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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2875

LNCK 2011. 2. 16. 11:39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창27:1~30         인터넷설교일부녹취


 

◑큰 자를 버리시고, 작은 자 야곱을 택하신다.


창세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 보면, 구원의 그림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야곱이 어떻게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가?

거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결과적으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성도를 상징하고

에서는 이 세상에서 힘의 논리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상징한다.


(에서와 야곱을, 누가복음의 맏아들과 탕자로,

또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로 연결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창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가 반드시 있다.

그 별미가 무엇인가?

 

야곱에게는, 그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어낼 힘과 능력이 없었다.

에서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활을 들고 나갔다. 별미를 만들 짐승을 잡겠다고,

 

그런데 그 과정에 어머니 리브가가 개입한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다. ↙


롬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


여기에 ‘큰 자’, ‘작은 자’가 나오는데,

세상에서 ‘큰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로

세상에서 ‘작은 자’는 천국에서 ‘큰 자’로.. 성경에 항상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이 차남만 편애하시는가? .. 아니다.


사냥 잘하는 에서, 집에서 성실한 맏아들(눅), 동생을 쳐 죽일 만큼 용맹했던 가인..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시고, 즉 택하지 않으시고,


사냥 못하는 무능한 야곱,    이름 뜻은 사기꾼

집에서도 말썽피워 인정받지 못하는 탕자,

자기 방어도 못하는 아벨..    이름 뜻은 nothing

하나님은 왜 이런 루저loser들만 택하시고 부르시는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루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 아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으려면, 이 세상에서는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롬9장에서 말하는 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했는데,

그 말은 - 인간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유능함, 선함, 자기 의, 자기 능력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자도,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면.. 택함 받은 자요,

세상에서 실패한 자도, 자기 의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오면.. 버림받은 자이다.


에서, 가인, 맏아들은.. 자기 의를 주장할 만큼 유능, 똑똑, 탁월, 용맹했고,

야곱, 아벨, 탕자는..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무능, 문제, 유약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의 야곱은, 무능해서 형 에서처럼 사냥을 못 하니까,

도와주는 도우미가 등장하는데, 어머니 리브가이다.


우리의 구원은, 자기의 유능함과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능하고, 누군가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자기업적과 공로를 쌓고,

자기를 계발하고 성숙하여 큰 자가 되려고 한다. 상징적으로 ‘장자’가 되려고 한다.


자기 생각에는 그래야 아버지(하나님)가 기뻐하실 것 같으니까,

그래서 다 장자 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유기시켜 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기꾼 (야곱의 이름 자체가 사기꾼)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신다.


인간의 공로는, 그게 노벨상이든지, 효행상이든지, 뭐든지..

그게 구원을 받을 만큼 자격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 들고 나와서 구원 받으려 하다가는.. 실패한다는 뜻이다. 


오직 사기꾼처럼, 도저히 자기 공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인간,

그 처절한 바닥에 떨어져서,

그런 자신의 상태를 철저하게 자각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이것이 회개)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함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이스라엘 12지파가 이 사기꾼에게서부터 나온다.

아버지 별미를 만들러 열심히 사냥 나간 사람은 유기시켜 버린다.

이게 바로 구원의 도리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잉태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언약을 주신다. 


요만한 행위를 하나 하기도 전에,

그 이유를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신다. 롬9:11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이 작정, 택하시고, 구원하실 자는,

세상에서 점점 ‘어린 자, 작은 자, 야곱’을 만들어 가신다. 섭리로!

실패케 하시고, 좌절케 하시고, 벽에 부딪히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신다.

자기 실상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간절히 붙들라고!


▲이것은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 집안의 존재들의 존재 양태가 다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벌써 자기 능력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다.

자기가 완전히 죽었을 때, 백세나 되었을 때, 그때 후손을 얻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삭을 주심을 통해 표현되었다.)


아버지 이삭 자신도,

그런 하나님의 연약한 자를 택하시는 역사가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사람이다.


이 택하심 받은 이삭의 집안은,

이 세상의 힘이나, 어떤 강함을, 그걸 근거로, 기준으로 흘러가면 안 되는데,

그 이삭은, 사람의 눈으로 봐서 강하고 힘 있는 자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이게 인간의 본능이다.)


그 때 언약이 개입한다. ‘그거 아니잖아’ 하고 이삭을 방해한다.

그 하나님의 개입이, 리브가를 통해 나타났다.

리브가가 연약한 야곱을 위해서, 이삭에게 드릴 별미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리브가가 에서라는 장남이 미웠을까? 아니라고 본다.

둘 다 쌍둥이다. 지금 리브가는 언약의 수행자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 능력이 없는 연약한 야곱 대신에,

어머니가 별미를 만든다.


이때 야곱이 한 일은, 멍하니 가만히 있은 것밖에 없다.

엄마가 아버지 별미 만들어 주었고,

(예수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제물이 되셔서 별미를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다.)


옷도 야곱이 스스로 입은 옷이 아니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을 때) 리브가가 에서의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혀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옷을 벗어서 제비 뽑아 가지라고 하셨나?

‘내가 벗은 옷, 너희들이 입고 와야,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 이 교훈 주신 것이다.


여기서 ‘에서의 옷’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야곱은, 자기 옷(자기 공로)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옷 입고, 예수 라는 별미 아버지 앞에 들고 가는 사람이 성도다.

거기에 자기가 만든 옷 조금이라고 입고 들어가면, 그 사람은 천국 못 들어간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주인이 준 옷 안 입고 있던,

멋진 자기 옷 입고 있던 사람 잔치 자리에서 쫓아냈다.

그들이 쫓겨나서 바깥 어두운 데서 왜 자기 이를 갈까?

(어두운데 쫓겨나더라도, 이를 갈 필요까지는 없을 터인데.. 뭔가 분한 게 있다는 뜻이다.)


‘내 옷도 괜찮은데, 왜 나를 내쫓아?’

만약에 자기가 누더기 옷을 입고 왔더라면 ‘내가 쫓겨나도 당연하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갈았다는 것은 꽤나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옷을 입고 간 사람들, 다 쫓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그때 위장을 해서 형의 옷을 입고, (자기 옷, 자기 공로가 아니라는 뜻)

아버지 앞에 섰을 때 이삭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아버지 이삭은.. 그가 야곱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눈을 못 보는 사람은, 특히 귀가 더 발달된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예수의 옷을 입고 선다.

그리고 뭐라 그래야 되느냐 하면,

‘나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예수의 동생, 작은 예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속으실까? (안 속으신다.)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누구인지..

그런데 그 목소리보다, 옷에 관심 가지신다.

‘우리 아들 예수의 옷 입고 왔네? 합격, 구원!’

이것이 구원의 도리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보고 구원하신다. 소름끼치지 않으신가?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할렐루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입고 온 옷을 보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 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


그런데 형의 옷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 옷 속의 알맹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걸 우리 인생 살 동안에 겪는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인생을 살 동안에, 자기 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입고 가야하는지.. 우리가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인생 살 동안, 절벽아래로 계속 우리를 밀어 버리신다.

깨어져서 '자기 옷'(자기 의)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 옷(자기 공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옷이 뭔가 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못 버린다.

더 꾸미려고 치장한다.

그래서 임금님의 잔치자리에, 그는 자기 옷을 입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져서, 자기 옷이 완전히 누더기가 된 사람은,

비로소 형의 옷을 대신 입으려고 스스로 원하게 된다.

‘나는 사기꾼 야곱이야. 내 옷으로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없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는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이 다 찢어버리신다.



◑축복 받은 야곱, 그 이후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와 얍복강 가에 도달했을 때,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씨름하게 된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와 씨름하시는데,

야곱이 하나님께 지지 않는다.

이것이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의 고집이다.

 

나는 절대 나를 포기 못 한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못 이기신다.

결국 그를 죽이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환도뼈를 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져 주셨다.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

이것은 오명이다. 좋은 이름이 아니다.

이 고집불통, 나쁜 놈이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성도)의 이름을 '영적 이스라엘'이라 일컫는다.

그 오명을 그대로 갖다 쓴다. 


왜 그 이름이 우리에게 붙여져 있나?

성도들은 뭐 잘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교회로 불러진 것이 아니라,

 

나와 싸워서도 이기려고 하는 자들 중에,

그 나쁜 사람들 중에.. 내가 은혜로 택해서 교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할 자는 없으시다. 다만 자기가 선하고 훌륭하다는

즉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만 빼고는..)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나쁜 사람들, 고집불통)이다.

 

그 신이 되어버린 나, 하나님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나,

그 나를 죽이러(야곱과 씨름하러)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신다.


그리고는 나에게 전쟁(씨름)을 선포하신다.

그리고는 이 사람 육의 사람, 이것을 죽여 버리고

예수 안에서 몸과 몸이 하나가 되어 새 몸으로 나를 만들어 내신다.

 

그래서 필요하면 나의 환도뼈를 쳐 버리신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 한다.


야곱이 이제 형을 만나서 형 앞에 가서 무릎 꿇는다.

그리고 '내 주여' 라고 부른다. 어떻게 된 것인가?

예언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그랬는데, 왜 야곱이 에서에게 절하나?


하나님 나라의 진짜 큰 자는, 이 세상에서 '작은 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에서같이 세상에서 멋지게 안 살아도 된다.

진짜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이 땅에서 낮은 자리에서, 보잘 것 없이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에서가 야곱을 섬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장자로 택한 이상, 그는 장자, 하나님의 아들들,

즉 ‘장자들의 총회’의 일원이 된다.  히12:23


그래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을 어긋나게 축복한 것이다.

요셉이 야곱을 제지하자

‘나도 안다. 그러나 놔 둬라. 이게 맞는 거야’

야곱이 왜 그랬을까? (또는 성경이 무슨 메시지를 주려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큰 자는, 하늘에서 작은 자이다.

이 세상에서 작은 자가, 하늘에서 큰 자이다.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큰 자,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 잘 듣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 받으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기 행위를 갖고 아버지를 탄핵한다.

‘아버지 내가 이렇게 잘 했는데, 왜 나을 위해 잔치 한 번 안 해 주시나요?’


그러나 둘째는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하고 돌아왔다.

돼지를 치면서(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동물) 세상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노예가 되어 돌아온다.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 나 죽여도 괜찮아요.’ 라는 뜻이다. 죽으러 집에 돌아온 것이다.

둘째는,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바로 이 '작은 자'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요,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진짜 장자(맏아들)이다.


아버지 말 잘 들었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다.

그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요, 기독교다.

기독교인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

예수 안에서 예수 옷 입은 자로 그 복음을 누리면 된다.


‘아니, 그러면 방종하며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탕자의 논리를 옹호한다고 질문하실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탕자, 그래서 구원 받은 탕자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방종이 조장되지 않는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인간의 행위가 뭐가 그리 대단한가?

사도바울이 자기가 율법의 모든 규례를 흠이 없이 행한 것을 가지고 배설물이라고 했다.

그게 진짜 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외식적으로 흠이 없었다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이다.

그 개똥 같은 선행 몇 개 내놓고 자랑하면 안 된다. 함부로 위장하면 안 된다.

선행은 내 속에서 주님이 이루어 가신다. 거기에 순종하며 살면 된다.                ▣ 복음 관련  

 

 

*관련글 : 가인과 아벨 http://blog.daum.net/yhbg67/6906606                           로마서5회1:00~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