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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믿음은 주님과 관계 2892

LNCK 2011. 2. 26. 22:32

 

◈믿음은 주님과 관계                     고후5:7                     가톨릭 글 스크랩, 정리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후5:7

 

 


◑참 믿음은.. 믿는 것을 넘어서 관계                        출처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기도생활을 게을리 한 적도 없고, 남들에게 피해를 준적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봐도 그분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일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또한 그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현존과 선하심을 의심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주님은 늘 사랑 가득한 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고민은, 한 번도 주님을 애절하게 찾았던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늘 모범적인 삶을 살며, 이렇다 할 굴곡 없이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기에,

주님을 애절하게 찾았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수도회에는 원장 신부님이 계시어,

수도회 형제들을 인자한 마음으로 돌보고 계신다.

나는 한 번도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언제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분을 찾아가면,

그분은 늘 내 입장이 되어 내 말을 들어주고, 또 문제를 해결해주려 하신다.

따라서 나는 그분의 사랑가득하심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분과 내가 가까운 친구처럼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시간이 될 때 서로 만나, 그저 함께 차를 마시며 개인적인 기쁨과 슬픔을 나누거나,

함께 영화나 스포츠 관람을 가는 것도 아니며,

무엇을 함께 하며 그로부터 오는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관계’는 다른 것이다.

믿음 또는 어떤 확신이, 관계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러한 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과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한다고 해서,

또 성경에 쓰인 규율들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해서,

그 자체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그분과 맺을 수 없다.


‘믿음’과 ‘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이며,

그것은 바로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친밀한 관계로 발전되어야 한다.

내가 수도원장님을 믿고, 그 분의 훌륭하심을 의심하지 않지만,


정말 서로 스포츠 관란을 같이 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았다. ↖ 



◑참 믿음은.. 평소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영광)을 드러내는 것                   출처


▶로렌스 형제는 1611년경 프랑스 로레인의 니콜라스 헤르만가에서 태어났다.

(가톨릭에서는 ‘라우렌시오 수사’로 부름)


그는 18세 때 30년 전쟁에 참전하던 중,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할 뻔했지만,

무죄라는 것을 겨우 설득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제대를 하게 된다.

전쟁 중에 있었던 잔학행위들을 보고 그는 제대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왕 회계원의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로렌스는 스스로를 "모든 것에서 실패한 꼴사나운 바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종교적 삶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하고 잠시 은둔자로 살았지만,

까르멜회에 들어가기 위해 은둔생활을 그만 둔다.

1642년 그는 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를 하게 된다.


수도원에서 로렌스는 대부분의 기간을 주방에서 일했는데,

처음에 그는 그 일을 정말 싫어했다.

10년 동안 그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했다.


후에 그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소.

나는 그 첫 10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감내했소"라고 했다.


수사로서의 첫 10년이 영적 번민의 세월이었지만,

어느 날 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심원한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나는 문득 변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고, 또 그때까지 항상 혼란하기만 했던

내 영혼이 깊은 내적 평화를 체험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로렌스는 너무나 강한 하나님의 현존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현존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그런 기쁨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주방에서 감자껍질을 벗기는 것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큼이나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주방에서 14년가량을 보낸 로렌스는 만성관절염으로

수도회 내 신발 수선점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이제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로렌스를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자연의 총체이며, 은총의 우아함"이라 불렀고,

"이러한 것들이 하나 되어, 그것은 곧 로렌스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로렌스의 명성은 멀리 퍼져나갔으며, 1691년 로렌스가 사망한 직후 17세기말경

그의 편지묶음과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회고담이

“하나님 현존의 실천(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참 믿음은..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                         출처


나의 존재가, 세상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나는 미국에 갔을 때, 한 공항에서 벤치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삶에 몰두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서구사회에서 급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아마도 그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세상의 가치로 그들의 일을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였다.

제 관점에서 볼 때, 내가 만난 대부분 사람들은 너무 ‘세속적’으로 보였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분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때 나는 이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며, 홀로 주님의 신성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주위와 많은 사람들을, 내 기도를 통해 축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든, 누구든

그분의 신성을 세상 한복판에서 지켜드릴 수 있으며,

또 내 주변을 축복할 수 있다.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기도를 드린다거나,

하루를 살아가면서 일상 중에 그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잊고 세상의 가치로 살아갈 때,

그분의 신성을 지켜드리고 또 내 주변을 축복하는 것이다.

 

마치 소돔 성의 의인처럼.. 그 의인으로 인하여 그 성이 복을 받는 것이다.망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세속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일을 처리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의 신성을 지키고

또 그분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내 일상 안에 살아계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참 믿음은.. 잘 내려오는 것                          출처


올라가는 것도 정말 무지무지하게 힘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그 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남 얘기 하지 말고, 나의 일상에서도 그런 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고급차를 타던 사람은, 경차를 타는 것이 무척 꺼려진다.

고급차의 그 안락함(위신)에서 쉽게 내려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큰 집에 살다가 작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을, 낯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 일상의 삶은 무대 위에 오를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대 위에 오르는 방법만 생각할 뿐,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 내려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이고 자신이 오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가르치면서,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대에 올라가는 방법만 알고, 내려오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가난의 영성, '내려오는 믿음'을 기도로 요청해본다.          ▣ 믿음론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