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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일평생 추구 2869

LNCK 2011. 2. 11. 11:54

 

◈다윗의 일평생 추구             삼하22:21~29                 10.12.23.설교스크랩, 정리



평소의 삶에서 온전함을 추구한 다윗


시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항상 함께함으로 인해,

영, 혼, 몸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 주심으로,

완전한 행복의 삶,

즉,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겁고 육체도 안전히 거하는 만족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그 내막을 알아보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완전’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온전한 사랑과 거룩의 완전한 형상인 것처럼

자신도 흠도 점도 티도 없고 주름 잡힌 것이 없도록,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며 자기를 변화시켜 나갔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의 추구는, 크리스천 삶의 핵심


※온전하게 될 수 있다/없다는 논하기 이전에,

성경은 추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소 삶에서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자는, 어린 자 수준으로서의 ‘온전함의 추구’가 있어야 하고,

성숙한 자는, 성숙한 자 수준으로서의 ‘온전함의 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은..


참고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없다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할 필요 없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비록 계속 깨지고, 실패하더라도.. 발버둥(추구)은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은혜로 인해, 성화를 추구할 필요 없다.. 이건 극단적extreme 신념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총체적으로 강조하는 온전함         '완전하라'의 의미 -클릭-

지금까지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며 ‘완전’에 붙잡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온전’과 같은 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목적과 소원의 최고봉 또한 ‘완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 온전한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신18: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바울의 서신서에도 수없이 ‘완전’에 대해 나옵니다. ↙


빌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골1:22 “이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온전함(성숙함)이 봉사보다 먼저다.

엡4:11,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셨는데

이 지도자들을 세우신 목적이, 첫째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두 번째가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세 번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목적 속에 봉사와 사역보다

‘우리의 온전케 됨’이 먼저인 까닭은,

우리가 행복/성숙해야만 하나님 나라에 봉사하고 사람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이 가련하고 곤고하며, 마음은 고통과 괴로움과 어둠에 타들어가며,

삶 또한 질병과 문제 가운데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온전함=신앙의 성숙=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크리스천 삶의 본질을 깨달았던 다윗

하나님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평강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 집의 봉사자들로 세우셔서,

새신자들을 완전히 돌보며, 또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이루어,

이 세상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인접국들이 두려워하는 강국의 왕이면서도

하나님을 자신 앞에 모시고 살며, 오직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나아갔습니다. 시16:8~11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분명한 목적, 더 자세히 말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이 자신 안에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다윗은 알았습니다.

참되신 하나님, 진실무망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적당한 것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능력이나 은사 등 을 주어서

종이나 일꾼, 사역자로 부리려고 우리를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구원받을 후사들을 위해 섬기라고 지음 받았지만,

우리는 자녀로 지음 받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값지고 보배롭고 존귀한 것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원하셨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룩하고 흠 없는, 완전한 형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적 구원이요,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현재 천국인 것입니다.)


▲반대로 죄는 고통입니다. 악인에게는 고통과 환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와 악이 없다는 것은, 점이나 티나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 완전한 기쁨, 완전한 평강 가운데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해 우릴 지으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사랑을 외면합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수의 목회자들이 자기 목회의 성공을 위해

성도들을 봉사만, 십일조만 하게 하고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역할만 하게 합니다.


과거에 한창 그랬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직 ‘성장 드라이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알도록 진리의 말씀 그대로를 말하며,

성도 개개인이.. 고칠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게 하고,

배울 것은 배우고, 행할 것은 행하게 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게 해야 되는데,


수많은 점과 흠과 티와 주름 잡힌 상태로

온갖 더러움과 음란을 행하고 있음에도,

틀렸다고, 고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외치고 있는 '온전함'을 교훈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말씀을 전하면 성도들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의 핵심적 메시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여 거룩으로 인도하고,

세상 것과 불의, 불법에서 떠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교회에서 이 말씀이 참되게 전해지지 않으니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개혁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의 상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지금의 교회가 어둠 가운데 진리가 왜곡되고 혼잡케 된 것은,

진리가 하나님이 원하셨던 뜻 그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교훈을 집어넣고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친 것이 ‘축복과 성공의 메시지’였습니다.

신자들이 쳐다보고 추구해야 될 대상을, 엉뚱한 것으로 설정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바쁜 왕이었지만, 신앙의 핵심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시26:1-2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이것이 한 나라 왕의 기도제목이고, 간구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윗이 만약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늘 영토 확장, 수입 증가, 다산과 풍요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살펴보는 바, 다윗의 기도는

‘온전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다윗은, 정말 그러기 어려운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의 타깃을 정확하게 맞추고 있었습니다.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 기도는, 죄인인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가 정말 힘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부패한 것을 날마다 적발해 달라는 것입니다. 살피사 search me..

나를 시험test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죄를 짓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다 낱낱이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온전함을 위해.. 다윗은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큰 모델로서의 족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야!’ 하면서요..


다윗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의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환경에 있지만,

거룩하고 온전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완전히 살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제목은 어떻습니까?

중심에서 올라오는 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이 구절이 제게 특히 도전되었습니다.


시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시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많은 전쟁을 치루고 정사들을 돌봐야 했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철두철미한 다윗의 모습을, 시편을 통해 보면서 정말 놀랍니다.


그는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밤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추적해서 양심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회개하며 애통하고 탄식하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세상과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뵈었다’고 했습니다.

‘요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과 죄와 불의와 불법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과 이기심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영도 기쁘고 마음도 즐겁고 육체도 안전한’,

완전한 평강 가운데 사는 삶이 가능했습니다. 시16:8~11



◑적용


오늘날 교회와 우리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은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면, 돈이나 권력 명예, 영향력이 있으면,

기꺼이 집사, 장로, 권사로 세웁니다.

어떻게 그 교회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겠습니까?


거짓된 자, 불의한 자, 음란한 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가득한 교회에

어떻게 하나님이 안식처 삼아 거하시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영혼들을 소생시키고

수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온전함을 추구하는 교회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회개를 외치므로

사람들이 계속 거짓에서 떠나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니까

임재가 증가되고 그 영광이 떠나지 않고,

깨끗한 기름부음이 소멸되지 않고, 날마다 증가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면,

강퍅한 마음들이 깨어져 통곡합니다. 영광이 강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회개합니까?

교회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영광이, 임재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거룩함 앞에 깨뜨려지고 양심이 그들의 죄를 고발하여

고꾸라지고 통회합니까?


성도들이 이 땅에서 형통과 축복받는 삶을 살게 하려면,

목자는 성도들을 의롭게/온전하게 이끌어야 합니다.

그 손이 깨끗한 자로 살도록 이끄는 것이 성도를 향한 참 목자의 사랑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성도를 이용하지 않으며,

적당히 비위맞추고 부추겨 성도들에게 무엇을 얻어내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죄와 불의함, 음란함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교회에서 인정해 주고, 부추기고 높여 주면서

‘잘한다, 잘한다. 믿음 좋다, 신앙이 좋다’고 하니까,


자신도 교회에 주일성수하고 십일조와 봉사하고,

교회에서 물질이 필요할 때 지원해 주면

자신들은 신앙이 정말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나서야)

과거에 그랬던 자기들의 삶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죄와 불의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손을 깨끗하게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일날 안 빠지고, 헌금 생활 하면.. 믿음 좋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깊이 알고부터는, 충격을 받고

‘나는 가짜였구나,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제는 진짜가 되고 싶다.

하나님의 뜻대로 완전한 삶을 살고 싶다.’며 비로소 자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만)

심지어 우리는 목사님들한테 이용만 당했다며,

‘이제는 진짜 성도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점점 더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는 다윗의 신앙을 추적하며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완전의 수준에 도달하여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무슨 악한 일을 하여서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도 아니하였다.

주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지켰으며 주의 모든 법규를 내가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를 지켰다.’ 삼하22:21~23(설교문 본문)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아예 우리 속에 살고 계시며 나를 지켜 주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얼마든지

흠 없이 살며 죄짓지 않는 삶이 가능합니다.

(성숙하게 된다는 뜻, 완전 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님)


‘주님께서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흠 없으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교묘하심을 보이십니다.’ 삼하22:26~27(설교문 본문)


우리가 ‘완전’을 추구하며 원하고 구하면서 살면, 그 ‘완전’에 사로잡힙니다.

계속 주님이 ‘완전’으로 이끄시고 보이십니다.

계속 ‘거룩’을 원하며 거룩한 자로 변화되는 삶을 살면,

내 삶의 모든 시간과 환경, 상황과 사건들을 주님이 보이시면서

실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목적으로 삼고 원하는 그것을 위해 회개하면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계속 계시해 주시며 상황과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룩함으로 입혀질 수 있는 것들만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완전’을 붙잡고 나아가면 모든 환경과 시간 속에서 완전함으로,

거룩함으로, 사랑으로 임하셔서 여러분에게 이루십니다.


 

............ 중략된 부분 .........


디모데전서에서 바울도 철저하게 양심의 문제를 다룹니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바울은 믿음과 양심을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믿음과 양심은 함께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이 갈수록 회복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요, 예수님이 임금과 구주인 사람들은

화인 맞은 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잘못했을 때 그 죄가 자신에게 경고하는데, 양심이 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잘못했을 때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반응하는 사람은

그나마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입니다.


행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벧전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해 주시길 구해야 됩니다.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으로 회복되면, 조금만 잘못해도 민감해진 양심이 찌르기 때문에

죄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빨리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에서 더 나아가 깨끗한 양심(흠 없고 온전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지면, 양심이 계속 회복되어 깨끗한 양심으로 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영적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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