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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침묵

LNCK 2011. 2. 15. 22:43

◈히스기야의 침묵               사36:1~22                  본문 스크랩, 출처

 

 

◑서론, 투명인간

 

▲‘기게스의 반지’ 일화

기게스는 리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였습니다.

어느 날 뇌우와 지진이 일어나면서 땅이 갈라졌고,

목자 기게스는 그 틈으로 내려가 송장을 발견했습니다.

 

송장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손에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고.

기게스는 금반지를 챙겨서 지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기게스는 왕에게 양들에 관한 일을 보고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반지를 만지작거렸는데,

그 순간 기게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투명인간이 된 것이지요.

 

반지가 가진 이러한 힘을 알아 챈 기게스는

그 힘을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죽이고, 왕국을 장악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하는 것으로
‘기게스의 반지’라 불리는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바는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도덕이란 결국 무력한 사람들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착하고 평범하고 착실했던 기게스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힘을 얻자마자

사악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처럼

힘이 주어지면..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힘이 주어지면.. 도덕성이 없어지고, (뭐든지 할 수 있고)

힘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을 지킬 수밖에 없지요. 안 그러면 잡혀가니까.

 

하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이라는 소설도 있듯이

인류 역사상 ‘투명인간’에 대한 막연한 인간의 어떤 욕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으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민요에도 ‘투명 인간’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동지 섣달(가장 추운 겨울)에는 꽃이 안 핍니다.

그런데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선이 집중하게 될 것이고,

마치 그렇게 날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님의 근처에 얼쩡거려도,

님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냉담합니다.

마치 자기가 님에게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마치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냉대를 당하니까, 애가 타서 부르는 노래(밀양아리랑)입니다.

 

여가수 손담비가 이 노래를 현대적으로 부릅니다.

‘어디를 보니.. 니 앞에 난 투명인간이니? 소리쳐야 내가 보이겠니?’

 

네 앞에 내가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나에 대해서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질 않고 있느냐?

소리를 쳐야 네가 내가 있는 걸 알겠느냐? ..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사36장은, 앗수르의 공격(비방, 심리전)에 대항하는

히스기야의 자세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마치 앗수르(랍사게)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무시하고 있는데요..

 

 

◑본문 설명

 

앗수르 산헤립 왕이 랍사게 장군을 시켜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에서

히스기야 왕이 사신 3명을 랍사게에게 보냅니다.

 

그때 사신들 앞에서 랍사게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고

히스기야를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 바로 그 내용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의 포인트는 21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1

 

랍사게(개 같이 여기는 이방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pride이 강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때 대꾸하지 않고, 잠잠하며 침묵하는 것은, 보통 힘든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랍사게가 막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선민들의 자존심을 그렇게 강하게 자극하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비방 내용은 사36:5~10 아래 주1) 을 보세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반대편으로 작용하는 그런 마음의 동요가 있는데,

두려움입니다.

 

앗수르는 엄청나게 강하고 엄청나게 잔인합니다.

모든 노약자를 사정없이 진멸한 자들이 바로 앗수르이었음을

예루살렘 선민들이 소문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포가 생깁니다.

(그들은 역사책에 거의 ‘전쟁기계’로 기록 될만큼, 전쟁에 능하고, 가혹했습니다.)

 

지금 공포 앞에 서 있고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한없이 한없이 망가진 채

자기의 대변과 소변까지 먹게 된다는 말이 12절에 나옵니다.  :12, 랍사게의 모독 中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모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랍사게를 향하여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자기들끼리라도 얘기할 법도 한데

한 마디도 대꾸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1

 

엄청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내려오셔서 구원의 활동을 하실 때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바로 이 ‘침묵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냥 침묵하는 것은 무서워서 겁에 질려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고,

여기서 침묵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이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갑니다.

성전으로 간다는 것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왕이 백성들에게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인

그리고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랍사게의 책동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명령하는 것..

 

이 침묵의 단계가 있어야 하나님이 활동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거든요.

 

 

◑해석 및 적용

 

지금 랍사게가 책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마디도 대꾸 안 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랍사게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혀 랍사게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앗수르는 천하를 호령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선봉장이 랍사게입니다.

그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고 지금 책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진멸하기 위해 쳐들어가기 직전에

이 예루살렘을 항복하도록 권유하며 책동을 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항에서 그 랍사게의 말에 대해서

왕 이하 모든 백성들이 단 한 마디의 말도 안 합니다.

뭔가 웅성웅성 동요가 일어나야 되는데, 잠잠하고 한 마디도 안 하고 침묵합니다.

 

그리고 왕은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랍사게의 입장에서는 아주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린 것입니다.

랍사게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노래처럼

‘내 말 좀 들어보소 내 말 좀 들어보소’

이러고 있는데 그런데 한 마디 대꾸가 없습니다.

 

시편 46:10절 제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무슨 말입니까?

랍사게의 책동 앞에서 지금 가만히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보처럼 인내하면,

그 동안 보이지 않고 계시던 하나님의 존재감이 비로소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는 사람의 존재감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마음에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하는 일과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멈춰버립니다.

침묵이라는 것은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것은 생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버립니다. 침묵하고, 일일이 대꾸하지 않습니다.

마치 바보와 같습니다.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상의 대상들이

투명인간이 되어 버리면서

 

동시에 그 동안 투명한 하나님이셨던 분이 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내려 오셔서

실제로 나를 끌어 당기셔서 구원의 상태로 높이시는 것은

반드시 ‘침묵을 통한 투명인간화’의 단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에 대한 투명 상황에 대한 역사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투명인간화 되게 되는 역사

이게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침묵의 결정체(모델)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내 생각의 침묵, 내 말의 침묵,

내 판단의 침묵..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지금 눈에 보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내 생각이 죽어버립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재감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존재감이 사라지고 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으로 돌아가면 그 다음 날 새벽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멸절되고

이 얘기를 듣고 산헤립 왕은 줄행랑 쳐서 본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말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래서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고

투명인간 투명사건이 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내가 하나님을 존재감으로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활동해나가실 것입니다. (후략)

 

하나님 아버지! 투명인간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이 다 투명한 존재들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한 마디도 할 필요가 없게 해주세요. 침묵이 회복되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죽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소원합니다.

내 사건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침묵할 때, 주님이 비로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1) 랍사게의 비방 내용 / 사36:5~10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 언어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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