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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과잉행동장애

LNCK 2011. 2. 28. 17:34

신자의 과잉행동장애             출14:13, 행8:1~9           2007.01.21

         

▲신앙의 외줄타기                                                 

*외줄타기 : 좌우로 치우치면 줄타기에서 떨어진다는 뜻

 

       | -| -|-|-|-|-|-|-|-|-

      -5  -4  -3 -2 -1   0 +1  +2 +3 +4  +5 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할 때 

샤머니즘적 기독교                   철학적/논리적/이성적 신학

인간의 열심                            하나님의 열심/예정/주권/섭리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샤머니즘/기복주의/인간의 치성, 노력 .. 신앙이 한쪽으로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친 것이라면,  (-5)

그 반대는 철학적/논리적/이성적/개혁주의 역시 너무 극단의 치우칠 수 있습니다. (+5)

 

샤머니즘, 기복주의가 치우친 극단적 신앙 임에는 다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왜 치우쳤는가 하면,  (폄하 아님니다.)

'믿으면, 다 해결된다'는 신학이 그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맞지만, 극단적으로 잘못 적용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혁/칼빈주의를 따릅니다.)

 

일례로, 서구에서는 '기도원'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다 계신데, 꼭 기도원까지 갈 필요 뭐 있느냐?'는 주장이지요.

 

위 스펙트럼 표를 만든 이유는, 그 중간을 우리 각자가 (성령의 인도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또 우리가 그 어디 쯤에 각자 위치하고 있습니다. (-3. +2 등)

 

그런데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 극단주의 라는 위험성에 빠지게 됩니다.

 

개혁주의(하나님의 열심, 주권, 예정, 섭리, 이신칭의)가 맞지만,

언제나 극단적으로 주장하지 말고, 반대쪽 너머를 보면서.. 스스로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죠. /편집자

 

아래 설교문은, 샤머니즘, 기복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한 글입니다.

위 표에 의하면, 좌측 극단(-5)로 치우쳤다는 것이지요.

 

아래 내용에 모두 동의하실 필요 없더라도,

나의 신념과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 반대되는 의견도 즐겨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의 신념과 신학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아래 설교문이 가지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내용을 너무 '극단적으로 적용'할 때,

그래서 만약에 +5쪽으로 가 버린다면, 

아마 서구 교회가 갔던 길을 따라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래 설교문을 읽으시면서 각자 공부/판단해 봅시다.

 

........................................

 

과잉행동장애라는 말은 원래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라는 말로,

영어로는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라고 합니다.

주의력이 집중되지 못해서, 부산하게 행동하는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장애를 말합니다.


신자가, 어린아이들에게 걸리는 그런 '과잉행동장애'에 걸려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교회에서 이런 봉사하면.. 하나님이 내 사업 복 주시겠지'

'1천 번제 드리면, 자녀가 잘 되겠지..'

'헌금 꼬박꼬박 드리면, 경제적 형편이 쫙 풀리겠지..'   (헌금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전도 나가서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아들 장래 책임져 주시겠지..'

 

     성경의 본질,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자기 내면(온전함, 하나님의 형상 닮기, 그래서 늘 회개와 성찰 하기)은 돌보지 않고,


     어떤 치성을 쌓아서, 가내안전, 사업번창을 이루겠다는 샤머니즘적 신앙을 갖고 있다보니

     신자의 과잉행동장애가 나오는 것입니다.

     집안 일, 직장 일 다 팽개치고, 교회 일에 최우선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지요.

     교회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직장에 가서 쉬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장 동료들에게 미움 받지요)

 

'과잉행동장애'라는 선정적 용어를 쓰는 이유는,

원래 기독교가 그렇게 '힘든 교회 봉사, 빠짐 없는 예배, 헌금'을 요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교회에서 충전하고, 그 충전한 힘으로 각자 세상에 나가서, 자기 사명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잉행동장애'에 걸리면,

교회에서만 자기 사명을 다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교회봉사 하느라 지쳐서 쉬게 됩니다.

 

제/설교자의 간증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날마다 아침마다 기도하면서

 

"오늘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자각합니다.

하나님, 교회를 위하여 이러이러한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해야 된다고 확신하고 있는.. 나의 경험과,

나의 신앙과, 나의 신학적인 지식을.. 다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추진하게 해 주시옵시고

혹시라도 제가 임의로 계획한 것이라면.. 이 프로그램을 중단하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를 매번 드리고, 교인과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교인을 위해서 기도하되

그 교인에게 전화 한번 거는 것까지도

“하나님, 내 마음은 지금 그 교인이 다음 주에는 삐져서 안 나올 것 같고

그래서 전화라도 걸어서 설득을 해야 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는데

 

전화를 걸어야 좋을지, 걸지 않는 것이 좋을지..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를 찾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화되고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합니다.

 

목회에 대한 야망(크게 키워야 되겠다)이 거의 다 없어집니다.

교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아야 되겠다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 교인이 혹시 다른 교회를 가더라도, 

주님 앞에 훌륭한 성도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다른 좋은 교회, 다른 훌륭한 목회자도 많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의 목사의 마음은

분명히 교인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교인의 영혼을 위해서 설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얘기하고, 예수님을 얘기하고, 구원과 은혜를 얘기하고 별의 별 얘기를 다해도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키우고, 그 조직을 비대하게 확장해가기 원하는

마음의 근본 동기에서.. 과거에 제가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작아지더라도, 큰 그림 가운데서 구원역사를 오늘도 펼쳐가시는

그 주님의 섭리에.. 저 자신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건(과잉행동장애)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교인들도 아주 자발적입니다.

교인들 모두가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는 것을 봅니다.

 

충성하라, 봉사하라, 교회에 와서 시간을 오래 보내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 속에 '기복신앙'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과거에 할머니들이 절에 열심히 쫓아다니다가

이제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치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0

이것이 교인들에게 제일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못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너희 삶에 오셔서 활동하기를 원하시는 여호와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라는 이 말씀이

교인들에게 제일 어려운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잉행동장애가 모든 교인들에게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 예산을 어떻게 짤 것인가, 교회 프로그램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교회 구역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교회의 무엇은 어떻게 하고 무엇은 어떻게 하고,

내가 맡은 꽃꽂이는 어떻게 하고, 온통 생각이 다 분산되어버리고..

 

영이신 하나님이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 자식과 나 사이에서, 남편과 나 사이에서,

아내와 나 사이에서, 부모님과의 사이에서, 직장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이고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주의 깊게 보며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주의 깊게 보는 모든 사람들은

잠잠할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14:13

 

'너희는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내게 속했으므로 내가 싸울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너희는 보라. 너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 고 하십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말이 안 됩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평소보다도 더 과도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 아닙니까?

전쟁터에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많은 주의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면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고, 바보처럼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모이기를 힘써라'는 말씀도 있지만, 거기서 끝내지 말고 '흩어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본문 사도행전 8장에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으로 흩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충만했고 말씀이 흥왕했고

단시간 내에 남자만 오천 명의 숫자가 나올 만큼 부흥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무상통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며, 찬양하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핍박을 하셨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롬8:1

 

'흩으지다'는 '디아스페이로'인데,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 자체가 와해되게 만드셨을까요?

 

     '흩으지다'는 말은 없애버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롬8:1

     이 말은 교회를 분산시키셨다는 말이지, 교회를 없앤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는 흩어진 형태로 바뀐 것입니다.

 

'모임'이 과정이라면, 그 결과는 '흩어짐'입니다.

그런데 너무 모이는 데만 '과잉행동장애'를 나타내면..

하나님이 강제로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세요.

     구제하는 일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입니다.

     그런데 이 구제하는 일이 바쁘다 보니까, 소외 계층이 생기면서 불평이 있게 됩니다.

 

     이 불평을 따라 결국 사도들이 결정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씀 전하고 기도하는 일을 내가 팽개치고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사도인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겠다면서 교회 봉사하는 일을 할 일곱 집사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것을 말씀하시는 분은 못 보았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집사가 생기자 마자 일어난 일이 핍박입니다.

     교회가 조직을 갖추자 마자 일어난 게 핍박이고, 그 핍박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가 조직을 갖추자마자 뭉개버렸습니다. 그리고 흩어버리셨습니다.

 

     스테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온 교회가 다 흩어질 정도로 핍박이 가해지는데

     집사라는 조직을 세우자마자 완전히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셨습니다.

 

      (과잉행동장애가 나타나 교회 조직에 너무 열심내면, 하나님이 강제로 흩어버리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목적입니다. 흩어져서 디아스포라의 사명을 감당해라는 것이죠.)

 

▶마치는 말
교인들이 과잉행동장애에 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조직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교제/변화되는 사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을 가만히 서서 보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교회에 충성하겠다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채로, 내면적 신앙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힘들게 봉사, 섬김이.. 교회를 올바로 세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여러분, 누가 바쁘게 움직이라고 하셨던가요?

누가 그렇게 여러분의 충성과 봉사를 원하던가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모두 암묵적 약속이라도 한 듯이,

     <외적 성장>의 길을 힘차게 경쟁적으로 달려 왔습니다.

     그것도 과거에 한 때 필요 했다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앙의 내면화>에 힘쓸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의 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 각자에게, 그것 '내면적 신앙 성장'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과잉행동장애'와 반대 극단으로 
교인들을 아무리 독려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런 괴로움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나는 발견했다. 내가 그들에게 그처럼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듣는 교인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부분 지적이었고 확실히 예의바른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가슴으로 말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가 하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 즉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논평하였으며, 그 모두를 다과회의 잡담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또 일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의 니골라 당이나 영지주의자들처럼

     기독교를 한낱 ‘논쟁거리’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는, 

오직 찬양과 경배, 기도에 집중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야.. 친히 성도들을 만지셔야.. 그들이 성장하는 것이지,

아무리 설교, 목회, 상담해도 안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역시 목회자의 과잉행동장애를 피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