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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2859

LNCK 2011. 2. 3. 23:23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렘42:1~22           10.12.13.설교스크랩, 출처



▲도입 /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Good is the enemy of Great!

어떻게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겠습니까?


이 말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Good to Great> 라는 책에서,

저자인 경영자문가 짐 콜린스가 강조했는데, 세계적으로 기업경영의 구루(스승)로 통하는 석학입니다.

책 내용을 잠시 인용해 봅니다.


위대한 학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학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부가 없는 것은 대개가 좋은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에 도달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좋은 삶에 쉽게 정착하기 때문이다.

회사 대부분이 결코 위대해질 수 없는 정확한 원인은, 아주 좋은 회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은 것good이 위대한 것great을 막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미나 중에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꼭 위대해져야 됩니까? 평범하게 이 상태로 좋으면 되는 거지요.”


이때 짐 콜린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위대해진다고 하는 게, 좋은 것을 유지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특별이 더 어려울 것도 없는데

굳이 좋은 상태에 머물러 위대한 것을 거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물론 위대한 기업의 기준이 뭐냐하는 것일 겁니다.

어떤 기업을 연구할 때, 기업이 갑자기 수익률이 높아진 전환점을 찾습니다.

그 기업이 주식시장의 평균 성장비율보다 3배 이상의 수익률을 냈으면

위대한 기업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수익률을 따져서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성경적 관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다’ 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한 번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 설명


본문 렘42장은, 유다 땅에 남은 잔류민들의 좌충우돌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사람들을 강제로 데리고 암몬으로 넘어가려다가,

요하난 장군에 의해서 제지되고, 사람들이 요하난에게로 다 돌아옵니다.


요하난과 남은 유다인들은,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가 이스마엘에 의해 피살당한 것을 계기로

바벨론이 다시 보복 공격을 해 올까봐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피해서 가려고 마음에 이미 결정한 상태입니다. 렘41장


이렇게 다 마음에 결정된 상태에서

본문 42장에서는 예레미야에게 나와서

“당신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당신이 전하는 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겠습니다.”  42:2~3

라고 예언기도를 부탁합니다.

 

이어서 6절에 보면

“그(여호와)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라고 매우 신앙적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나님께 받아 예언했습니다만 42:10~18


그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 두려워서, 애굽으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42:3절과 6절에서 ‘예언이 뭐든지 우리가 듣겠습니다’고 한 것은, 빈말이었던 것이지요.

자기들의 마음에 이미 답을 정해 놓고서, 그저 예언이나 들어보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짐 콜린스의 말에 접목시켜 생각해 보면,

쉽게 말하면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자기들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나에게 속였느니라.”라고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20


그래서 렘43장에서는, 결국 예레미야의 말에 윽박지르고

요하난은 남은 모든 유다인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적용,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과 충돌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고, 그 말씀을 지우고 이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생각되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좋은 것이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것이니까.. 내 마음이 거기에 달라붙게 됩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라고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들어가면, 칼이 너희를 뒤따라가리라고 말씀하시는데, :15~16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은, 애굽의 피난이 ‘좋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예언)보다... 

지금 환경을 볼 때, 애굽의 피난은, 당연히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려웠던 1960~70년대에 미국에 이민가면

제일 살기 좋은 줄로 알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처럼,

일단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내 마음이 착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끈질긴 인간의 죄입니다.

‘좋은 것’을 미리 결정하는 것..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상태 아닙니까?

(선과 악을 자기가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상태 말입니다.)


전 세계에, 지금 예수님 믿는 교회가 빠져 있는 가장 치명적 오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좋은 것’ 축복 을 자기 마음에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것’ 하나님 뜻 에 대한 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렘33:3절에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은 ‘나, 하나님 없으면 안 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알리신다는 것은,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위대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e great


우리는 그저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에 만족하며 살려고 할 뿐입니다. the good 

몸 건강하고, 잔고 좀 넉넉하고, 자녀가 잘 풀리면.. 그 ‘좋은 것’ 때문에

더 이상 ‘위대한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예 꿈도 꾸지 않습니다.


고전2:9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다...

이게 ‘위대한 것’ 아닙니까?  the great


주식시장의 누적 수익률보다 3배의 수익률을 내는 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업 경영인들이 할 얘기고,

성도가 사모해야 될 ‘위대함’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일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것이.. 정말 ‘위대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위대한 것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시종일관 무관심 일변도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좋은 것’들에 다 마음이 빼앗겨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좋은 것’들을 강조하는 설교를.. 우리는 하루 종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전을 위해서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그것은 반성경적이요, 반복음적인 설교들입니다.


내 자식에게는 이것이 좋다,

우리 가정에는 이것이 좋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 좋다..


이런 식으로 내 생각에 ‘좋은 것’을 마음에 미리 다 결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 안 듣습니다. (본문의 요하난과 유대인들처럼)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고집하며, 외치며, 부르짖다가.. 끝나고 돌아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부르짖는 그 시간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들을

우리가 산산조각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짐 콜린스가 <Good to Great>책에서

경영인의 자질에 대해 ‘버스이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버스는, 갈 목적지를 표시해놓고 그리로 갈 사람을 태웁니다.

부산행은, 부산 갈 사람을.. 광주행은 광주로 갈 사람을 태웁니다.


그런데 위대한 기업을 이룬 경영인들을 연구해보니까

갈 방향이나 목적지를 정해놓고, 갈 사람을 태우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같이 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과 함께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한다는 겁니다.

이 ‘버스이론’ 정말 기가 막힌 통찰력입니다.


우리와 함께 할 자 누굽니까?

우리가 (목적지를 정하기 전에) 먼저 같이 동행해야 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직장동료보다, 동창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파트너로 딱 정해 놓고,

그 다음에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파트너와 대화하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내 능력 이상의, 내 수준 이상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방향을 정해놓고, 그 버스에 하나님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먼저 태우고, 어디로 가야할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나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내 지혜와 내 모든 지식으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기도하면 된다는 강한 확신에 이끌려

      내가 무릎을 꿇었던 적이 내 생애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 <A. 링컨 


우리도 이런 ‘삶의 비결,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링컨만 그런 비장의 무기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좋은 것’들이 무엇입니까?

*큰 평수 아파트..

네, 우리가 몇 년간 시장조사하고, 뛰어다니고, 대출 얻고 하면..

그런 노력 없는 사람보다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 때문에, ‘위대한’ 주님과 동행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경제적 여유 

사람이 돈이 없으면 풀이 죽으니까, 

설날 떡값/세배 돈이라도 두둑이 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좋은 일’에 신경 쓰다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랜 기간, 어쩌면 일평생 기도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구하는 ‘좋은 것 the good’들을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구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이 ‘위대한 것 the great’들을 구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좋은 것들을, 만약 하나님이 응답해서 줘 버리시면,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그것들에 집착/관리/웅켜 쥠/자랑/만족하는 것 때문에

위대한 것들에 아예 관심이 없어지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구해도, '좋은 것'들을 응답 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의 방향을 바꾸어 봅시다. good to great로!

'좋은 것'들을 아예 구하지 말아 보세요. 구해도 별 소용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그런 '좋은 것'(오복 개념)들을 아예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위대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 시급하니까요!

 

▶관련글 : 괴짜 만세, 천재에 대하여

 

.................................. 더 읽으실 분 ................................


짐 콜린스가 또 하나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고슴도치 컨셉.

그는 그리스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여우가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여우가 얼마나 민첩하고 영리하다 못해 교활합니다.

가지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고슴도치가 다니는 길을 연구합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고슴도치를 공격하면 되겠다는

치밀한 전략을 세웁니다.

그래서 여우가 그 영리함의 극치를 발동하여 계획을 세우고

고슴도치를 공격합니다.


그러면 그 느리고 멍청해 보이는 고슴도치는

오직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온 몸 사방에 가시가 돋게 하고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우는 고슴도치 주변을 연구하고, 파악하고, 정보를 분석하고,

가는 길, 오는 길, 언제 굴에서 나오고..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는데

수 십~수 백 가지 고슴도치를 사냥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세워도

고슴도치는 오직 하나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몸을 동그랗게 하고 몸에 가시만 돋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우는 고슴도치를 절대 잡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집에 와서 또 실패하고는 연구합니다. 또 공격합니다.

고슴도치는 또 한 가지 온 몸을 동그랗게 가시를 사방으로 방어합니다.

여우는 날마다 고슴도치에 대한 지식이 쌓여져 갑니다. 전문가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최고가 되라!

경제적인 수익을 남겨라!

열정적으로 일을 해 나가라!


이게 모든 기업인들의 염원 아닙니까?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염원 말고도,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뭉뚱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여우처럼 수백 수천가지의 전략과 정보분석이 있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그 모든 것을 뭉뚱그릴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고슴도치 컨셉’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고슴도치 컨셉’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내려오셔서 동행하신다는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밥 한 끼를 주셔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면..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아무 사고 없이 지낼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분명히 마음에 전달이 되면..

딱 그것 한 가지.. 하나님과 동행.. 그게 바로 ‘고슴도치 컨셉’입니다.

 

수 십 가지 이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꼭 ‘하나님과 동행’이 아니더라도

‘성령님의 내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등

뭐든지 딱 한 가지로, 나 자신을 무장할 수 있다면, 그게 ‘고슴도치’가 되는 것입니다.

 

딱 한 가지! - 그게 바로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사는 삶..

그것 한 가지가.. 바로 ‘위대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슴도치 컨셉. 단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못 박는 것입니다.        ▣ 물질과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