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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붙이시는 (가나안 정복) 전쟁

LNCK 2011. 2. 17. 12:42

www.youtube.com/watch?v=QxEtDr05w3I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        삿1:1~10     10.08.13.설교녹취

 

이 해석이 맞지만 110% (약간 초과) 신학적 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이스라엘은 순전히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실제화하여 살아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그 삶의 원리대로 우리는,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

은닉되어 있는 겨자씨, 누룩 같은 하나님 나라를,

그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인 십자가 원리로 살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 땅에서 실제화Actualize 하여 살게 된다.

 

바로 그 삶의 이야기를 사사기에서 아주 확실하고 깊게 설명해 주고 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 땅에서,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이 실현되어지는 땅을 살 때,

그 성도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주 재미있는 그림과 등장인물들로 설명해 주신다.

 

기드온의 3백용사, 드보라의 용맹, 삼손의 타락.. 이런 것을 캐치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로 사사기를 해석해야 한다.

 

사사기에서 우리는 예수를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불가능함이 어떻게 폭로되는지를.. 고통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으로 사사기가 시작한다.

 

삿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사기는..

보이는 하나님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제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그리고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런데 모세도 가나안 진입을 완료하지 못하고 하차하고,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을 완료하지 못하고 죽는다. 둘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도록, 아직 생생하고 팔팔한 모세를.. 120세에 죽도록 섭리하셨고,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도 정복전쟁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을 때.. 110세에 그가 죽도록 섭리하셨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만 그 역할을 마치고,

실체는 아님을 불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게 그 두 지도자는,

인간이 얼마나 미완료적 존재이며, 불가능한 존재인 것을 보여주고 생을 마감했다.

(그리스도는 완전해서 십자가 사역을 완료했지만,

두 지도자는 위대했지만, 그리스도만큼 완벽한, 구속사역을 완료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없이 치러온 상태이다.

거의 대부분의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잔당들만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쫓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조금 남겨둔다. 이게 인간의 연약함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사, 가드, 아스돗 등지를 남겨두었다.

 

그 결과 나중에 삼손은 가사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

가드에서 골리앗이 나온다.

아스돗에서는 법궤를 빼앗기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자기 욕심을 쫓다보니, 전부 진멸하라고 하신 것을 조금씩 남겨 둠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그 남겨진 것들이 점점 켜져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짓밟히는 일까지 벌어진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 주위에,

    아직 진멸(잘라 버려야 할 것)해야 될 것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있는가?

    나중에 그것으로 인해 반드시 괴로움을 당할 날이 올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의대로만 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또 조금 남겨두었다가 또 얻어맞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그들의 부족함을 드러내시고, 또 은혜로 건져내신다.

그게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역사요, 성경전체의 역사요, 인류역사요,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역사이다.

 

사사기가 한 330년 동안에 벌어진 역사의 이야기인데,

그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반복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그 하나님 나라 전쟁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체험학습을 한다.

그게 우리의 인생과 똑같다. 우리도 체험 학습한다. 십자가를!

 

    여기서 ‘십자가’란 말은,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쳐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범죄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의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는.. 그런 뜻이다.

 

 

◑1. 유다지파의 승리에 공짜로, 은혜로 동참한 시므온 지파

 

오늘 본문 삿1:1~10절에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게 전쟁을 명령하시고, 시므온 지파를 따라붙게 하신다.

 

(이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관계 하나만 붙잡아도,

사사기 전체 내용이 사실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12 지파 중에, 왜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가 사사기 서론에 등장할까?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의 참 예수님이 나올 지파이고,

시므온지파는 유다지파에 의해 저주를 모면하는 그러한 교회의 모형으로 등장한다.

 

▶유다 지파

장차 유다지파에서 다윗과 그리스도가 나온다.

 

창49:8 (야곱의 임종 예언)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메시아)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유다가, 다른 지파의 왕이 되어서, 홀을 쥐고, 치리자의 지팡이를 간직한 채

메시아가 오기 까지, 그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게 된다는 예언이다.

실제로 거기서 다윗이 나와서, 예수를 좀 더 확실하게 모형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유다지파 출신인 참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시고  :11a

옷을 포도주에 빨며 나타나서 (십자가 질때 그 피가 옷에 다 적셔짐)  :11b

십자가를 질 것이 예언되어 있다.

 

본문 삿1장의 유다지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한다.

 

▶반면에 시므온 지파는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

 

창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저주 받을 자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흩어지게 되는 자들,

이스라엘에서 나눈다(흩어진다)는 뜻은 ‘죽는다, 멸망 받는다’는 말이다.

저주받아 멸망 받을 자들의 모형이 시므온이다. 즉 우리들의 모형이다.

 

자신의 자존심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죄인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자가 시므온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하나님/신앙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게 죄인의 실상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를 받아 흩어지게 된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그래서 흩어져서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유다 지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다시 끌어 모으셨다.)

 

사사기 서론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다 지파인 예수에 의해, 유다지파의 승리의 잉여를 시므온이 나누어 받는 것이다.

 

 

▶아무 공로 없이, 유다(예수님)지파의 승리의 혜택만 챙긴 시므온지파(성도, 교회)

본문에 유다지파가 가나안 남은 족속과 전쟁하러 나가는데, 시므온지파가 함께 출전한다.

 

삿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주1)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그런데 유다지파가 전쟁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 기사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삿1:4~10을 찾아서 읽어보시라. 주2)에 있음

 

그런데 시므온이 전쟁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본문 삿1:4~10절에 단 한마디도 안 나온다.

두 지파가 같이 올라갔는데, 전쟁은 전부 유다 지파만 했다. (신기하게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시므온 지파는, 전쟁에 동참한 자로서 승리의 잉여만 받아 챙겼다.

그게 교회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지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창49장에서 살펴보았다.↑)

    시므온지파는 교회(성도, 우리)의 모형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우리가 그저 참여하는 것이다.

 

이걸 은혜라고 한다.

십자가의 잉여증폭기에 의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성도의 이야기! - 이것이 사사기다.

 

이것을 사사기의 서두에서

벌써 유다, 시므온 지파 얘기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므온은 야곱의 예언대로 흩어져야 한다. (그래서 신약에서 제자들이 다 흩어졌다.)

지리멸렬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다지파의 승리의 기업(잉여)을 선물로 받아 겨우 존재한다.

그게 바로 신약의 교회이다. 그게 성도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서두에도

유다지파의 후손인 예수가 탄생할 때,

노인 시므온이 등장하는 것이다.

본문 삿1:3절의 반복인 것이다.

 

 

◑2.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책이다. 마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처럼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24장과,

우리가 공부하는 사사기 서두를 연결해서 살펴보자.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상기시킨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약속했다.

자신들은 죽어도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 대답을 듣고도, (마치 콧방귀를 끼듯이 말했다. 진짜는 아님)

‘아냐, 너희들은 못 섬겨!’ 그 말 하고 죽었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을 보는 것 같다.

‘선악과 먹지 마, 요것만 안 먹으면 너희들은 살어!’

그런데 아담은 꼭 그 먹지 말라는 그것을, 먹고 말았다.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역시 똑같았다.

죽을지언정 저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해 놓고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부인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절대 ‘자기 의와 공로로 구원 못 받는다.’

본문의 이스라엘도, ‘지키겠다 해 놓고는, 결국 못 지켰다.’

 

그래서 사사기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담도, 베드로처럼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 연약한 인간의 실상을 절실히 인정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24 그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붙들라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자가 주장하는 사사기에 나타난 십자가의 도)

‘나는 그래도 깨끗한 진흙이야!’ 하지 말고!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마치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연거푸,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운다. ↑

아니다. 우리는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결말을 알듯이, 다 자기 소견대로 행하고 말았다.

 

아래 구절에서 보듯이, 사사기 시대에서

그들은, 여호수아의 말대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한 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실패한다.

 

삿2: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그러자 하나님은, 이방민족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들 가운데 남겨두셨다.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삿2: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이방과 계속 전쟁을 붙이신다. (설교문 제목)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과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이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행한 가나안 정복전쟁이나 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내 말을 듣나, 안 듣나 한 번 너희들 스스로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광야 인생, 또한

가시와 엉겅퀴 같이 괴롭히고,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이방민족이 왜 내 주변에 존재하는가?

 

‘나는 하나님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자구나.. 그래서 유혹에 또 넘어가는구나!’

‘그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내가 또 이렇게 괴로움의 대가를 치르는구나!’

 

이것을 폭로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간절히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 되네?’ 이게 아니라,

‘참 지지리도 안 된다. 참고 참다가 또 한 방에 넘어지는 구나!’

이런 것을 수시로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들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그러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부어진 심령은, 점점 더 영적성숙/성화의 삶으로 승화된다.

 

정리하면,

철저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 언약, 수24장)

그 언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 사사기 전체 내용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이미 아셨다.

그래서 가나안에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님이 다 쫓아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인간이 자기 연약함을 깨닫고,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해서,

영적성숙은 물론 사사들을 그리스도의 모형 통해서 구원의 자리로 나가아가는 것이

사사기의 메시지이다.                                         

 

................................

 

 

주1)

이렇게 유다지파가 출전할 때, 시므온지파를 초대한 것은,

앞서 여호수아의 땅 분배 때 예언되어 있었다.↙

 

수19:1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주2)

삿1: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위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9 그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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