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눈과 귀 시123:2 조각글, 스크랩글 모음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편123:2
◑1. 고난과 난제 앞에서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안셀름 그린의 『마가 복음 해설』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
“그대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될 때도,
그대 삶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때도,
그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좌초될 때도..,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견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믿음을 그대가 지닌다면,
그대의 시선을 현혹하는 산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산은 바다에 빠질 것이다.”
산다는 것이 ‘산 넘어 산’이라고 했듯,
늘 우리 앞에는 넘어야 할 산이 있게 마련입니다.
안셀름 그린 신부님은,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믿음’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산다면,
우리 앞에 놓인 넘어야 할 산은 마치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듯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엄청난 그 무엇이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했듯이(눅17:6 참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이 나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 등)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믿음의 발걸음이면
우리 앞에 놓인 어떤 산도 어느새 우리 인생의 무대 뒤로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넘어야 했던 높은 산은 사라지고 아련한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넘어야 할 산이 가로놓여 있는지요?
그냥 믿음으로 한 발 발걸음을 내딛고 나아가면 됩니다.
◑2. 평소에는.. 태양을 바라보는 독수리의 눈처럼
▲태양을 보니까, 독수리의 정체성이 살아났습니다.
어느 농부가 숲속에서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심한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독수리를, 불쌍한 마음으로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줍니다.
다행히도 이 독수리가, 상처가 말끔하게 씻은 듯이 낫게 되고, 건강을 회복합니다.
농부는 이 새끼 독수리를 무심코 병아리들 사이에 두어서,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게 합니다.
병아리가 물을 마시면 독수리도 와서 물을 마시고,
병아리가 땅을 바라보고 돌아다니면서 모이를 찾아서 땅을 쪼아대면
독수리도 같이 땅을 쪼아대면서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을 지나가던 어느 조류학자가
독수리가 병아리들 사이에서 땅을 쪼며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농부에게 말해서, 그 독수리가 독수리 되게끔 하기 위해 공을 들이게 돼요.
그래서 이 학자가, 자기 머리 위에다가 독수리를 높이 쳐들고서는
공중에 휙 던지면서 날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는, 꼭 병아리 새끼처럼 땅에 푸드득하며 떨어져서는
다시 두 발로 종종 걸음을 걸어서, 병아리들 틈에 끼어서 땅의 모이를 쪼아대곤 합니다.
그렇게 '나는 연습'을 몇 번을 반복해도 안 돼서,
조류학자는 아침 해 뜰 무렵, 뒷동산 높은 곳으로 이 독수리를 안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뜰 때, 독수리 새끼로 하여금 태양을 보게 합니다.
서서히 땅에서 하늘을 향해 올라오는 태양빛이
독수리의 눈을 통하여 독수리의 심장으로 들어갈 때,
그 새끼 독수리 몸 속에 잠재해있던 독수리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태양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조류학자가 새끼 독수리에게 왜 태양을 바라보게 했습니까?
오직 모든 동물 중에 독수리만이, 그 태양의 뜨거운 광선을 정면으로 바라봐도
눈이 상하지 않는 피조물입니다.
이것을 알고는, 태양을 바라보게 하고,
태양빛이 눈을 통하여 독수리의 심장으로 와 닿을 때,
독수리의 몸속에 잠재해있던 독수리의 혼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태양을 직시하면서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기 시작을 합니다.
독수리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에요.
여러분, 이 ‘눈’이라고 하는 것, 생명력과 직결됩니다.
눈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생명력이 주어지느냐가 결정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생명력이 어디 있다고 봅니까?
독수리가 태양을 직시합니다.
그 강렬한 태양빛을 직시함으로써, 태양을 향해 창공을 차고 날아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태양을 직시하는 독수리가 조류의 왕이에요.
가장 높게 날고 가장 넓게 날아요.
독수리 한 마리가 155km반경을 생활권으로 장악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기독교인의 생명력이라는 것 바로 눈에 달려 있어요.
성경에 보면,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12:2)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귀는 눈을 따라 가요.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 귀에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너무나 심하게 곡해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대로, 선별적으로 우리가 듣기 때문입니다.
자식문제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가 말씀을 들을 때는
무조건 자식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듣고,
돈이 필요하다고 돈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주면
모든 게 다 돈 버는 방법으로 들리고,
건강이 갈급해서 건강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성경말씀을 건네주면
전부 다 병 고치는 이야기만 쓰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자기 귀에 들릴 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기독교인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볼 때에 생명력이 나타납니까?
기독교인의 생명력이 이런 겁니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모든 장애 고유가의 시대에 장애를 넘어서서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생명력입니까?
정말 다리가 부러졌는데 부러진 다리를 고쳐가지고 4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기어코 올림픽에 가서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생명력입니까?
그런 일들이 다 현실에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기독교인의 생명력은 아니에요.
기독교인의 생명력은 병아리들처럼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쪼아대며 생기는 생명력이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꿈을 갖는 것을
빈민가에서 태어나가지고 대재벌의 꿈을 갖게 되는 것을
창공을 나는 꿈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게 어디 창공을 나는 겁니까?
높은 산 위로 등산하는 거지.. 창공을 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기독교인이 뭐하는 자들입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에요.
강렬한 태양빛을 직시하는 독수리가 태양을 향해 하늘을 날아가듯이
기독교인의 생명력은 여호와를 ‘앙망’하는데 있습니다. *간절히 보며 열망함
이 세상 이방인들은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사업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동안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업을 바라보는 거지요.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시나요?
기독교인의 생명력은 이 땅을 박차고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올라가는데 있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꿈과 비전을 나도 비슷하게 꾸고 마음에 품으면서
그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 날아갈 때에 독수리가
창공에 155km의 창공을 자기의 생활영역으로 공중에 떠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때 저 멀리 태양을 보기 때문에, 어떤 새보다도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있고,
실제 천국으로 지금 마음이 들어가서 마음이 평강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 누구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때가 되어서 독수리가 4.0~10.0까지 보고 있어요. 독수리의 시력을 갖습니다.
어느 새보다도 높이 높이 날아갑니다. 태양을 보는 새이기 때문에.
그러고 있다가 때가 되어서 자기의 먹이거리를 찾아서 하강할 때는
시속 280~320km의 속도로 하강해서 정확하게
하나의 티끌처럼 보이던 그 먹이를 발로 움켜쥐게 됩니다.
◑3.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낸 벤자민 워필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리창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유리를 봅니다.
유리에 묻은 먼지, 유리의 품질, 유리의 결함..
그러나 유리창 저편을 보아야 합니다.
유리창 건너편에 보이는 대지를 보고, 자연을 보고, 하늘과 바다를 보아야 합니다.
유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잘못 하면 유리 자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창의 목적은, 바깥을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보고, 밖에 있는 나무를 보고,
거기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유리창과 같습니다.
이걸 잘못하면 유리창 자체로 보면서,
‘아이고 여기 뭐 묻었네..’ 하고 분석하다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진행하실 미래를
믿음가운데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이것이 유리창이 되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하실 미래를 보고, 인생의 진실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복된 시선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4. 서로를 바라봅니다.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방 앞에서, 매일 아침이면
한 사내가 멈춰 서서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곤 했습니다.
사내는 시계방 주인이야말로 아주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에서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 분, 초를 맞출 때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시계방 주인밖에 없었습니다.
시계방 주인도, 매일 아침 이 사람이 유리창 앞에서 멈추는 것에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인사를 하며 참았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안녕하세요? 궁금한 게 있어요. 몇 달 동안 선생님을 뵈었는데,
아침마다 제 가게 앞에서 멈추시더군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남자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사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랍니다.
가장 정확한 시간을 요하는 직업을 가졌으니까요.
사실 저는 문과 창문을 제작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요.
직원들에게 날마다 점심과 휴식, 퇴근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호각을 분답니다.
이 일을 위해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시각을 알아야 하지요.
그래서 매일 아침, 저는 사장님의 시계에 맞춰, 제 손목시계를 맞추는 거랍니다!”
주인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군요. 서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니!
전 저녁 시간을 알리는 당신의 호각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둘러 제 시계를 맞추곤 했어요!”
시계방 주인과 남자처럼 서로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서
각자의 위대함과 용기를 공유한다면,
우리 삶 곳곳에 자리한 성공의 등불을 켜는 일이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
<‘행복한 동행’ 중에서
◑5. 지도력은 귀에 있습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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