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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은혜의 부작용 조심

LNCK 2011. 2. 15. 13:24

◈축복과 은혜의 부작용 조심             사39:1~8         스크랩, 출처보기

 

 

▲선물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인의 삶을 살면서,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만큼 꼭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어진 축복과 은혜가, 다른 축복과 은혜를 먹어치우고 잠식해 버리는

그런 백혈병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백혈병 : 백혈구(피)가 많아져서, 다른 적혈구(피)를 잠식해 버리는 질병

 

영어의 ‘선물’이라는 단어가 gift, 독일어에도 똑같은 스펠링의 gift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단어의 어원은 똑같이 give입니다만,

영어의 gift는 ‘선물’이지만, 독일어의 gift는 ‘독’입니다.

언어적으로 벌써 'gift'가 선물이 됨과 동시에 독이 된다는 양면성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 우리게게 모두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고 우리가 은혜로 살아야 되는데

그 선물과 은혜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다른 은혜를 먹어 치우는

백혈병적 암세포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독이 되는 겁니다.

 

그런 현상을 ‘본문 히스기야의 후기 행적’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설명

 

▲기적적 치유의 은혜를 받은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려서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그의 죽음을 예고해 주십니다.  사38:1

아마 죽음을 준비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벽을 향해서 애달프고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소위 시중에 ‘히스기야의 면벽 기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음부로 들어갈 터인데

그 음부에는 하나님을 뵈옴도 없고 감사도 찬송도 없을 텐데..”

아마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해시계의 해그림자를 10도 뒤로 움직이게 하시면서까지 (기도응답의 표적을 주심) 

다시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줍니다.

 

놀라운 일이에요.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히스기야의 자랑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돼요.

이 소식을 듣고 바벨론 사신들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 사신들에게 궁에 있는 보물창고와 무기고와

온 나라 안에 있는 보물창고를.. 다 열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39:2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이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해서

네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보물들이 강탈당하게 될 것이고,

너의 자손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환관(내시)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사39:3~8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15년 더 살고 나라 망하고 자손들이 포로로 잡혀가느니

차라리 내게 죽음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자신을 맡기고, (15년 더 살지 말고)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병 나은 것은 좋았는데, 그 후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만약에 여러분이 15년을 더 살고,

여러분의 자식은 쫄쫄이 망할 것이다...  그러면 더 살겠습니까? 안 살겠지요.

 

결과론적인 얘기입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멸망의 그 발단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바벨론에 있던 사람들이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다 함을 듣고

 

사신들이 축하하러 왔습니다.

 

도대체 그 사신들에게 무기고와 보물창고를 보여줬다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갑자기 이 난리가 벌어진 것입니까?

 

앞서 앗수르(바벨론과 구분 요) 185,000명을 무찔러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불치병에 걸린 히스기야를 낫게 해주셔서

15년의 삶을 연장시켜주셨는데,

 

바벨론 사신에게 자랑 한 번 했다고,

나라가 망하고, 왕자들이 내시가 되어서 끌려간다는 예언은.. 아주 처절함 그 자체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180도 급반전된 히스기야의 위상

바벨론이 선물을 갖고 사신을 보낸 것은,

앞에서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앗수르 군대, 그 당시 근동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군대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유다 나라의 조그마한 성 예루살렘,

(이미 유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은, 앗수르에게 다 정복을 당한 상태입니다.)

예루살렘 성 하나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벨론에서 그걸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앗수르의 세력에 눌려서

약세와 열세의 지경에 놓였던 신흥국가 바벨론이

호시탐탐 앗수르에게 반전을 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조그마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 185,000명이

하루아침에 전멸 당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볼 때는,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굉장하다 굉장하다’ 하고 유다 나라와 함께 동맹을 맺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랬는데 또 소식이 들리기를 ‘죽을병에 걸렸던 히스기야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왕이 재촉해서 자기 사신을 보낸 겁니다.

이 사신들이 히스기야를 알현했을 때, 히스기야가 기뻐했다고 그래요. :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앗수르 군대의 전멸사건

그리고 죽을 불치병에서부터 쾌유된 사건.

이것들이 히스기야의 명성에 맹위를 떨치게 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상황이 180도 전환이 된 거예요.

 

수 년 전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을 때 상황과

지금 바벨론 왕이 신하들을 보내서, 자기가 만나고 있는 이 상황은

너무 너무 180도로 상황이 달라진 거 아닙니까?

 

히스기야가 자기의 명성이 온누리에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바벨론이 왜 선물을 가지고 오고, 왜 예물을 히스기야에게 바치겠어요?

 

▲자신을 대단하게 포장하기 시작하는 히스기야

그런데 여러분,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히스기야는 압니다.

이 사람들이 히스기야의 명성을 듣고 왔지만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죽인 것이 자기 힘도 아니고,

예루살렘 군대의 군사력도 아닙니다.

속이 비었어요.

 

외부에서 이방인들이 볼 때에

히스기야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대단한 위상을 떨치고 있지만,

실제로 자기는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벨론 사신들은 히스기야가 대단하다고 여기고 뵈러왔습니다.

히스기야의 명성이 바벨론 땅에서 맹위를 떨치고, 하늘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이제 그 이미지에 자기를 맞춰 가기 시작합니다.

자기 위신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다 꺼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거든!'

 

바로 이 시점에서

앗수르 군대를 멸절시키고

죽을 병에서 고쳐주신 그 모든 축복이.. 암세포로 변하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내 위신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할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과 은혜가

나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내 피가 내 피를 먹어버리는

백혈병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건 거꾸로도 마찬가지예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무능하다, 못났다, 악하다, 추하다.

그럼 그 이미지를 붙잡고 괴로워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못 느끼고 전전긍긍합니다.

똑같은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나를 맞춰가려고 하고,

그 사람들의 눈 앞에서 내 이미지를 상승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눈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을 의식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가.. 암세포로 변해버리게 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일이 잘 될 때도 조심해야..  

정상적으로 신앙적 입장에서 행동을 했다면, 이렇게 되었어야 되지요.

 

먼저 랍사게와 산헤립 왕이 편지를 보냈을 때

침묵 하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자기 입장에 대해 침묵하고,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입장만 보였던 것처럼..

 

앗수르 침공 때와 같이, 바벨론 사신들이 예물을 들고 왔을 때에도,

(즉 일이 잘 될 때도) 침묵하고 먼저 성전에 들어갔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만, 기도로 물어야 했다는 겁니다.

 

일이 잘못되고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만.. 침묵하고 기도할 게 아니라,

일이 될 때도.. 더욱더 침묵하고,

 

내가 지금 잘 되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좋다, 나쁘다'는 내 판단을 멈추고

먼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생각하고 계실까..'

이렇게 하나님의 입장을 여쭈었어야 했다는 겁니다.

 

▲아마 자신의 거품(허세)을 치장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무기고나 보물창고를 보여줬더라도

‘안보여 준 것이 없다’ 라고 표현될 정도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나요?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사39:2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여기서부터 책망의 예언이 시작됨)  :3

 

그냥 타국의 신하들을 대우하는 예전의 의미로

한 군데 정도 창고를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 사신들이 나라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해야 되는 거지요.

이렇게 조그마한 나라, 이렇게 작은 성, 아무리 군사를 다 헤아려 봐도

예루살렘 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가 얼마 안 되는데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앗수르 군대를, 그것도 185,000명을 어떻게 무찔렀을까?

사신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아마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더욱 안달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위상을 더욱 최고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일, 결혼잔치를 빚내어 거창하게 치르는가 하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도 큰돈을 써서 대접했던 적이.. 과거에 한 때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랬어야죠. 왕궁의 곳간을 다 보여주는 대신에,

“여러분 궁금하시죠? 어떻게 예루살렘 같은 작은 성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그렇게 무찔렀는지 궁금하시지요?

 

그리고 내 병이 나았다고 축하하러 오셨는데

내 불치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궁금하시지요?

 

의사가 대단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제갈공명 같은 전략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에요.”

그리고 성전으로 데려 가는 거예요.

 

“이 성전의 스랍과 그룹들 가운데 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군의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서 하루 새벽에 다 무찔러 주셨습니다.

제 병도 깨끗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받아들이던/ 안 받아들이던

이렇게 얘기가 되었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히스기야 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명성과 그 이미지에 맞추어서, 나를 업up 시키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모든 은혜를 암으로 바꿔버리는 ‘영적 백혈병’의 시작이라는 거예요.

 

▲남이 생각하는 이미지에, 나를 맞추려는 교만(외식)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겸손하게 간절히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축복으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에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미지에 나를 맞춰 가려고 합니다.

 

그때 허세가 나오게 되고, 외식이 표현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서두에, 우리가 축복을 받지만, 그 받은 축복이,

내가 받은 다른 축복과 은혜까지 다 잠식해 들어가는 예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차라리 히스기야가 15년을 연장 받지 못하고,

    병들었을 때, 제 명에 생을 마감했었더라면..

    (결과론적이지만) 더 낫지 않았을런지요?

 

    그러나 물론, 병고침 등 축복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애굽에 7년 풍년이 들었을 때,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흥청망청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뭐가 없고, 지위가 낮을 때는.. 대부분 누구나 겸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뭐가 좀 있고, 지위가 높을 때는.. 대부분 히스기야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에게 경고로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결정적 실수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은 기간에.. 므낫세를 낳은 것입니다. 혹은 잘못 키운 것

므낫세는 12살에 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왕하21:1

그렇다면, 연장전 15년 중에 3년째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남유다 왕들 중에서 우상숭배에 가장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바알 우상을, 하나님의 성전에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왕하21:4~6

그래서 하나님은, 므낫세 때문에, 바벨론의 침략을 허용한다고 공언하셨습니다. 왕하24:3   주1)

 

 

      재미있는 것은 원래 '므낫세'란 이름은, 총리가 된 요셉이 첫째 아들을 낳고서      (나로 아비집의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다' 할때 지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이름을, 히스기야가, 므낫세를 낳고서 지어주었습니다.      그만큼 히스기야의 삶이, 마치 요셉의 고난처럼,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앗수르처럼 가장 강력한 적이 쳐들어온 적은, 다른 유대 역사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정말 기적적으로, 그 인류역사에 악명 높은 적군 앗수르를 격퇴했는데,       이제 또한 자기 몸에 불치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다가.. 겨우 고침 받았으니..      아들을 낳고서 이름을 '므낫세' 라고 명명함으로써, 그 괴로운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괴로운 과거를 지낼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팔자가 좀 펴서, 편하게 살게 되었을 때는.. 자기 힘을 의지하다..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습니다.       이게 우리 모두의 인생 아닙니까!   

     

 

◑해석 및 적용

 

▲1. 하나님이 주신 제 명(자기 목숨)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역사의 평가는 후대에서 평가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습니다만)

히스기야가 15년의 목숨을 더 연장 받고, 그의 인생의 총 결과를 놓고 보니,

차라리 15년을 더 살지 않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겠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15년 동안 결정적으로 잘못한 2가지를 위해서 살펴보았습니다.

①바벨론 사신 앞에서, 자신의 위세를 떨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며, 사39:5~7

②므낫세를 낳아서 잘못 키운 것입니다. 역사의 죄인을 키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내게 허락하시는 섭리가 ‘최선의 선택’ 임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내 지혜와 선택과는 비교가 안 되니까요.

 

차라리 히스기야가 15년을 더 살지 않고 일찍 ‘갔으면’.. 더 나앗으리라는 것입니다.

괜히 더 오래 살아서.. 오히려 점수를 까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퇴보했습니다. 

 

    서두에서 ‘선물이 오히려 독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물’도..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주십니다. 독이 안 되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좀 더 위엣 것을 구해야 하며, 또 받은 것으로 늘 자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히스기야가 면벽기도를 통해서, 생명을 15년 더 연장한 것은.. 축복이 맞습니다.

이 ‘기도 응답’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특별한 기도를 했고,

특별한 응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신앙보다는 ‘한 수 위’였음이 분명합니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축복과 은혜를 받았을 때, 갑절로 긴장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점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후대의 우리를 위해서 기록한 것이, 오늘 본문 이사야39장입니다.

 

▲3.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18만5천 군대를 물리치고, 자기 병을 고침받는 것을 통해서

신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을 이미 모형적으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몸을 씻었지만, 그래도 발은 매일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3:10

 

여러분, 히스기야 같은 성실한 왕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또 다윗과 같은 왕이 밧세바 사건이 웬일입니까?

 

여러분 다윗과 히스기야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날마다 죽지 않으면.. 다 똑같은 전철을 밟게 돼요.

 

사람이 평소에는 늘 겸손했는데, 자기 지위가 높아지면,

그것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 높아진 것처럼, 자기 위세를 떨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인 우리,

성령의 도우심과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함으로 사는 우리는,

자기 능력의 몇 배 이상, 남들이 볼 때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삽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능력이 한 순간이라도.. 내게서 나왔다고 자고하다가는..

그래서 내 모든 곳간과, 무기고와, 창고를 다 내어 보이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7년 풍년 때 총리를 지낸 요셉의 삶을 깊이 묵상합시다.

그는 풍요로운 환경, 총리로 격상된 환경에 처했지만,

결코 방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데.. 자기의 자원과 축복을 잘 사용했습니다.

 

..................................................................

                                                                                                                

 주1) 

그는 바알숭배를 장려하여 자기 아들까지 희생제물로 바치는가 하면, 

대하 33:10-20을보면 므낫세가 앗수르 사람들에게 잡혀 바벨론으로 가서

하나님께 참회하고 기도하고 다시 돌아와서 우상을 폐지하고 참 하나님께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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