멋진 이웃, 멋진 교수되려고 하고,
교사가 되어도,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냥 목회 하면 되고, 그냥 교수 하면 되는데..
특별히 멋진 목사 되고 싶어 하고, 특별히 멋진 박사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먼저 항복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온갖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저주와 경멸을 다 받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니까..
이제 항복하고 받아들여라 하십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지 말고,
네 모습을 아름답게 유지하려고 얼굴에 떡칠을 하면서 화장하지 말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인정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지지리 궁상 떨며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멋지게 꾸미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식, 외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인정하고, 그저 겸허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든/안 하든, 인기가 있건/없건..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래 십자가에 달린, 추하고 흉한 모습인데..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이만큼 새사람이 되어서 감사한 일입니다만,
내가 예수님 같은 성자인체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처, 뺨 맞기, 비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갖 저주를 다 받고 매달려 죽으신 모습이
그게 바로 마땅한 내 모습이라는 것을
부하직원들 앞에서조차도 인정하고
자식들 앞에서도 그 모습을 인정하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멋진 모습이 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드기야처럼 백성들에게 비치는 자기 모습이 망가질까봐 두려워서
항복 못하는 이런 불신앙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신 그 모습,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저주가 다 몰린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을
내 마음이 실제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갈 때 누가 나를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따귀' 정도가 내게 상처가 되겠습니까?
▲오늘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2절「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내가 전염병에, 기근에, 칼에.. 공격을 당해서
이 세상에서 멸절됨이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생각의 이미지 앞에 항복하고 받아들일 때
구원이 있습니다.
나를 자꾸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 하나님. 내 인생의 비전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인생으로 꾸미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꿈을 갖고, 멋진 인생, 실패가 없는 인생, 좌절이 없는 인생..
이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렇게 처참한 모든 저주가 다 퍼부어진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거기에 구원이 있고, 쉼이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쉼과 안식이 주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일이 시작합니다.내가 이 땅에 대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자니까
자식 앞에서, 아내 앞에서, 교인들 앞에서
더 이상 나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나를 멋지게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내가 뭔가 성취해서 이 세상에서 업적을 남길 사람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끝이 났습니다. 항복하고 그 모습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렇게 항복하고 인정할 때, 내가 죽었으니까..
나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성령님의 역사요, 예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창조적인 열매들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면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따귀 맞을 때’ 이렇게 대처한다고 합니다.
내가 맞은 따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자체로부터 온 것인가?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따귀요, 하나님이 나를 그를 통해 치셨다고 생각하면..
내가 회개하며,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안이요..
만약 그 사람이 자기 스스로 나에게 따귀를 때렸다고 할 경우에는..
공의의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므로..
마음 편하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줘야죠...
그리고 나도 함부로 남의 '따귀를 때리지' 맙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명하실 때만.. 남의 '따귀'를 때립시다. *비판, 지적,
그래야 후환이 없습니다. 그때는 후환을 하나님이 막아 주실 것입니다. ▣ 내적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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