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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해석

LNCK 2011. 2. 28. 13:06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해석             마14:21~32, 요6:16~21        11.02.20.인터넷설교녹취

김성수 목사님 설교 

 

 

성경에서 바다는 ‘저주, 심판’을 상징한다. 창1:2

노아의 홍수 사건 역시.. 바다는 ‘저주, 심판’을 상징하는 예다.

 

그래서 모세가 홍해 바다를 건넜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입성한 것이다.

 

이 저주의 바다를 무색하게 하는 사건이 본문에 등장하는데,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이다.

 

예수께서 그냥 우발적으로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저주의 바다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가시는

구원의 장면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 표적을 통해서, 심판의 바다를       

어떻게 극복하고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는가를.. 예표해서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

 

▲가나안 저편에서, 가나안으로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이 기적은 요단강 동편 광야에서 일어났다.

요단강을 경계로 서편은 가나안이고, 동편은 광야/빈들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은.. 그 동편 광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도, 동편 광야에서 서쪽 가나안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5병2어의 사건은 갈릴리 동편 광야에서 일어났고,

거기서 5병2어의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갈릴리를 건너서,

갈릴리 서편으로 건너가는데, 이것은 모형이다.

 

무슨 모형인가 하면,

어떻게 ‘저주의 바다’를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건너가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어떻게 사람이 구원 받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가? 하는 모형이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데

이것은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입성과 똑같은 그림이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밤 4경까지 베테랑 어부들이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헐먼산에서 찬 공기가 몇 시쯤에 내려와서

갈릴리 바다를 몇 시쯤 덮칠지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베테랑들이 밤4경 새벽까지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갈릴리 호수를 못 건너가고 쩔쩔 매고 있었다.

 

그 의미는, 사람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 항해의 노를 저어도,

그 어떤 전문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사력을 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가나안 땅에 절대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본문은 구원의 사건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6:21

이제 제자들이 다 빠져죽어야 되는 상황에,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셨다.

물에 안 빠지시고, 걸어오시더니

제자들을 보시고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마14:27               

 

‘내니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의 뜻은, ‘그저 풍랑을 두려워 말라’는 뜻도 되겠지만,

상징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구원의 이야기이다.. 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자, 배는 즉시로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immediately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무슨 축지법 같은 것이 일어났는가?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적어도 6시간 이상) 못 가던 곳을

예수님이 배에 타시자, 즉시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 기사가 ‘상징적, 모형적’임을 암시해 주는 증거다.

 

이 이야기는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열심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 분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나가 풍랑 속에 빠진 사건

 

요나서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시고,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느니라. 요12:40

하시면서, 요나의 사건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모형(예표)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요나 사건

요나가 풍랑이 이는 배에 탔다.

(마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듯이)

원래 인생들의 운명은, 그 풍랑 일렁이는 바다에 다 빠져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지금 우리는 큰 유람선을 타고, 또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무섭지 않게 건너지만,

불과 6세기 전만 하더라도 (콜럼버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다에 멀리 나가면, 다 폭포/절벽에서 떨어져 빠져죽는 줄 알았다.

바다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그래서 실제로 지도에 보면, 바다 한 가운데 용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런데 한 사람 요나가, 풍랑에 빠져서, 스올(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는데

그걸 굳이 ‘스올’이라고 했다. 욘2:2

지옥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 ‘한 사람’이 지옥을 경험하고 살아나자,      요나-그리스도의 예표

그가 가서 죽어야 할 자들에게 ‘회개하라!’ 했더니.. 다 회개하고 살아난 것이다. 주1)

 

그러니까 예수님이 저주의 바다, 풍랑 속에 빠져 죽으시듯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분이 ‘사흘’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냈다.

 

사흘을 요나가 물속(지옥)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죽어야 할 자들, 지옥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

이들이 살아서 올라오더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게 구원이다. 이게 기독교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제 저주의 풍랑, 저주의 바다와 아무 관계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풍랑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풍랑 속에서 우리를 건지셨는데, 왜 내 인생에 풍랑이 계속되나?

 

▲1. 일단 풍랑에 대해 담대하시라!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보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풍랑과 관계없는 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풍랑이 있다.

 

우리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살지만 사실은 전부다 풍랑 속을 살아간다.

문제가 하나 해결되면 또 하나 터지고,

하나 해결되면 또 하나 터지고, 이런 세상이 살기 싫어질 때도 있다.

예수를 믿는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게 죄가 있고, 대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 구원은 받았지만, 그래도 세상 ‘고난의 파도’는 계속 된다.

 

여기서 우리 믿음이 필요하다.

이 풍랑이 곧 나를 죽게 만들 것처럼 나를 흔들지만,

나를 죽이려고 마치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지만..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안 다면, 말씀을 올바로 안다면,

‘아냐, 너는 나 못 죽여,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풍랑을 밟고 일어선 사람인데, 네가 어떻게 날 죽여?

너는 날 지금 속이려고 하는데, 나는 너를 딛고 일어서 있단다.

절대 너는 날 못 죽여!’ 이렇게 담대하게 나온다.

 

제가 한 번은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롤러코스터를 타 보았다.

360도 막 돌면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회개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롤러코스트다. 절대 안전하게 도착한다. 우리 풍랑도 이와 같다.

 

어떤 날은, 바이킹을 탔는데, 거기 직원이 오래 태워줄 때가 있다.

빨리 내리고 싶은데, 손님들이 재미있어 하는 줄 알고, 남들보다 2배 길게 태워줄 때도 있다. 

그렇게 미끄러져 내려올 때 간이 철렁하며 죽을 것 같지만, 싸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결국 안전하게 내려오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결국 택한 자를 그렇게 안전하게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2. 풍랑을 해결할 길 - 오직 한 길 - 예수만 붙드시라!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신다.

‘야 도대체 이거 길이 없다. 어디로 가야 되냐? 돌파구가 어딘가?’

이럴 정도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왜 내 위로 무너진 하늘에는, 솟아날 구멍도 없이 이렇게 꽉꽉 막혔나?

 

왜 그런지 아시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유일한 길은 딱 하나밖에 안 주셨다.

‘내가 곧 길이라 하신 예수!’

 

그런데 우리가 돈, 명예, 평판.. 이것들을 자꾸 붙들고 그것에 매달려 있을 때,

하나님이 자꾸 우리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리신다.

 

그래야 그때마다 고민하면서 진짜 길이 무엇인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고민한다.

그 길 올바로 잘 찾아오라고.. 우리의 삶에 이런 것을 허락하신다.

이때 여러분이 예수를 견고히 붙들어 보시라. 누구도 흔들 수 없을 것이다.

 

▲다 자기 욕심이다.

예수를 붙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자

어줍지 않게 세상에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하지 마시라.

‘꼭대기에 올라가서.. 진짜 영향력이 미쳐지시던가?’

 

나 라는 존재, 나 하나가 예수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지고 그 분만을 붙들 때,

그때 역사가 일어난다.

그거 아니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욕심(꼭대기 자리)을, 그냥 신앙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여러분을 한 번 선택한 이후에 놓지 않으신다.

 

 

◑기독교의 본질에 관하여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그 본질이 아니다.

그런데 ‘그냥 빌어서, 열심히 헌신해서 복 받자’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 이것은 잘못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 핵심은

피조물의 자기 부인이며,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하나님 아니구나!

나는 피조물이구나.. 나는 흙이구나..’ 라는 자기 부인이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 자리에 앉으시고,

피조물은 자기 자리(흙)임을 인식하는 것.. 그 관계를 의-차다크 라고 한다.

 

‘하나님이 저를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저는 큰일 날 뻔한 사람입니다!’

그 절대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 먹지 마! 그러면 안 먹어야 되는 것이 맞는 거구나!’

이거 배우고 살아가시면 된다.

세상에서 무슨 대단한 업적 안 남겨도 된다. (안 할 수 없게 되지만)

 

‘교회에서 이런 봉사를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해 주시겠지..’

여기서 출발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암암리에 다 거기서 출발하고 있다.

 

내가 부인되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이끄셔서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은 절대 흔들림이 없다. 절대 자랑할 게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되면, 실적 올리는데 연연하는 사람 외판원이 되고 만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논리다.

 

교회에서 그런 모습이 보여지면 안 된다.

전부 숨어지고, 감추어져야 한다.

 

자 그게 자기부인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면,

여러분의 삶 속에 닥치는, 고난, 시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 우리는 이런 존재밖에 안 되는구나!’ 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은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고,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을 세밀하게 간섭하실 때, 우리 삶에 고난이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

 

모든 성도가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고난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이 한 가지다.  딤후1:8

 

그런데 이 고난을 피하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게..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 되어버렸다.

전부 복에 환장해서,

세상적 복을 못 받은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자기들끼리 룰을 정해 버렸다.

 

‘이 세상 것 얻어내는 것이 복으로 여긴다.’ 그건 혹시 있어도, 구약에서 끝났다.

하나님의 복을.. 실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은.. 구약으로 끝났다.

 

신약성경 어디에, ‘이 세상 것들을 많이 얻는 것이 복이다..’ 라고

어디 한 줄이라도 씌어있던가? (없다.)

 

‘계시의 점진성’이란 말도 있는데,

더 진보된 계시인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되는데,

구약으로 신약의 복을 해석하겠다는 말인가? (안 된다)

 

▲세상 복 받으려다 되려 망한다.

왜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싹 쓸어버리셨는가?

인간들이 스스로 높아져서, 용사/네피림 되려고 하고, 거인 되려고 하고,

유명한 자 되려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야, 내가 이거 잘못 만들었구나’ 하고 싹 쓸어버리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 네피림, 유명한 자’ 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동원/이용하려고 한다. 사실은 자기 욕심인데..

 

그런 욕심 부리다가는.. (욕심으로 복 받으려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도리어 망한다.

성도는 커지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며, 오히려 작아지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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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진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사흘 동안 내려가셔서, 지옥을 경험하셨다.. 라기 보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흘 동안, 지옥이 뭔지를 깨달으셨다.

지옥의 고통을 십자가에서 맛보셨다... 이렇게 본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