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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덮으심

LNCK 2011. 2. 10. 13:36

◈하나님의 덮으심                  창1:2, 룻3:9, 히8:5,                      10.10.17.인터넷설교일부녹취

 

 

▲서론, 구약도 ‘십자가와 구원’으로 해석하라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구약도 십자가로 해석하라’는 말을 했다.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성경을

예수님과 구원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3:16

라고 했으니...

예수님과 구원의 관점 말고도, 삶의 교훈, 책망, 바르게 함, 교육적으로

성경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요5:39

그러므로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이 맞다. (이거 방대한 작업이 됩니다.)

 

정리하면, 구약도 예수님과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정석이다.

그러나 가정에 관하여, 삶에 관한 지혜 등 교훈과 책망과 교육의 관점에서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주와 객을 엄연히 인정해야 한다.

전자를 로 하고, 후자를 으로 해야지,

전자를 깡그리 무시하고, 후자를 중심으로 한다면.. 성경책이 도덕책으로 격하된다.

 

아래 설교문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과 구원의 원리’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덮으심

 

▲1. 속죄소가 언약궤를 덮고 있다.

‘성막’과 ‘성전’은

천국을 원형(또는 청사진)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천국을 보여주시면서, ‘이 식양대로 성막을 지어라’ 그러셨다.

모세는 그 천국의 모습을 축약해서,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막의 가장 핵심은, <속죄소와 언약궤>이다.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거기 법궤 위(법궤 뚜껑 위) 속죄소에, 어린 양의 피를 붓는다.        (시은좌 라고도 함)

 

그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당신의 아들의 피로 덮어버리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언약(율법)을 주셨지만, 사람은 그것을 다 지켜 살지는 못한다.

그 언약이 들어있는 궤를 피로 덮는다.

 

피로 덮고, 그 밑에 인간의 죄와 허물은 안 보시겠다는 것이다.

그 위의 예수님 피만 하나님은 보시겠다는 것이다.

그 아래 있는 자는 모두 무죄 선언을 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모형이요,

출애굽기에 나타난 ‘복음’이다.                     

 

그래서 성막의 핵심인 지성소가 ‘속죄소가 법궤를 덮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2.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덮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여기서 ‘운행하다’는 말은, 덮는다는 말이다.          (히. 라하프, hovering)

 

혼돈과 공허와 흑암, .. 이것은 구원 받기 이전 인간의 상태이다.

그 수면 위에 성령이 운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세상의 모양은 혼돈, 공허, 흑암이었다.

그걸 뭉뚱그려 '수면, 바다'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겠고..’ 라고 말씀하는 것은,

다시는 혼돈, 공허가 없다는 뜻이 된다.  계21 :1

 

‘운행’ (라하프) .. 암탉이 달걀을 부드럽게 품어 안는 모양이다.

암탉이 달걀을 품어 안듯이, 성령이 우리를 부드럽게 덮으시면..

달걀에서 생명이 알을 깨고 탄생하듯이, 새생명으로 창조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덮으심’이다.

창1:2절은, 그 말을 ‘운행’이란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암탉이 달걀을 부드럽게 품어 안듯이 덮는 것이요,

또한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며 공중에서 빙빙 선회하는 모습도.. 같은 뜻인데..

 

어쨌든 창세기1:2절부터, (성경의 시작부터)

성경은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축복의 도리’ 이런 책이 아니다.

 

혼돈과 저주와 흑암, 그 카오스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어떻게 창조되는지를 원리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3. 신명기에 나타난 ‘덮으심

 

신32:11 (여호와께서)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너풀거리다’ - 덮으심이다.      (창1:2절과 같은 단어 ‘라하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위에 하나님의 신이 너풀거린 그것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이스라엘 위로, 하나님의 신이 너풀거리는데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을 보호하며 나는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새끼 독수리들이 있는 장소는 ‘황무지’이다.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황무지는 히브리어로 ‘토후’인데,

창1:2절에 혼돈 역시 ‘토후’이다.

 

창1:2절 상황이

신32:10~12절 상황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창1:2절과, 신32:12절이 연결되는, 같은 맥락인 이유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똑같은 구원, 구속 사건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인간의 성공, 윤리, 행복비결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구약성경도, 구원/십자가/구속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 2번과 3번은 히. 라하프, hovering, 운행(선회)하시니라 을 설명하다가

아래 3번과 4번, 5번은 히. 카나프, wing, 날개, 옷자락 을 설명하고 있다.

 

의미는 둘 다 '덮는다'는 뜻인데, 히브리어는 라하프, 카나프로 각기 다름.

그래서 1~5번을 스트레이트로 연결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음. 그러나 의미로는 연결 가능할 것임/주.

 

 

▲4. 룻기에 나타난 덮으심

 

그렇게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덮은 독수리 날개가

룻기에서는 ‘옷자락’으로 나온다.

 

룻3:8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의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덮었고,

출애굽기에는 속죄소가 법궤를 덮었고,

신32장에서는 독수리 날개로 덮었는데,

룻기에서는 보아스의 옷자락이 룻을 덮는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맞선 한 번 보면 결혼했듯이’

당시에 ‘남자가 여자를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것은

자기 옷자락으로 덮으면 그것은 곧 혼인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룻이 지금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하며

청혼하는 것이었다. 룻이 밤에 추워서, 옷을 덮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거지가 된 룻이,

그 땅의 지주인 보아스와 결혼해서

보아스의 삶에 연합해서 보아스의 지위로 올라가는 것에 비유된,

구원과 복음의 이야기가.. 룻기이다.

 

이것은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신부인 교회를 당신의 구원으로 덮는 것을 의미한다.

‘옷자락’과 ‘독수리 날개’는 히브리어로 똑같은 단어다.    히. 카나프/ 옷자락, 또는 날개

 

이것은 ‘덮는다’는 뜻으로 창세기의 바람이 수면 위로 운행함과 연결된다.

옷자락으로 덮든지(룻기),

바람으로 덮든지(창1),

독수리 날개로 덮든지(신32:)

속죄소로 덮든지(출)

모두 다 덮는 것이다.

 

성경은 창1:1절부터 그리스도와 구원을 모형화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적으로 반복,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된 내용을 생략하고, 성경을 도덕책으로만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원래 목적에 위배된다.

 

▲5. 에스겔서에 나타난 덮으심

 

겔16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카나프, 덮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정리하면

벌거벗어서 부끄러운 아담, 부끄러워서 숨었다. (혼돈, 공허, 흑암을 연상하셔야 한다.)

그를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룻기식 표현으로는,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구원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 밖에 없다.

 

하나님은 신랑, 나는 신부,

그런데 나는 거지, 하나님은 지주 (룻기)

하나님이 나를 덮으셔야, 내가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러니까 내가 거지였다 라는 것,

죽은 흙(티끌, 먼지)이라는 것을 올바로 깨닫고 가는 자가.. 성도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자신을 ‘파울로스(작은자)’라고 했던 것이다.

 

그걸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높일 수 없다.

오직 낮고 비천함을 깨달은 사람에게만 (이것도 은혜로라야 깨닫는다)

참된 구원이 그에게 임하신다.

 

▲6. 마리아에게 나타난 덮으심

눅1:35절에도 덮는다는 말이 나온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마리아는 구약의 ‘미리암<마라’에서 온 말인데, ‘반역’이란 뜻이다.  (또는 ‘쓰다’)

이 마리아(반역)는                                   

창1:2절의 혼동공허,

신명기에서 새끼독수리가 살던 광야,

룻기의 룻의 거지 상태와 매치된다. 구원 받기 이전 상태이다.

 

그 ‘반역자’에 성령이 덮으시니까

예수가 잉태되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나같은 반역자(마리아)들에게, 성령이 덮으시면

내 속에 예수가 잉태되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유독 ‘마리아’들이 많이 나온다.

다른 여인들의 이름도 많은데, 그들 이름은 잘 안 나오고, 마리아들만 나온다.

인간의 상태가 원래 그렇게 다들 ‘반역자’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신

 

위에서 ‘덮으심’이란 동사를 살펴보았는데,

같은 맥락이지만, 그 덮으시는 주체가 바람(성령)이라는 점을

이 단락에서 살펴보면...

 

▲1. 천지창조 때

창1장에서는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더라고 했다.

하나님의 신은 ‘루아흐’인데, 바람이란 뜻도 된다.

 

▲2.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도 홍해 위에 바람(루아흐)가 불어서 마른 땅이 되었다.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출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3. 노아의 홍수 때

그 저주의 풍랑 위로 바람(루아흐)이 불어서 땅이 드러났다고 했다.

창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성경은 똑같은 사건을 천지창조 때,

노아의 홍수 때,

홍해를 건널 때..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저주의 바다, 저주의 홍수, 저주의 풍랑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코로 숨 쉬는 생물들이 다 빠져 죽고,

이제 새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창조되는가 하면, 

수면 위에 바람(루아흐)이 운행함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을

그림으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물론 그 땅은 또 타락한다. 이 세상의 땅이니까.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교회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새 창조의 역사를, 그 가운데서 계속 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겠고..’ 라고 말씀하는 것은,

다시는 혼돈, 공허가 없다는 뜻이 된다.  계21:1

 

▲4. 아담을 만드실 때

흙에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먼지였던 그러한 존재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다. 티끌, 먼지는 죽은 흙이다.

그 티끌 위에 생기가 불어지는데, 생기가 들어가자마자 살아있는 자가 된다.

 

그 생기도 역시 바람(루아흐)이다.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혼돈, 공허, 흑암의 수면이다.

저주의 바다이다.

절망의 홍해이다.

티끌이다. 죽은 흙이다.

 

그런데 나는 너희를 내가 '내 영으로'

너희를 ‘품어 안으므로’ (또는 덮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된다.

 

성경은 구약부터, 이 이야기(구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책이 아니다.

 

※참고로, 그 구속 과정에서 우리가 한 것은 ‘죽어있었던 것뿐’이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때,

그 ‘먼지’(흙, 아담)가 뭘 하나님을 도와줄 수 없었다.

 

오늘날 ‘나는 좀 깨끗한 먼지인데요.., 나는 좀 질 좋은 진흙인데요..’

이런 태도는 안 된다. 금물이다.

이것을 주장한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구원을 받으려면.. 철저히 죽어있어야 한다.

자기가 조금 깨끗한 사람이라고 내세우다가는.. 구원 못 받는다.

 

 

 

▲마치는 말

구약도 십자가와 구원의 원리로 ‘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이 메시지를

창1:1절부터 성경은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인)

우리 안으로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기필코 새로운 창조물로 완성해 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구원)를 보여주는 모형과 메시지로.. 성경은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타락한 죄인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렘4:22~23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흑암)

 

여기서도 혼돈, 공허, 흑암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죄인들의 땅(몸)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값없이 찾아가셔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건져 올리시는 사건이

창세기 첫 창조의 첫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첫날은 빛이 창조되었네, 둘째 날은 궁창 위와 아래 물로 갈렸다.’

성경을 그렇게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런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던 우리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덮혀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 교회로 탄생된 것이다.

 

그게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다. 혼돈, 공허, 흑암이었던 그들,

예수를 못박 아 죽인 자들 위에,

성령이 불의 혀처럼,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했다.

거기에 혼동 공허와 흑암으로 죽어야 할 자들이 교회로 새롭게 창조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그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성도의 자아인식은,

‘나는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이구나.. 즉은 흙이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은혜와 긍휼로 품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것이구나!’ 하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혼돈, 공허, 흑암은 절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기여할 수 없다.

그냥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작은 자, 죽은 자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는 자들이 섞여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긍휼, 은혜를 깨닫고

나의 무력함, 불가능함을 자각하여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게 항복해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죄를 짓도록 방치하실 때도 간혹 있다.

이 말은 범죄를 합리화한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큰 그림 속에 한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에 의해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절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될 수 없다.

암탉이 품지 않은 달걀은 절대 부화할 수 없다. 부화가 안 된다.

암탉이 품어야 부화가 된다.

 

새로운 피조물은, 즉 암탉이 품은 자들은, 새생명을 얻은 자들은,

‘나는 죽은 흙이다’ 라는 고백을 한다.

 

암탉이 품지 않은 자들은 ‘내가 왜 죽은 흙인가, 반대로 나는 신 같은 존재다’

‘내가 이 세상에 중심이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산다.

‘내가 최고야, 내 자식도 최고로 잘 되어야 해, 우리 식구는 다 잘살아야 해!’

그렇게 자기 것만 챙긴다. 죽는 날까지,

그리고 자기가 최고인줄 안다. (구원은 그 반대다. 철저히 혼돈, 흑암이다.)

 

역사는 그러한 두 부류(은총 입은자와 아닌자, 품은 달걀와 아닌 달걀)를

선명하게 갈라내는데..

 

그 첫 번째가 '가인과 아벨'이었다... 

 

 

*김성수 목사  롬1강 20'~40'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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