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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기쁨으로 섬긴다

LNCK 2011. 2. 23. 23:54

◈고수는 기쁨으로 섬긴다         시4:1~8             10.11.10.설교스크랩, 편집

 

 

◑주님을 섬기면서 꼭 간직해야 할 마음 - 기쁨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지켜야 할 마음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

처음 가졌던 순수한 마음, 사명을 향한 열정...

 

그러나 이런 마음 중에서 우리가 쉽게 여기며 잊어버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 입니다.

 

▲성자의 조건, 기쁨

가톨릭에서는 기독교와 다르게 훌륭한 사람을 성자로 숭배합니다.

성자는 주로 죽은 후에 불러지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을 성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성식’이라고 합니다.

시성식은 그 사람이 죽은 후, 가톨릭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행적을 점검하며, 그 사람을 성자로 부를지에 대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의 생전의 업적을 조사하면서, 꼭 한 가지 점검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그런 일들을 하면서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가톨릭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전부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쉼 없이 일하고, 그렇게 많이 일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쁨으로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주의 일을 많이 하면서 지치고, 짜증내고, 사람과 다투면서 일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 옆에서 웃으세요.

큰 교회 건축을 끝내고 나서, 너무 고생하신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밤이면 울었고, 낮이면 웃으며 교회를 지었습니다.>

 

사업적으로 큰 시련을 이기고난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울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웃으며 살았지요.>

 

그렇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웃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반대로, 오늘 내가 사람들 앞에서 웃지 못하고, 도리어 인상 찌푸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일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아내와 함께 기도한 제목 중의 하나가 기쁨이었습니다.

 

제가 개척을 하면서, 한one 목사님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개척에 대한 절망과 후회의 글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개척하지 말라! 개척하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개척하려면 많은 후원자를 모집해 놓고 시작해라.

 

나는 지금 지하교회에서 7년간을 목회했는데도, 성도가 열 가정도 되지 않는다.

전도를 해서 조금 사람이 많아지면, 금새 다른 큰 교회로 빠져나간다.

 

내가 왜 개척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누가 개척한다면 도시락을 싸서 들고 다니며 말리겠다.

이제 나는 설교 준비도 안 한다. 설교 준비를 해서 누구에게 들려주겠는가?

 

읽은 지가 오래 되어서 그 내용을 전부 기억은 못하지만

아마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글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낙심이 되어서, ‘교회개척’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생겼습니다.

 

이 글을 쓴 목사님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역시 개척교회의 목사의 아들로서,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 청소년기를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왜 이 목사님에게 기쁨이 없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우리는 정말 기쁘게 개척을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로 주변 사람들이 ‘개척이 얼마나 힘듭니까?’라고 제게 물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기쁨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개척을 하면서 그 기쁨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압박, 육체의 한계, 아내와 단 둘이 드리는 예배, 주변 사람들의 조롱...

이런 것들이 견디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도 이 기쁨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주의 일을 하면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4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의 기쁨이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기쁨

 

▲1절,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시는 주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1

 

다윗은 자신이 곤란 중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곤란’이란 히브리어의 ‘차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의미는 ‘좁은’이란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좁은 곳에 끼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막다른 골목’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당장 내일 닥쳐오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보셨습니까?

당장 내일 집세나,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 해 본적이 있습니까?

당장 내일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육체의 병으로 인해

꼼짝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놓여진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1   

 

너그럽게 하다는 말은 ‘라하브’입니다. '넓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차르’가 ‘좁은’ 이라는 의미였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좁고 막다른 골목에서, 넓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쁨은.. 슬픔이나 곤란 후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곤란도 겪도록.. 섭리로 허락하십니다.

 

시126편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그 때 기쁨의 단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오늘 기쁨이 없는 것은, 역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요,

오늘 눈물과 곤란(:1)이 있는 것은..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6;20

기쁨을 주시기 앞서, 만자 근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2절, 비판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다윗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2

 

여기서 인생들이란 단어는 ‘이쉬벤’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쉬벤은 남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남성들이 아닌, 지도자들이나 우두머리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지금 다윗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조금의 위기 상황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적들이 있었고,

비록 다윗 앞에서는 그에게 굽신거리는 것처럼 하지만

계속해서 거짓과 모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부흥이 올 때마다

부흥의 주역들이 먼저 비판을 받는 일이 았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이 오리라고 아무도 판단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제시 펜 루이스를 비판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제시 펜 루이스 여사의 비판받던 설교는

너무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반 로버츠가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그 안에 터질 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고자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 챈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조차 마지못해 사람이 적게 모이는 수요 강단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부흥이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지금 당신은 비판을 당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훌륭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 당신이 제대로 ‘복음 사역’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다윗은 자기 시대에 복음을 충실히 증거 하였던 사람입니다.

먼저는 자기 성품으로 ‘예수님의 모형/형상’을 보여주었고,

또한 시편을 써서, 모세5경의 말씀을 완벽하게 재해석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뛰어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동력은,

‘비판받음과 고난당함’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렴풋이 자기도 모르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시가 대표적으로 시22편입니다.

 

그래서 슬픔도 .. 성도는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비관으로 시작해서.. 낙관으로 끝마칩니다.

거의 모든 시편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서두에는 비관/울분/탄식/억울함의 호소/괴로움/울음으로 서술하지만,

 

중반부터 문체가 180도 바뀝니다.

그래서 감사/찬양/기쁨/노래로.. 시편이 마쳐집니다.

 

1~2절에서, ‘괴로움’을 토로한 다윗은

3절부터 반전되어 응답/확신/기쁨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3~5절, 자신감이 넘치는 다윗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3~5

 

다윗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충고합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범죄하지 말고,

나에 대한 공격, 특히 말의 공격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윗의 자신감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옮겨 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 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지금의 시련에서도 높여 주신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저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공동체에 들어가면

자기가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주고, 자신의 지식을 높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리숙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저를 얕보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반드시 저를 높여 주십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몇 번 한 후에는 사람들의 조롱에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신원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총애해 주심을 알기에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다윗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7

 

다윗은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을,

추수 때에 곡식과 포도주를 거둬들이는 기쁨에 비유합니다.

 

여러분! 농부가 추수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농부들 중에는 모내기를 하거나 씨를 뿌릴 때는

표정이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할 때 농부들의 표정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다윗은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이 이런 기쁨보다 더하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지금 다윗은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앞두고 근심 가운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육신과 마음이 지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을 신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자기편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 안에 있는 평안함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8

 

▲마치는 말

서두에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사람 앞에서 웃었다’는 간증을 소개했습니다.

지금 다윗이 꼭 그렇습니다.

1~2절에서 (특별히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토로합니다. 울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3절부터 (마지막 8절까지)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4~5

 

그리고 하나님도 기쁘게 섬기고 있습니다.  :6~8

 

운동선수, 음악가, 또는 다른 분야의 대가들은.. 항상 웃습니다.

그 보다 한 수 아래는, 악을 쓰면서, 또는 인상 쓰면서 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들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면에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고수’입니까, ‘한 수 아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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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기쁨을 돕는 자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dominion하려는 것이 아니요

너희 기쁨을 돕는 자helper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4)

 

한국 사람은 출세 지향적이며, 무엇을 하든지 <세력 확장>을 원한다.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데 열심이 특심이다.

 

후원교회가 선교사를 '주관'하려고 하고,

선교사가 현지인 사역자를 -자기도 모르게- '주관'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주관하려 하지 않았다.

<돕는 자>가 되려고 애를 썼다. ↑

 

선교의 목표는 '자치, 자립, 자전'이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

'주관자'는 영원히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고, 영구 식민지화하려는 무지한 발상이다.

주관하는 곳에는 '자치, 자립, 자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펀 글)                 ▣ 크리스천 리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