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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성령을 받아야 하는 성경적 근거

LNCK 2011. 3. 11. 14:38

www.youtube.com/watch?v=VzxWAHLLSB0

◈계속 성령을 받아야 하는 성경적 근거        갈3:1~5, 살전4:7~8

 

   11.02.06.여주봉 목사님 설교녹취요약

 

 

성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갈3:1~5절이 이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성령이 내주하신 신자도,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 성경적 근거를 아래 5가지 구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도가 예수 믿고, 성령이 내주하신 후에도

계속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그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갈3:1~5절에서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와, 5절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갈3: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성령을 처음 받은 과거의 일’을 뜻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이 문장의 동사 ‘받은’의 시제가 ‘단순과거’이기 때문이다.                *aorist  

 

※헬라어에서 ‘단순과거’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정적인 행동을 말한다.

 

즉 위 2절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성령을 받은 것’을 뜻한다.

문맥적으로도,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처음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갈3:5절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위 문장의 동사 ‘주시고’, ‘행하시는’은.. 둘 다 현재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의 지속적 행동’을 가리킨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영어의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5절은, 2절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성령을 받은 것(단순과거시제)이 아니다.

5절은, 하나님께서 그 이후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즉 5절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성령님이 내주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내주하신 성령님이 그 이후로도

우리 속에서 계속적으로 임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성령님은, 처음에 우리가 믿을 때 내주하신 이후로

계속에서 우리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시는데,  갈3:5

 

우리가 신학적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가로막을 수도 있다.

성령을 소멸하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서신서를 봐도, 모두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속적으로 외적인 표적을 동반하여 임하시는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성경의 명백한 기록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성령은 예수 믿을 때 내주하신다. 임하신다’

- 그 사실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이, 단순히 ‘성령이 내 속에 임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는 그 마음의 확신..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기사와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나타났던 경우가 성경에 계속 나온다.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하심도 믿음으로 받는다. 주1)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전12:31

그러므로 ①믿음으로 성령의 내주/역사하심을 믿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②성령을 계속 충만하기까지 사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의 일면만 보지 말고, 두루두루 보자는 것이다.

갈3:2절이 ①믿음으로 성령의 내주/역사하심을 설명하고 있다면

갈3:5절은  ②성령을 계속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엡1:17에서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내용인데,

이미 교인들이 예수를 믿어서,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신 상태였지만,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믿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체험한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임을 뜻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절박한 기도이다.

우리 삶의 승리를 위해서도

이런 성령충만을 계속 구하는 신앙은.. 성경적이다.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함을 믿는 것.. 이것으로 모든 성령론은 끝! - 이러면 안 된다.)

 

 

◑3. 살전4:7~8에서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문맥을 볼 때, 살전4장은 1절부터 ‘성적인 거룩함’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적 부도덕을 피할 것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함을 위함이라 말씀한다.

 

그때 ‘이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거부, 경멸)이 아니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8

 

여기서 ‘주신’ 헬라어는 ‘현재형’이다.

그래서 영어/한국어로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해야 맞다.

왜냐하면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영어/한국어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지금 계속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린다’로 해석된다.

 

이 구절 역시,

성령을

예수 믿는 성도는, 지금 계속적으로 받아야 함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주2)

 

:8절의 ‘너희에게’는.. 헬라어 전치사로 ‘에이스’ 영어로 into이다.

성령이 밖에서 너희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만,

계속 리필(재충전) 해 주신다는 뜻이 되겠다.

 

 

◑4. 엡3:16~17에서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계속적인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위 구절은, 엡1:17절과 더불어, 바울의 기도이다.

그가 기도하기를 ‘성령을 통해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심’을 기도한다.

 

여러분, 우리도 바울을 본 받아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 성령을 받기를 기도하시는가? 능력을 받기를 기도하시는가?

(내게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니까,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할 필요 없다고요? - 안 된다.)

 

예수님도 성령을 구하라고 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지금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엡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당시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했는데, 바울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이다. 뭐 하러?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그래서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이런 바울의 기도의 예를 볼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교회의 모습도, 지금보다는 앞으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외적/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이 구절을 봐! 성령의 능력은 속사람이 강건케 되는 것이야.

치유, 권세.. 이런 외적 능력은 초대교회 시절에 다 끝났어!’

 

이렇게 속사람, 내적변화.. 이쪽/한쪽으로 치우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내적 변화’를 강조했지만,

다른 구절에서는, 외적 능력도 강조했으므로.. 우리가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갈3:5절 등에 나오는 ‘능력’은

또한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령의 능력이 그렇듯이

외적인/가시적인 능력이다.

내적, 외적.. 둘 다 성령의 역사이다.

 

※지금 이 설교문의 맥은,

성령론에 대해,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바,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믿음으로 성령이 내주하심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므로 더 이상 성령을 구하거나 사모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성령이 내주해 계시는데, 무슨 또 별다르게 성령을 구하느냐는.. 논리다.

 

그 ‘한국교회의 전통적 성령론’의 일면一面적 진리를,

이 설교문이 보완하고 있다.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맥락은,

<그래도, 예수 믿은 후에도, 성령을 계속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요3:34에서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이 구절은, 오순절 사건 이전이지만.., 큰 문제없다.)

 

‘주심이니라’는 동사가 현재형이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우리의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말하면, 반복적으로/지속적으로 주신다는 뜻이다.

 

위 구절은,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오셨지만,

그 이후에도 공생애동안에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뜻이 된다. 주3)

 

예수님이 이러셨다면, 하물며 우리랴!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님이 내주하셨으니 그것으로 끝이다! -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치는 말

지금 이 내용을 살펴보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 성령의 사역이 충만하게 운행하셔야 되는데,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올바른 성령론에 대한 기초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에는,

크게 보면 아래 2가지 흐름이 대립되어 왔다.

 

①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시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②성령님은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여 주신다.

(각론의 세부적 설명이 나눠지겠지만, 큰 원리는 이렇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①번만 강조해온 경향이 주류를 이루어 왔으나

앞으로는 ②번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는 점을

위에서 인용한 5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살펴보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서,

그 성령님이 지속적/계속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더욱 사모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내적/외적 성령의 사역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대한다.

 

덧붙여서 한 가지,

특별히 살전4:7~8절이

오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본다.

 

성적 타락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삶을 살려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주1)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하심도 믿음으로 받는다.

 

갈3:5절을 천천히 읽어보시라.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듣고 믿음에서.. 라는 뜻) 

 

그렇다고 ‘성령은 예수 믿을 때 내주하신다’는 신학에만 너무 묶여 있을 필요 없다.

그 말도 맞지만,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가, 자기에게 일어난 사람은,

그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

 

성령이 자기에게 소멸되는 것을 느끼면.. (믿음으로) 위기의식을 느낀다.

성령이 자기에게 고갈되는 것을 느끼면.. 다시금 (믿음으로) 매달리게 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헬라 철학적, 지식적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몸과 마음의 총체적 신앙’으로서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믿음은 서로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성령은 받았는데, 믿음은 없고,

믿음은 있는데, 성령의 역사는 없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갈3:5절을 통해 살펴보고 있는 내용은,

예수 믿은 후에도 성령이 계속 임하시고, 능력을 우리 가운데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계속 사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D. L. 무디는,

그 이후의 자기 사역이 놀랍게 변화되었음을 이렇게 간증한다.

 

※D. L. 무디 목사님의 예

무디 목사님은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큰 사랑과, 능력이 부어지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만큼 사모했든지, 더 큰 능력이 없이는, 살고 싶은 의욕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뉴욕에 갔다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불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는, 전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으며,

초등학교 교육도 마치지 못한 그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교수들이 단에 나와서 무릎 꿇고 헌신한 역사가 일어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날의 경험을, 후에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 날 뉴욕에서, 얼마나 놀라운 날이었든지.. 나는 그 날을 묘사할 수 없다.

나는 그 날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경험은 너무 성스러워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나는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으며,

내가 그 분께 그 역사하시는 손길을 멈춰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설교를 계속 했으나, 그 내용은 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곤 했다.

 

나는 만약 온 세계를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체험을 하기 전에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온 세상 모든 것도, 그 체험에 비하면, 작은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2)

우리 한국어는 시제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위 구절, 살전4:8절의 ‘주신’은 얼핏보면 ‘과거형’처럼 보인다.

그래서 과거형으로 해석하면,

‘너희가 예수 믿을 그때 성령을 주셨던, 그 하나님을 저버린다’ 가 된다.

이런 동사 시제의 오해는 성령론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주3)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신 것을 뜻하는 구절이 아니다.

 

만약 그 사건을 언급한 구절이라면 ‘단순과거 - 주셨음이나라’를 써야 했다.

 

예수님이 수세 이후에 성령을 받으신 사건은, 아래 구절이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다’ .. 이 말씀은 단순과거다.

이 말을 보면, 예수님이 물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사건을 언급하신 구절이다.                                 ▣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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