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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자, 작은 자 2866

LNCK 2011. 2. 9. 12:44

 

◈큰 자, 작은 자         롬1:1,    고전15:8~10            10.10.17.인터넷설교일부녹취


한국 기독교의 발전은, 세계 기독교의 발전입니다!  (퇴보는 퇴보이고요)



◑바울.. ‘작은 자’라는 뜻


▲신앙생활의 핵심.. 작은 자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면 알수록,

성도가 작아지고, 더 작아지는 것이 (자기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도움(복)을 받아서,

자기가 더 커지려고 한다.

자기 신분이 더 업그레이드upgrade 되려고 한다.

 

하지만

자기가 더 부자가 되든지/말든지.., 자기 신분이 더 업그레이드되든지/말든지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볼 때, 자기가 더 작아지고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자기가 자꾸 더 커지려고 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일 따름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 앞에서

자기가 더 작아지고, 한없이 더 비우고, 더 겸손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참 기독교 신앙을 깨달은 사람은, 그 작업을 매일 해 나간다.

바울은 그 핵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관련글 예수님이 오신 모습 -클릭- 



▲그래서 모든 바울서신은 “작은 자”라는 말로서 시작한다.

당시 서신 형식은, 모든 서신의 서두에 발신자 이름을 제일 먼저 표기했다.


한글성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하면서

‘바울’이란 이름을 문장의 뒤쪽에 배치하고 있지만,


헬라어 성경의 어순은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종 되어서..’

이렇게 ‘바울’이란 이름이 문장의/서신의 제일 첫 머리에 등장한다.


그런데 ‘바울’이란 이름이 ‘작은 자’라는 뜻이니까,              *little, small

바울서신의 수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읽게 된다.

작은 자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종 되어서.. 너희에게 편지하노니’

(또는 어린아이는..)

 

모든 바울서신의 서두에는 ‘작은 자는(바울은)..’ 이라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모든 바울서신서의 서두에 벌써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란 뭐냐? ‘작아지는 것’이다... 이걸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것은 패배주의나 자기 비하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크신 존재와,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비추어 볼 때,

그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겸손이다.


바꾸어 말하면, 겸손낮아짐자기 비움을 추구하지 않는 현대 기독교는,

그런 것 대신에 성공부유함자기계발을 추구하는 현대 기독교는

단추를 계속 잘못 끼워 나가고 있다. 결국에는 신자가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서신서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사울’로 표기하지 않았다.


사울이란 이름에 크게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울’은 아마 ‘사울 왕’의 이름을 본 딴 것으로 여겨지는데,

(바울도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니까)


*사울이란 이름의 뜻은 ‘바라는(자)’desired 라는 뜻.

시중에 유통되는 ‘큰 자’라는 뜻은.. 그가 왕이니까, 아마 거기에 근거해서 유행된 말로 추측됨.

사울이 왕 임을 감안할 때,

사도가 어릴 적 가졌던 ‘사울’이란 이름이 뜻하는 의미는 (↔뜻) 

힘, 부, 출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울'의 단어의 뜻은 ‘(뭘) 바라는 자’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이름과 영어이름, 둘 다 있듯이

사도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헬라식 이름은 ‘파우로스’였다.

*한글로 사울-바울이 발음이 비슷하니까, 사울>바울로 살짝 바꾼 것 같지만,

원어로 사울-파우로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물론 그 의미도 완전히 다르지만...

 

그런데 사도가, 자기 이름을 ‘사울’로 쓰지 않고,

모든 서신서에 굳이 ‘바울’이라는 이름만 쓴 것은,

그것도 서신의 가장 중요한 서두 첫 머리에,

‘내가 지금부터 설명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파우로스(작은 )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이런 말을 강하게 웅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바울아’ 하지 않으시고 ‘사울아’ 라고 부르신 것과 비교된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기 전에 그는 ‘사울’이었던 것이다.

 



◑큰 자가 되려는.. 사람의 본능과 실상


▲모든 부모의 바램은 똑같다.

아마 그의 부모가, 앞으로 우리 아들은, 

우리 베냐민 지파 출신의 왕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왕의 이름 - 사울’을 지어주었던 모양이다.


그가 ‘사울’(사울 왕처럼 위대한 이름)을 갖고 있었을 때,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마치 실제로 그렇게 큰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그가 진실로 예수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스스로 자기를 결코 ‘사울’로 부르지 않고, 항상 ‘바울’로 부르고 있다.

 

그가 핍박을 한 전과가 있어서 ‘나는 작은 자(바울)’.. 그런 뜻도 일부 있겠지만,

그런 뜻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자기가 ‘바울(작은 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능과 실상이 이렇다.

사도의 부모가, 그의 이름을, 왕 이름을 본 떠서 ‘사울’로 지어준 것처럼,

사람들은 항상 ‘크고, 위대하고, 정복자’ .. 이런 이름을 원하는 것이다.

사울 왕의 키도 남들 어깨 위로 더 컸으니.. 자기 자녀가 키도 크고 멋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사울’이란 이름은, 사도 바울 말고도

여러 사람이 가진 아주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


더욱이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불행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기 자녀가 일단 王이 되거나,

왕에 준하는 어떤 힘과 권력을 갖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실제로 사도는, 과거에, 자기 이름 그대로 ‘사울 왕’처럼 살았다.

그는 정말 자신의 육신적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었다.

‘사울’이란 이름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습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 사울 왕처럼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해!’

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인간적으로 남들보다 배나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그런 ‘사울’의 흔적이 이렇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3:5~6


율법을 눈꼽만큼도 어기지 않을 정도로 ‘사울’로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자기 이름(사울 왕)도 한 몫 동기부여를 했을 것이다.

아마 사울 왕이 그의 롤 모델 role model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르치려 든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자기가 너무 잘나서, 항상 주님을 가르치려 들었고,

주님의 약점이나 캐려 했던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본주의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유대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게 바로 - ‘큰 자’의 삶인 것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작은 자’로 산다.


※‘사울’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바울)’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사울 (왕)’쪽으로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쪽이다.


‘사울 왕’의 삶이, 벌써 성경에서 부적격자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사울 왕’처럼 크고, 높고, 위대해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객토해야 (토질을 바꾸어야) 한다.


▲이후로 철저하게 바울(작은 자)로 살았다.

그 기세등등하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로마 시민권자에다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유대교 지도자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니..


늘 핍박받아 피해 다니고,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정말 공격을 받아도, 공격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작은 자’의 삶으로 내려가더라는 것이다.


사울이었던 때의 자기 자아인식이 빌3:5~6(), 갈1:14절이었다면

바울이었을 때의 자기 자아인식은 고전15:8~10절이다. ↓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나는 사도도 아니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관련글 : 바울의 ‘자기 인식’ (더 겸손) 발전 단계


▲정리하면,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자기가 ‘작은 자’이며,

‘더 작은 자’임을 인식하고 있다.

 

자기를 대단한 자로 자랑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여러 서신서를 쓴 것은, 편지를 쓴 것이지,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기 위해 저술, 출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울의 신앙은 점점 더 성숙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도바울은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게 되고, 더 작아졌던 것이다.


이 겸손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의 자아인식이 되어야 한다.

(내가 ‘장관’되어야지 하면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자기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나는 ‘큰 자(사울 왕처럼)’의 삶을 추구하고 사는가?

    아니면 사도처럼 ‘작은 자(바울)’의 삶을 추구하고 사는가?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면, 그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그 앞에서 자기를 도덕적/지위적/물질적/그 어떤 면에서도

    도저히 높일 수 없을뿐더러, 도저히 자기를 낮추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신자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높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깨달으면... 그것은 복음의 절반만 깨닫는 것이고,

    그 앞에서 온전히 작아진 자신을 깨닫는 것... 그것이 온전한 깨달음이다.


    그것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매일 그것을 묵상하며, 그 길로 산다. '바울'로 산다.


▲덧붙여서

반면에, 오늘날 예수 믿어서, 주님의 축복과 도우심을 받아,

자기와 자기 자녀가 ‘사울 왕처럼’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큰 자’ 흉내를 내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모르거나, 알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왕의 이름-사울’을 쓰지 않고,

‘작은(자)’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 ‘바울’ Paulos 을 쓴 것을 기억하면서,


바울서신서를 읽을 때마다, 그 첫머리 서두에서부터 (보통 1:1절)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진리가 ‘겸손, 작은 자, 바울’임을

천국에서 사도바울이 오늘도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다.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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