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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2강 일곱 인 2923

LNCK 2011. 3. 21. 22:34

◈일곱 인                   계6:1~8              김성수목사님 계32강 녹취, 정리

 


◑서론


▲계시록을 해석할 때, 당황할 이유가 없는 것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구약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인, 본문의 ‘일곱 인’도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구약 스가랴서를 찾아서 이해함으로써,

계시록의 본문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시록의 반복진행적 구조

‘7인의 재앙’을 읽으실 때, 역사적, 시간적 배열된 사건으로 보시면 안 된다.

7인, 7나팔, 7대접의 이야기는, 성경 66권 전체의 계시의 내용이 그렇듯이

반복적, 점진적, 점층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7개의 소계시록 


7인은 땅의 1/4이 재앙으로 피해를 입고

7나팔은 땅의 1/3이 피해를 입고,

7대접은 땅 전체가 멸망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그 재앙의 규모가 점진적으로 확대된다.


(성경전체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천국잔치, 성전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들어가는 가를

점진적, 반복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처럼)

요한계시록도 점진적, 반복적으로 설명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 전체를 하나의 연대기적 역사로 보는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다.

 

마치 바로가 꾼 꿈과 마찬가지다.

창41장에 바로가 꿈을 꾸고, 요셉이 해몽해 주었는데,

바로가.. 7마리 살진 소가 있고, 후에 7마리 여윈 소가 나와서, 잡아먹는 꿈,

이어서 충실한 이삭 7개를, 마른 이삭 7개가 나와서 잡아먹는 꿈을 꾸었다.


바로가 꿈을 2개 꾸었지만, 이것은 2가지 사건이 아니라,

한 가지 동일한 사건을, 점진적, 점층적, 반복진행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왕이여, 이 꿈은 한 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창41:25

‘소’보다는 ‘이삭’이.. 풍년/흉년을 상징하는.. 보다 결정적/점층적인 꿈이다.


계시록의 7인, 7나팔, 7대접 재앙도 마찬가지다.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종말에 나타날 재앙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도 그 재앙은 일어나고 있다. 꼭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만은 아니다.)


▲일곱인 재앙의 구조는 4+3으로 되어 있다.

먼저 4인의 재앙은 ‘말 탄자’의 상징으로 나오고,

5번째 인부터는 뭔가 장면이 확 달라진다.

(7나팔, 7대접도 마찬가지다. 5째 재앙부터는 뭔가 달라지고, 더 심화된다.)

                                        ※그래서 5째 재앙부터가 ‘대환란’의 때라고 추정한다/편.


▲흰색, 붉은 색, 검은색, 청황색 말과 그 말을 탄 자가 누구인가?


(설교자는, 이 4마리 말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 4마리 말이 상징하는 설명은 - 33강에서 나옴/예정)


제/설교자의 견해로는, 그 말 탄자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 말 탄자들을 등장시켜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

우리가 잘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나무보다 숲을 보자는 것이다.  주1)  



◑스가랴서를 통해 보는 ‘말 탄자’의 해석


사도요한이 이 4마리 말 탄자를 인용한 출처인 스가랴서를 찾아보면서,

그 구약의 메시지를 통해, 본문 계시록의 메시지를 해석해 보자.


▲슥1:8~12


8 내(스가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자줏빛 말백마가 있기로

(※여기에 ‘검은 말’은 빠져 있지만, 슥6장에는 ‘검은 말’까지 똑같은 네 말이 나온다.)


9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12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70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위 슥1장에서, 또한 슥6장에서

계6장의 ‘4말을 탄자’들이 인용되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 이었다.  :10


무엇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을까?

그것을 알려면, 이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주2)


그 말 탄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를 가지고,

땅에 두루 다니면서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전하던 메신저들이었다.

(위 슥1장은, 말들이 순찰만 하고 돌아왔고, 아직 심판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슥6장은, 말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심판을 선포한다.) 


우리가 그 말 탄자가 어떠한 존재인가.. ‘그게 천사인가, 사람인가?’,

‘그들이 누구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 탄 자들이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 탄 자들은, 하나님의 재앙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데...



◑1.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일어난다.


세상의 심판은, 곧 성도의 구원이다.

네 말이 달려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계6장에서

(세상에는) 심판이지만, 동시에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구원의 완성이다.


슥1:11절에서,

지금 그 말들이 온 땅을 돌아다닌 후에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11   ('팍스 로마나'처럼 부정적 의미의 평안이다.)


그래서 스가랴는, ‘하나님, 언제까지 세상을 이렇게 놔두실 겁니까?’

세상은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세상을 (심판의 말들을 보내서) 심판해 달라고, 이어지는 12절에 호소한다.

 

그런데 스가랴가 호소한 그 심판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성전 재축이었다.    

 

스가랴는,

'세상을 빨리 심판해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나님 나라를 빨리 완성) 해 주십시오.'  

라는 호소였다. 슥1:12을 보시오.


▲사도요한은, 이 슥1장을 끌어와서, 계6장을 쓰고 있다.

그래서 슥1:12절의 호소와 똑같은 내용이

5번째 인을 뗄 때 순교자들이 (똑같이) 호소한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계6:10


‘빨리 원수를 갚아 달라’는 기도처럼 보이는데, 

‘빨리 세상을 심판해서, 하나님 나라를 빨리 완성시켜 주십시오..’

라는 기도이다.

 

 

그 성전의 재건은.. 이방에게는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 백성에게는 구원이다. 


구원은 항상 심판과 같이 온다.

이 개념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4말과 그 말 탄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재앙을 나타내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읽어야 하는 것은,

그게 (세상에는) 심판이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 호에 계속해서 자세히 설명함..

 

 

◑2. 스가랴서의 성전 재건의 의미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주3)


스가랴서는, 성전재건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건물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한다. 성도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성전재건은, 단순히 구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처소(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다.


스가랴서의 메시지는..

성전 재건의 완성을 독려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건물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성도)의 완성을 예언한다.

 

성전은 단순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타락, 심판, 구원(새창조)을 반복진행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조→타락→심판 및 구원(새창조) ... →다시 타락→다시 심판 및 구원의 사이클

1트랙 :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 천국잔치(하나님 나라/새 창조)가 한 번 완성되고

2트랙 : 사사기부터 또 타락이 시작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될 때 두 번째 완성되고,

3트랙 : 열왕기부터 또 타락해서 에스라, 스가랴 성전재건 때 세 번째 완성된다.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창조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천국잔치, 성전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새 창조)으로

    들어가는 가를.. 점진적, 반복적으로 설명해 준다.

 

성전재건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뜻한다.

또는 개인적으로 보면, 성도의 영적 성숙/완성을 뜻한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가

이것이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반복진행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위에서, 구약은 크게 3트랙으로 반복진행된다는 것을 잠시 살펴보았다.

(가나안 입성/솔로몬 성전 완공/스룹바벨 성전 재건 및 완공)


 

(다음 호에 계속)


...................................

 

주1) 요20:31절에, 사도요한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우리에게,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가르쳐 주는 책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구원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도, 그 환상/묵시가 주는 ‘메시지’를 이해해야지,

그 전체 그림(메시지)은 놓치고,

작은 그림(네 말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냐?)에 매달리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주2)스가랴 선지자의 배경

스가랴 선지자는 주전 520년경, 아직도 바벨론 포로시기에 활동했다.

바벨론 포로 시기였지만, 더 정확히는, 그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했던 시기였다.

주전538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바사)에게 망한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포로귀환과 성전재건을 명한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1차포로귀환이 이루어지고, 성전재건이 착공된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던 고레스의 다른 신하들이

그 성전재건을 방해한다. 성전재건이 15년가량 중단된다.

그때 스가랴가 분연히 나타나서, ‘성전재건 해야 한다’고 독려하고 재촉했다.


주3)

이스라엘이 70년동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는데,

B.C.586년에 남유대가 망했는데,

B.C.538년에 포로1차귀환

B.C. 457년에 2차귀환

B.C. 444년에 3차귀환

그러면 왜, 무엇을 기준으로, 70년 만에 귀환했다고 말하는가?


왜 70년 만에 귀환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B.C.516년에 성전재건이 마쳐졌다.

그래서 B.C.586~B.C.516년까지 계산해서 7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전 개념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 쉬어 가는 곳 ...................................

 

◑3. 재앙의 (4 말을 보내신) 목적


▲4마리 말들을 통해, 재앙이 선포되어도, 성도는 걱정 없다.

왜 어린양 예수께서,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재창조)의 내용이 적힌 책을

인봉을 떼고 여시는데,

그 인을 떼시는 족족 재앙만 나오는가?

(그 책은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다. 계5:1~7


인을 하나씩 떼시는데, 왜 자꾸 재앙만 나오는가?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재앙에 함께 노출된다.


왜 그 재앙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함께 노출되는가 하면,

(이것을 알아야, 우리 삶에 재앙, 고통, 환란이 닥칠 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재앙이지만,

성도에게는 .. 회개,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고,

비성도에게는 .. 심판을 통해 멸망으로 인도되어진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 아무리 심판과 재앙이 닥쳐도.. 걱정 없다.

성도를 더 경성시키고, 거룩하게 하고, 회개로 인도하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를 통해 본, <재앙의 일반적 원리>

  

겔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4가지 중한 벌

    곧 기근사나운 짐승온역을(4마리 말의 재앙과 비슷하다)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22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21절,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재앙은 신자/불신자가 같이 받는다.


22절,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성도는, 아예 그 재앙을 안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을 세상과 함께 받는데,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23절,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재앙은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성도가 재앙을 통과하게 하시는 이유

여러분은, 교회시대를 통해서,

수없이 지진, 기근, 해일, 전쟁, 전염병 이런 것들을 계속 겪는다.


그 일로 말미암아 크리스천들은, 그 재앙의 목적을 알고,

오히려 크리스천 됨에 도움이 된다. 자기 신앙에 유익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하시는데,

     그 재앙이 얼마나 엄중하고 철저한 것인지,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일컬은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어도,

     그들 자식들의 목숨도 건지지 못하고,

     오직 그 의인들 자기 목숨만 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 심판의 엄중성을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겔14:14, 16, 18, 20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과 함께 재앙을 당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고,

나머지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의 일반적 원리다. ↙


겔14:22, 그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가 아들딸을 끌고 나올 사람이 있어 너희에게 오면,

너희는 내가 그의 고약한 행실을 보고, 재앙을 내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일이

(성도에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공동번역)

 

 

◑4. 두 산 사이에서, 즉 골짜기에서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                      *병거: 4말처럼 심판을 의미함.


슥6: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4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7절에 ‘두루 다니더라’ ..

계6장에도 네 말이 ‘나왔다’고 했는데, 말의 성격상 '두루 달린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똑같이 4말이 끄는 병거가 등장하고,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 저주, 재앙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슥6장의 네 말들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1절에, 두 산 사이에서 나온다... 고 했다.  6:1

 

중간정리하면,

계6장에서 '4마리 말'이 나오는 것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스가랴서’를 당장 떠올리게 했다.

스가랴서 1장, 6장에 말들이 나오기 때문에다. 


그러면서 자연히
스가랴서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14장까지 연상될 것이다.

거기 슥 14장에는

말일,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1)

메시아가 감람산에 서시고,

이스라엘이 이방을 이기고 놀랍게 승리하실 장면이 예언되어 있다.

(아직도 유대교인들은, 이 말씀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4말/4인 들을 통해

말일에,

메시아가 재림하시고, 승리하시는 모습을.. 지금 사도요한이 넌지시 말씀하고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두 산 사이에서 가 이해를 위한 중요한 키다.

 

‘두 산’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면, 슥14장으로 가 보자.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주제는 '4말'인데, 두 산 사이에서 4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슥6:1)

 

슥14:1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께서 감람산에 서시니까, 그 감람산이 둘로 갈라졌다.  :4

그 갈라진 두 산 사이, 그 골짜기로 모든 백성들이 도망하는 장면이다. :5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두 산 사이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심판과 구원, 축복과 저주)

그 날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성도에게는 구원의 날이 된다. 슥14:1참조

 

예수께서도 자주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복음서에서 자주 본다.

그것은..  메시아적 예언의 성취가 감람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이 일부러 ‘감람산’이란 지명을 기록했다고 본다.


여러분, 감람산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종말 때에 관한 강화(긴 설교)를 하신다.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주 기도를 하셨다. 눅22:39

‘그 감람산의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이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두 산 사이, 그 골짜기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등장한다.


솔로몬의 성전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기둥'을 통과해야 했었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갈 수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두 산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는 상징이다.

 

슥1:8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여기서도 말 탄 자가 골짜기 속에 있다.

 

두 산이 어디에 나오는가? -에발 산, 그리심 산


신11:26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에발 산에서 저주를 받는데


왜 슥14장에서는

그리심 산(축복의 산)이 아닌, 골짜기로 도망가서

왜 거기서 산다고 얘기하는가?


     타락한 인간은, 절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골짜기로 간다.

     그 골짜기는 축복의 산, 저주의 산 가운데 골짜기다.


     축복(그리심)과 저주(에발)가, 공존하는 곳이다. 우리는 거기에 산다.

     그래서 우리 삶에 고난, 고통, 재앙이 있다. 물론 축복도 있지만, 둘 다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심판, 재앙을 선포하는 메신저(네 말, 계시록의 네 말 포함)들이

그 두 산 사이에서 나온다는 말은,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의 완성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의 축복은 물론 필요하고..)

 

재앙이 필요한 이유는.. 성도의 성화, 구원의 완성, 성전의 재건 때문이다...


 

◑5. 환란과 고난의 재해석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심판과 저주의 산이 에발산과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 사이 골짜기로 피해서, 거기서 살게 된다.


그것은 재앙과 심판이 여전히 있는 곳이지만,

그 모든 것은 새창조, 재창조의 한 과정이고,


하나님 백성들의 옛 성품, 육신, 경향, 집착,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이런 것들을 죽여버리는 창조의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하여 결국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완성,

완전한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도 똑같이 재앙이 있고, 고난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시켜서, 인봉을 떼시는데,

 

     지금 4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재앙을 살펴보고 있다.

     그 4말들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4말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도 함께 심판을 받지만,

     성도의 심판은.. 새창조/변화/성화/성전의 재건을 위한 심판인 것이다.


4말에 의해 재앙만 가득 선포되지만,

그것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뭐랄까, '창조적 파괴/심판'이랄까?

쉽게 말하면, 아파트 재건축인 것이다. 심판하시고 새로 멋지게 짓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그리심(구원의 축복) 산만 필요한 게 아니라,

에발(저주) 산도 필요한 것이다.

 

4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그게 성도에게도 성화를 위해서, 필요하다. .. 그래서 세상과 함께 심판 받는 것이다.

 

▲환란과 고난의 재해석

우리 한국인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샤머니즘에서는

환란, 고난.. 이런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의 재해석이 필요한데...


여러분은 이 땅에 끊이지 않는 전쟁, 기근, 자연재해

늘 새롭게 나타나는 불치의 전염병 에 악인들과 동일하게 노출된다.

신자도 태풍 만나고, 불치병에 걸린다.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당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저런 불쌍한 사람들이 당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원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태풍이 휩쓸고 난 자리를 보면서,

실제로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경험하시면서,

‘아 하나님의 심판은 진짜 무시무시한 거구나!’


정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닥치게 되면, 저런 모든 재앙을 다 보탠 것보다,

몇 만 배를 더 곱한 그 진노와 심판의 날이 닥칠 것인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해 야 하는 것이다.


아 정말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는 진행되어 가는 구나!

계시록에 기록된 재앙들이 지금 계속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종말이 가까울수록, 점점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아 시간이 없구나. 우리도 마땅히 그 심판과 저주 속에 떨어져야 할 자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얼마나 복이냐?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 그 뜻대로 잘 살아가야 되겠구나..’

세상의 심판을 보시면서, 이런 것들을 느끼셔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 안전의 토대였던 것들이

저렇게 한 시간 만에 다 물에 잠겨 쓸모없이 되어버리는 거구나..

불에 다 타버릴 것이구나.

이런 것 우상으로 삼지 말고, 나의 영원한 목적지를 바라봐야 하겠구나...’


이렇게 우리에게는 그런 재앙들이 유익이 된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의지해야 한다.


‘큰 일 날뻔 했다. 나도 그 골짜기에, 그 깊은 물에 빠질 뻔 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모든 저주를 다 받으셨으니

내가 거기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십자가구나. 그래서 십자가가 복음이구나!’

하면서 복음을 다시 깨달으셔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에 고난, 고통, 재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땅에 내리는 재난은 2가지 이중성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로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정결케 하는 성화의 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아무런 환란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고,

나는 예수 믿고 났더니 만사형통이고, 걸렸던 병도 그냥 나았다

그런 분은 다시 생각해 보시라.


우리는 이땅에서 반드시 옛사람을 죽이고 천국에 가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 삶에는 고난이 따른다.



◑마치는 말

 

지금 우리는 계6장의 '네 말'을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그 출처인 슥1장과 6장의 '네 말'을 살펴보다가,

그 말들이 '두 산 사이에서' 나온 것에 착안해서, 슥12장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네 말'은 재앙의 소식이다. 계6장에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그 묵시의 출처인 스가랴서를 살펴보니,

4말의 재앙과 환란이, 성도에게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 우리 삶에 재앙, 재난, 환란, 고난이 끊이지 않는지.. 우리가 알게 되었다.

 

     (본문에서 절대 놓치지 말 것은 그 책의 인봉을 누가 떼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떼신다.

 

     그 분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재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인 것이다.

     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의롭고 선하시다. 인을 떼시는 일도! )

 

다윗이, 존경받는 다윗이 된 것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쳐 죽였을 때가 아니라,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다음에 상한 심령이 되어서

‘아 저는 이런 자군요, 하나님!’

그 과정을 통과해서 다윗이 되었다.

우리 삶에도 그런 환란과 괴로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락하신다.


너무 좋은 남편, 너무 좋은 아내!

너무 잘 해주는 사람 만나면..

하나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데, 혹시 별 도움 안 될 수 있다.

아내와 남편을 통해서 연단을 많이 받아서, 회개하고, 천국에 가는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는 인생채찍과 사람 막대기도 있고,

때로는 사기를 당해 망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재앙 속에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간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그런 재앙이 닥쳐올 때, 우리가 죽으면 된다.

죽고 새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왜 애굽에서 장정 60만이 나왔는데,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은 다음에 가나안에 들어가는가?

교회인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만사형통, 사업번창.. 이런 것들을 노래하시면서 신앙생활 하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는 존재’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로 더욱 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 삶에 닥치는 재앙, 재난은,

아 내 목표지점을 위해서 골짜기에 나를 두시는 구나

그런데 거기가 구원의 장소구나

네 말탄 자들이 거기서 나와서 심판, 재앙, 저주의 메시지들을 전하는구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게 복음이다.


많이 힘들수록, 자기 영혼에 좋은 것이다.

많이 힘들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는 것이다.

왜 주님이 인을 하니씩 떼시는 때마다, 재앙이 쏟아지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세상에게는 심판이고,

성도에게는 환란을 통해, 성화와 회개로 인도하셔서.. 결국은 구원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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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짜기(메투라)가 사44:27절에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골짜기(메투라)를 ‘바다의 깊은 곳’이라 번역하고 있다.

NASB를 보면, 더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the depth of the sea


그러니까 말 탄자가 골짜기에 서 있고,

그들이 그 골짜기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들이 ‘바다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뜻도 된다.


성경에서 바다의 깊은 곳은 죽음, 저주, 심판, 재앙을 상징한다.

그래서 요나가 다다 깊은 곳에 빠졌을 때,

내가 스올(음부)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으니.. 라고 했고, 욘2:1


바로의 군대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될 때도,

그 깊음, 골짜기, 메추라 라는 단어를 쓴다.


출15: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그 애굽의 군대가 돌처럼 깊음(음부, 죽음, 메추라)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 죽음과 저주와 심판에서 재앙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 바로 구원, 재창조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게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끌어올리신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시68:2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도로 나오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창조(구원)해 내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옛 사람이 죽는 것이다. 죽어야 다시 사니까!

심판과 저주와 재앙으로 죽이시는 것이다. (‘역창조’ 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구원)되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 고통, 환란이 있는 이유이다.

죽어야 다시 사니까!


▲렘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어 손을 잡고 끌고 갔는데도, 그들은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죽이고 다시 살리는 방법 밖에 없구나..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새)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죽여 버리고, 새 인간으로 반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는 반드시 심판, 저주, 재앙이 공존한다. ←4말의 심판은 곧 구원이다.
(불신자들은 그 심판, 저주, 재앙으로 망하지만..

어쨌든 심판, 저주, 재앙은, 신자/불신자가 같이 받는다는 뜻)


창세기에 첫 창조 때 그런 힌트가 나온다.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메추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조의 보증으로 서 계신 하나님께서 ‘깊음’ 위에 운행하신다.

깊은 수면 위!

새 창조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신다는 것을 미리 예표하는 것이다.


▲창7: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노아의 홍수로 다 죽여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해 내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 죽었다.

홍수로 다 죽는다. 그 깊음 속에 다 빠져 죽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홍수를 경험한다.

그런데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가 대신 죽는다.


우리는 그 저주, 재앙, 심판의 땅에서 함께 공존하지만,

그 재앙과 저주와 심판이 다른 이들에게 내려지고,

또 나에게 내려지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십자가를 자꾸 배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를 자꾸 이해하게 되고, 살아나는 거고,

다른 자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산다’ ‘죽는다’는 개념은, 국어사전적 개념보다 더 영적인 개념이 담겨있다.

‘산다’는 것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런 재앙, 저주, 심판이, 크리스천들에게는 ‘삶’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된다.

‘아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구나. 아 그래서 그 십자가가 꼭 필요한 것이었구나’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게 된다.


▲창8: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창세기1장에 첫 창조 때 썼던 단어를,

모두 다 죽고 난 다음에, 홍수 후에 다시 한 번 쓰신다.

새창조는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죽음’이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 계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