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보라 와 부아 출1:15~22 도서 정리, 편집자글
◑성경은, 피라미드와 파라오를 왕창 무시한다.
▲21세기까지도 여전히 곽광 받는 이집트 고대 역사 유물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 고대문명은,
프랑스가 유럽을 제패했을 때는, 나폴레옹이 그 유물을 탐내었고,
대영제국이 세계를 제패했을 때는, 영국이 그 유물을 탐낼 만큼
세계역사를 대표하는 보물중의 보물로 통한다.
그리고 오늘날 21세기까지도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 역사학자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 유물을 보기 위해서,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다.
정말 기원전 1,500~2,500년이란 장고한 역사.
오늘 우리 시점에서 무려 4천 년 전에
감히 오늘날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놀라운 건축물을 완성했다는 점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경이롭고 경탄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 출애굽기에는, 피라미드의 위용은 단 한 구절도 안 나온다.
히브리 노예들이 고역에 시달렸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그 피라미드의 위용, 웅장함, 찬란한 건축문명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다.
피라미드와 동시대에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 <출애굽기>는..
이집트의 찬란한 건축문명, 진보한 수학/토목기술/기하학 등에 대해서는
‘일절 무시해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무관심하다.
이런 점에서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러 다녔던 에베소, 아테네, 고린도의 도시들은
지금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서 볼 때도, 그 문명과 건축기술에 경탄하는데,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 단 한 줄도 언급 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 무너진 잔해만 보고도 경탄하는데..
실제로 그 실물을 목격했을 바울은,
그 경이로움과 경탄할만한 문명/건축의 업적에 대해.. 일절 무시하고 있다.
그의 서신서에는 아무런 언급도 안 나온다!
▲대신에 성경 출애굽기는,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두 산파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 애굽 문명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가장 비천한 노예 여인 2명,
십보라와 부아에게.. 성경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피라미드와 찬란한 이집트 문명은, 십보라와 부아 두 사람의 배경backdrop일 뿐이다.
그 당시에 파라오와 히브리 산파의 신분 차이는,
오늘날로 치면, 빌 게이츠와 일용직 시급 근로자의 차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파라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린 :17
두 산파에 대해 자세히 토픽으로 다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빌 게이츠처럼은 되지 못하더라도,
십보라와 부아처럼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 역사, 생명 역사의 주인공
▲성경과 하나님은 구원 역사/생명 역사에 주목하신다.
구원 역사는.. 다른 말로 생명 역사이다.
하나님은 멸망하는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고, 생명을 베푸신다.
성경과 하나님이, 피라미드와 파라오를 일체 무시하시고,
일용직 시급 근로자에 불과한 두 늙은 산파(아마 늙었을 것임)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세상에서 유명인사, 억만장자, 거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 들이 아니다.
우주계발사업 같은 큰 프로젝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 생명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
그들이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늙고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당신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러면 유명인사가 안 부럽다.
세상에 유명 인사들이 많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다
당신이 주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배경인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눅 들면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의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눈과 귀가 그들에게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들 주눅 들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방송언론/학교 강의실/모임, 사람들의 대화/심지어는 일부 교회까지도
끊임없이 세속적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야! 그 사람, 연봉이 장난이 아니래’
‘저 건물의 위용을 좀 봐!’
‘무슨 <시크릿>이란 자기계발서적이 몇 백만 부나 팔렸대’
그래서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숨은 주인공들이,
세상의 가치기준 강요에 주눅이 들어서
토끼나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서, 그 속에 숨어버릴 수 있다.
성도는 절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서, 자기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야!’
▲신약에 등장하는 두 여인.. 엘리사벳과 마리아
출애굽기가 십보라, 부아.. 두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누가복음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 족보에 등장했던 네 여인들처럼
또한 십보라와 부아처럼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순종하며 동참했던 여인들이었다.
십보라와 부아,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했던 네 여인들이
모두 자기 목숨을 걸고,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동참한 것처럼..
엘리사벳과 마리아도
자기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 임신에 순종한 것은.. 자기 목숨을 건 동참이었다.
그런 마리아를 비호한 엘리사벳 역시.. 목숨을 건 생명역사에 동참이었다.
생명역사, 구원역사의 동참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다시 찾으리라’고 하셨다.
산파들이
바로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죽기를 각오한 용기였다.
생명역사, 구원역사는
오늘도 우리 생명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망이 내게 역사하는 동안에.. 생명이 저들에게 공급될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십보라, 부아 같은 자부심
▲오늘 나는 생명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
요즘 한국의 스포츠스타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본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고 부럽다.
또 그들의 활약상을 TV를 통해서 보면서 우리가 즐거워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생각해 보게 된다.
‘저것이 과연 생명의 역사인가?’
그들의 활약상이 흥미롭고, 부럽고, 오락을 주고, 국위선양을 준다고 하자.
그렇지만 ‘생명의 역사’인가..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생명의 역사는 아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우리가, 십보라와 부아처럼,
‘생명의 역사=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게 크게 돈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십보라와 부아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주인공인 것이다.
‘십보라’는 그 이름 뜻이 ‘공정함’ fair
‘부아’는 그 이름 뜻이 ‘눈부신, 광채 나는’ splendid 인데,
정말 십보라는 자기 이름대로 공평하게 행해서.. 히브리 아이들을 살렸고,
그 일에 동참한 부아는.. 자기 이름대로 광채 나는 삶을 살았다.
오늘 우리도 크게 유명한 스포츠 한류 스타는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값지고 존귀한
십보라처럼 페어fair하고, 부아처럼 광채 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명역사에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동참할 때 그렇다.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튕겨버리셨다.
홍해에서,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을 때,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출14:27
여기서 ‘엎으셨다’는 말은
재미있게도, ‘하나님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튕겨 버리셨다’ flick off
또는 ‘(손으로 먼지 털듯) 다 털어버리셨다’ 라는 표현이다. shake off
그러니까 애굽 군대를 처리하시는 일이.. 하나님께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냥 손으로 한 번 튕기거나 휘저으시니까.. 엄청난 군대가 모두다 절단 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경우에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면, 직접 나서신다. 친히 행하신다.
‘생명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없고, 미약한 존재들처럼 보이고,
때로는 자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지만,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직접 나서신다.
하나님의 손이 한 번 휘저으시니까,
애굽의 대군이 홍해 바다에 몰살했던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내 주(다윗)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삼상25:29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심이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4:4
또한 ‘원수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발꿈치 정도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성도가 하는 일은, 원수 마귀의 정수리를 밟는 것이다.’ 창3:15
성경에 이렇게 담대함을 주는 말씀이 가득 차 있다.
문제는 그것이 내 피부와 내 마음에, 실감나게 믿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의 약속이 실감나게 믿어지려면,
내가 평소에 성령/은혜/말씀/감사/교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약속이 실감나게 믿어지지 않고,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내가 토끼굴로 황급히 도망가서 숨는 현실이 벌어진다면,
‘내게 지금 성령/은혜/말씀/감사/교제의 약효가 떨어졌구나’ 생각하시면.. 맞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익숙한 방식으로, 속히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지,
내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역사, 구원역사로 날마다 충만한 사람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심’을 확신하고 살아가게 된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역사/구원역사를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십보라와 부아..
뭐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아니다. 자기 일상을 매일 하던 그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들 안에 ‘생명’이 있으니까, 그 ‘생명’을 자연스럽게 나타낸 것 뿐이다.
꽃이 꽃이고, 풀이 풀이듯이,
십보라와 부아는,
자기 속에 있는 정체성(생명)을 자연스럽게 자기 삶으로 살아내었을 뿐이다.
오늘도 내 속에 있는 ‘생명’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내시면 된다.
그러면 당신도 ‘십보라, 부아’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대단한 피라미드 문명.. 그러나 ‘죽음의 문명’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나일강 동쪽은 삶의 도시, 서쪽은 ‘죽음의 도시’로 생각했다.
나일강 서쪽에 세운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원래 애당초 ‘죽음’을 위대서 건조한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자기 무덤을 크게 만드는 사람이 간혹 있었으나
어쨌든 온갖 용을 다 써봐야.. 결국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피라미드처럼 커도.. 결국은 죽음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져도.. 결국은 죽음이다.
그것은 생명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부심을 갖자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고 값진 일이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속에 이런 자부심은 거의 없고,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세상 문명만 동경하고 사모한다면,
그래서 ‘우리도 복 받아서 거대한 가시적 업적을 남기자’는 식으로 줄기차게 산다면..
그 이유는
자기 속에 생명이 아주 고갈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 그런 것 크게 안 부러워한다.
자기가 배부르기 때문이다.
*‘배부름’ 관련글 배부른 상태에서 봐야 정확하다 사냥터인가, 관광지인가?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유진 피터슨, pp265~321.읽고 나서 간략히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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