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니엘과 악사 삿1:11~15 인터넷설교일부녹취
신학생용입니다.
◑갈렙의 전쟁에 투입된 ‘옷니엘’의 상징적 해석
▶삿1장에서 옷니엘의 등장 이유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이다. 갈렙의 막내 동생의 아들이라고 한다.
‘옷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만 나의 힘’이다.
내 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나의 힘이다.
그러니까 85세의 갈렙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가 나의 힘’이었지, 내 85세된 노구老軀가 자기 힘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갈렙의 전쟁뿐만 아니다.
갈렙의 전쟁이 예표하는 다윗의 전쟁, 예수의 전쟁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의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전쟁에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앞서 가시듯이
옷니엘이 동행해 준다.
‘여호와만 나의 힘’임을 믿고, 우리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갈렙이 거인 아낙 자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삿3장에 가면, 옷니엘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는 사사(작은 예수)로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삿1:11~15절에서는, 갈렙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악사’에 관한 상징적 해석
▶옷니엘이 악사를 차지한 것의 영적 의미
옷니엘은 거인 아낙 사람들을 완전히 다 몰아내고
갈렙이 내건 약속대로 갈렙의 딸 악사를 차지한다. 삿1:1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랑이신 어린양이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대적을 다 쫓아내시고
교회라는 신부를 건져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세우신다.
이것은 영적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데,
이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신부가 된 교회이다.
▶그렇게 옷니엘의 신부가 된 악사가 아버지 갈렙에게 밭을 구한다. 삿1:15
그래서 갈렙이 악사에게 남쪽의 네게브 사막 땅을 준다.
가는 길에 갈렙이 악사에게 불었다. ‘뭐 더 필요한 것 없니?’ :14
그때 악사가 ‘아버지 저에게 복(바라크)을 주세요!’ :15
그때 갈렙은 악사에게 샘을 주었다.
신부된 성도가 이 땅에서 구해야 되는 ‘복’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복’도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성도가 끊임없이 다른 복을 구한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 참 복인 생수(샘물)를 주신다.
그게 요한복음의 ‘내가 물이다 나를 마셔라’인데, 그 샘이 여기 삿1장부터 등장한다.
▶신부에게 주어지는 복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 믿어 신부가 된 교회가
신랑으로부터 얻게 되는 상, 복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예표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사기 전체의 문제가 여기에 함축적으로 나와 있다.
이스라엘이 구해야 하는 복은, 샘물이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신데,
또한 하나님이 신부에게 주시는 것도 ‘샘물’이다. ※이런 관점으로 다른 구절도 앞으로 찾아볼 것임.
그런데 이스라엘은 샘물이 아니라 엉뚱한 ‘철병거, 우상’ 이런 것들을 구하다가
그 결과, 어떤 일을 겪는가? ..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부에게, 은혜로, 샘물을 주신다.
그게 옷니엘, 악사 이야기로서
사사기 서두를 장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옷니엘은 ‘여호와만 나의 힘’이란 뜻으로,
갈렙의 전쟁은 오직 ‘여호와만 나의 힘’으로 삼고 치르는 전쟁이며,
악사가 출가할 때 복을 구한 것은,
신부된 교회가 얻는 복은 ‘샘물, 생명수, 생명’이라는 것이다.
확장하면,
‘여호와만 나의 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전쟁하면.. 지게 되고,
‘샘물’ 말고 다른 복을 구하면..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편집자도 이런 상징적 해석은 처음 들어봅니다.
앞으로 차츰 논의가 확대되면서, 결국 성령의 인도로, 올바른 성경 해석이 제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적용 / 악사가 구한 '복'과 관련해서 타이타닉 이야기
▶보석이 많은 사람들은, 구명보트에 타지 못했다.
1912년에 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타닉 호의 닉네임은 ‘바다위의 궁전’이었다.
세계의 대부호들이 엄청난 보석과 돈을 가지고 그 배에 탔다.
유람선에 타면, 사람들 눈에 제일 관심 없는 것이 구명조끼, 구명보트, 튜브 등이다.
유람선에 타서 흥분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안 쳐다본다.
그러나 여러분, 그 배가 파선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걸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샘’이다. :15
이 땅이 영원할 것 같고, 이 ‘바다위의 궁전’이 영원할 것 같은 사람들은
그 구명조끼 구명보트 따위는 눈여겨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다 빠져 죽는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그렇고.. 결국 나는 지금 난파선에 승선해 있는 셈이다.
타이타닉 호에서, 정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단한 도박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정말 세상의 대부호들이
일반 사람들이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보석들을 엄청 갖고 탔다고 한다.
(집에 놔 두면 위험하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배 안에 직접 보관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명조끼 구명보트가 무슨 관심의 대상이었을까?
그런데 딱 사흘 만에 이 배가 빙산과 부딪혀서 파선되는데,
돈과 보석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은.. 구명조끼, 구명보트에 쉽게 타지 못했다.
막판에 그 보석 챙기느라 바빴던 것이다. (이걸 남 얘기로 들으시면 곤란하다)
그러나 그 배의 3등석, 일반석에 탔던 사람들은,
그 일등석에 탔던 부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그 도박판에 입장이라도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라며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 티코 같은 인생, 언제 저 벤츠 자리에 올라가나?’ 하며 한숨 쉬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가 두 쪽이 나서 가라앉으니까,
대부호나, 3등석 인생이나.. 똑같은 신세였다.
구명보트 없이는 똑같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이 ‘지구호’라는 배는 곧 깨진다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계신다.
‘타이타닉아, 지구호야! 이제 얼마 후면 깨진다. 구명조끼 챙겨라!’
만약 그게 진짜인줄 알고 대비한 부자가 있었다면,
자기 손에 든 것 다 털어버리고, 그 구명조끼, 구명보트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예감조차 못했고, 아무도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다가.. 다 죽었다.
마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관심이 달라져야 한다.
마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심판이 오기 전에는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좋은 밭을 갖고 있느냐, 아니면 소작농이냐?
누구의 밭의 소출이 많으냐/적으냐를 갖고서.. 두 사람이 서로 일희일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배가 난파될 때가 되면,
그가 아무리 좋은 밭을 갖고, 아무리 소출을 많이 내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구명조끼를 입었느냐, 구명보트에 탔느냐? - 그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두 여자가 같이 맷돌 갈고 있는데,
그 맷돌에서 무엇을 갈아 내느냐, 콩을 가느냐/팥을 가느냐가 굉장히 큰 관심사였는데,
‘난파’ 후에는 누가 남고, 누가 떠났느냐가.. 이게 중요하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구하고,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일평생 제 욕심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막상 임종이 닥치면 전전긍긍한다.
▶주님의 처방 - 그래서 고난을 주신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에, 어느 날 주님이 뚫고 들어오셔서
‘너희들 예수 안 붙잡으면 큰일 난다’를 가르치신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꼭 붙들고 있는 것들을
주님이 과감하게 다 흔들어 버리신다.
그냥 놔두면, 그 ‘보석’ 붙잡고 있다가, 구명보트에 못 타니까...
그러므로 ‘내가 쫄딱 망했다’ .. 이런 소리 하지 마시라.
망한 것 아니다. 하나님이 깊이 사랑하셔서, 당신의 삶에 전격 개입하신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고 한다. 그게 다 하나님이 하신 일(고난)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천하의 OOO(내 이름)이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이렇게까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구나...’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 세상 것들은 들풀의 꽃처럼 쉽게 피었다가 금방 지는 구나.
이제 난파된 배에서, 내가 정말 붙들어야 될 것을 꼭 붙들어야 되겠구나..’
성도가 고난을 통해서, 그 진리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어느 교회에서 이런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딱 1년 후에 만약 당신의 임종이라면, 남은 1년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세요!’
-남에게 좀 더 많이 베풀고,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좀 더 챙기고, 좀 더 추억의 따뜻한 시간을 보내다가 가겠습니다.
-주님을 좀 더 많이 사랑하고, 참 신앙을 갖고 살다가 가겠습니다...
-(좀 더 돈을 열심히 벌겠습니다... 이런 결심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1년이 지나서, 다시 자기를 되돌아보니,
대부분 누구도 그 결심대로 살지 못했다고 한다.
다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이 딜레마.. 무엇이 원인일까?
그가 직분자이건/아니건, 성령을 받았든/아직 안 받았든
정말 구원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정말 천국백성 된 성도는... 천국을 지향하며 산다.
그러나 그게 불분명한 성도는...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계속 폭로시키시고,
그 다음에 사사를 보내서, 사사를 예수님 예표 붙잡게 하신다.
그리고 평안함을 허락하시다가
이스라엘은 또 타락해서 이방에 짓밟히고..
또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시고, 평안을 얻다가.. 이스라엘은 또 타락한다.
세 번 네 번 타락하면.. 나 같으면 이스라엘을 그냥 다 멸망시켜 버릴 것 같은데
그게 사사기 끝까지 7번, 8번 계속 반복된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게 반복해서 깨지고 실패하면서, 점점 우리가 성숙되어져 간다.
그래서 ‘결국 예수만 붙잡아야 사는 구나! 우상 붙잡으면 죽는 구나!’를 깨닫게 하신다.
▶가나안에 다 쫓아내지 못하고 남겨둔 것은, 그들의 우상
이스라엘이 남겨둔 것의 실상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벧세메스.. ‘태양의 집’이란 뜻이고,
벧아낫.. ‘아낫 여신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삿1:35절 ‘헤레스 산’은 ‘태양의 산’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실패는, 단순히 그 땅을 점령하는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타파하는 그 거룩한 성전聖戰에서 실패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우상을 버리고/진멸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은 죄와 마귀에게 짓밟혀 고통을 당하다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결국 그리스도만을 붙잡게 된다.
◑하나님은 '오복' 보다 '해산의 고통'을 주신다.
▶고난의 유익
그래서 그 우상 끊어내기 위해 하나님이 백마 타고 나타나신다. 계19장
때로는 성도에게 공격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경각시키는 바로 그 간섭, 그것을 고난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잘 참으시라. 잘 견디시라.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원어로.. ‘누구나 다 겪는 고난’이란 뜻이다.
아~ 나만 특히 더 어려운 고난당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모든 성도는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제일 힘든 시험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두가 다 똑같다.
그러니까 성도의 고난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인지 폭로당하는 현장에서의 고통과
-그 현장을 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데,
이걸 둘 다 합쳐서 고난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폭파 당한 현장, 내가 그렇게 폭파되는 현장에서
새 생명이 잉태되고 탄생한다... ↓
▶그게 성경에, 여인이 아이를 낳는 장면으로 상징되어 나온다.
여러분, 엄마들이 아기를/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먼저 엄마의 몸이 폭파되는 것이다.
그게 예수의 삶이고, 성도의 삶이다. 그게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증명하는 자로 사는 게 아니라, 폭파당하는 것이다.
내가 폭파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새 생명이 출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신부’라고 부른다. 신부는 반드시 애를 낳아야 한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여자가 아이를 낳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예수였다. 철장을 갖고 만국을 다스릴 분이니까!
(‘아기’는 예수를 뜻하지만, 작은 예수인 성도도 뜻한다)
그 여자는, 교회 성도 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것인데
이 말은, 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작은 예수가 잉태되면,
그 출산 과정에 여자의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해산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고난에는 그런 2중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만 붙잡게 하시려고
-또한 작은 예수들을 출산케 하시려고.. 고난의 진통을 주신다.
그게 얼마나 극심한 고난인지, ‘산고’에 비유하는 것이다.
▶임산부는 멋 안 부린다. 부릴 수도 없다. 멋 부리면 애 못 낳는다.
그렇게 내가 폭파되는 현장에서 새생명이 딱 나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
그렇게 여러분이 임신기간 동안에 겪는 그 폭파의 현장이.. 우리 인생이다.
그때 임산부가 멋 부리겠다고 .. 그럴 필요 없다. 그냥 폭파당하시면 된다.
괜히 산모가 멋 부리고, 허리 졸라매고 하다가.. 그러면 애 못 낳는다.
성도가 그 자리로 끌려내려 간다. 뭐 창피할 것도 없다.
옛날 같았으면 망하고 병 걸리면 부끄러워서 집에서 숨어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교회 와서 ‘나는 망했어!’라고 스스로 입으로 폭파되었음을 시인한다.
옛날 같았으면 화장cosmetic해서 다 감추었을 것이다.
‘나는 잘 되고 있어, 무조건 잘 되고 있어’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망신당하기 싫으니까..
점점 내가 폭로되는 것에 자유로워져야 한다. 성도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왜 안 부끄러워요?
예수의 은혜가 나를 덮고 있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미 완료시켜 놨다는 확신과 믿음이
나에게 뚫고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폭파됨이 안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게 예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로
완전히 하나님 앞에 절대 의존적 존대로 비워져 가는 것이
내가 지금 작은 예수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이고,
결국 완전히 비워질 때, 작은 예수가 탄생되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작은 예수로 올라간다. 하나님은 예수만 사랑하시니까.
그 과정에 우리가 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어야.. 세상이 산다.
요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성도가 곡하고 애통하면.. 세상이 기쁘게 되고
우리가 근심하는데,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내가 죽어야 누군가 살기(해산되기) 때문이다.
즉, 내게 사망이 역사할 때, 세상에 생명이 역사하는 것이다.
내게 해산의 고통이 임할 때, 다른 사람에게 새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이 자리로 가는 것이다. 성도는, 이 해산의 자리로!
다시 말해서, 성도는 필연적으로 해산의 고통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2:15에서 이렇게 말한다.
15 그러나 여자(신부, 성도)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성도가 믿음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믿음이 성도를 끌고 가는 중이라면,
성도는 반드시 해산하게 되고,
그 해산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는다.
그러니까 산모 생활이 괴롭다고 너무 징징거리지 마시라.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제/설교자가 오늘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어제 참 감동적인 메일을 몇 통 받아서 그걸 가만히 읽어보면서,
요즘 제가 굉장히 많이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 죽음의 현장에서 제 설교를 듣고 살아났다는..,’ 그런 고백들을 메일로 받으면서,
새벽2시에 일어나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사실 제가 너무 지나치게 예수를 십자가를 보혈을 강조하다가
사람들 마음에 너무 상처를 주는 것 아닌가?.. 저도 그런 갈등이 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이가 자기 죽음 앞에 당도해서
그 복음 때문에 그렇게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라는 그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맞구나 죽음 앞에서 가치 있는,
죽음 앞에서 구명조끼 되는 복음이 진짜이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 끄는 그게 무슨 복음인가?’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말씀이 내게 떨어질 때 아파야 한다.
그렇지만 내 묵은 딱지들, 내 디팬스 메카니즘(방어기재)들이 ▣ 복음 관련
아프지만 하나하나 벗겨져 나갈 때, 거기서 새 살이 돋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오직 예수만 꼭 붙으시라. 사사기강해2강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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