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일곱 영, 일곱 금촛대 계1:4, 12 인터넷설교녹취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 일곱 교회
계시록에 7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이 개념을 잘 이해해야
7인, 7나팔, 7대접, 7뿔, 7교회, 7영.. 이런 표현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 편지는 요한이 썼고, 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진 것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골로새, 히에라볼리 교회 등 다른 교회들도 많았다.
그런데 왜 굳이 7교회에게만 (이렇게 숫자를 맞춰서) 편지하는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숫자에다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는데,
7이란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당시 소아시아에는,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말고도
다른 여러 교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7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표현한 것은, 1:4a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게 썼다.’ 라는 뜻이다.
사도요한은 각 교회에 편지를 쓰고, 메시지를 주고,
맨 마지막에 동일한 말로 끝을 맺는다.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 계시록은,
어느 특정한 교회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에게 쓴 것이다.
이 7이라는 숫자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완전수 7’ 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그런 완성의 의미에서 7교회는, 전체로서의 ‘완성된 교회’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7인, 7나팔, 7대접도 그런 의미에서
즉 ‘심판의 완성’이란 의미에서 7이란 숫자를 가져다 쓰고 있다.
심판의 필연성, 현재성, 당위성, 긴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심판의 이야기를, 7이란 완성이란 수를 요한이 도입한 것이다. 주1)
◑2. 일곱 영
▲1. 일곱 영.. 7교회에 보내진 ‘완전하신 성령’을 의미한다.
요한은 ‘7교회’라고 표현과 아울러.
‘7영’(일곱 영)이라고 했다.
7교회와 마찬가지다.
홀로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한다.
‘일곱 영은.. 7교회에 보내지신 완전하신 성령님이시다.’ 주2)
▲2. ‘일곱 영’은, ‘일곱 눈’이다.
7눈은.. 7교회를 감찰하시는 성령님의 완전한 눈이다.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위 본문은 ‘7영은 7눈’이라고 말한다.
그럼 그 의미가 무엇일까?
7영은.. 완전한 하나님의 성령이시고,
7눈은.. ‘눈’은 감찰한다. 본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감찰하심과 보심의 눈이 완전하다’는 뜻이다.
(※입곱 뿔은, 그 권세가 완전하다는 뜻)
당시 성도들 입장에서 보면,
‘핍박당하는 우리 사정을 누가 알아주랴?’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7영은, 7눈/완전하신 눈으로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분은, '7뿔', 그 권세도 완전하시다.)
계시록의 4백 여 구절 중에, 거의 3백 구절 가까이가
구약의 내용을 짜깁기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계시록은 얼마든지 수월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7눈’을 해석하기 위해서, 구약을 뒤져야 한다.
‘7눈’은 구약의 어디에 나오는가? ↙
슥4:10,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7)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그런데 슥4:10절의 ‘일곱 눈’은, ‘다림줄’과 관련 있다. (영어성경을 읽어보시라)
일곱 눈은, 성령님의 완전하신 눈으로서,
온 땅을 두루 보고 계시며, 감찰하시는데,
마치 다림줄(어떤 기준, standard)을 갖고서, 온 땅/특별히 7교회를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찰(봄)은, 절대 완전하고, 절대 의롭다는 뜻이다.
◑3. 일곱 금 촛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1:12
‘일곱 금 촛대’는
당시 유대인 관점에서 보면,
스가랴 4장을 퍼뜩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소의 7등잔(촛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3)
상상도 임.
▲슥4장의 환상은, 하늘의 성전,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
천상의 하나님 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순금등대에 7등잔이 있고, 그 양옆에 2그루의 감람나무가 있다.
그런데 그 감람나무에서 순금등대로 계속 기름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는 장면이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설명하는데,
네가 보는 그 모습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즉, 오직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라고 설명한다.
▲슥4장은,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간다. 슥4:9~10
그러니까 이 장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참 교회의 모습이다.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우리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다. 엡2:22
그 모습을 슥4장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이 누구인가? 주4)을 보세오.
그 성전을 짓는데, 벽돌이 모자라고, 이방인의 반발이 있고 해서
계속해서 성전 재건이 지연되고 있을 때,
선지자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스가랴에게 하나님은
‘스룹바벨(예수님)이 재건하기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진다’ 라고 환상을 보여주신다.
성전은 결국 주전516년에 완성된다. (아래 계속 설명 나옴)
◑7교회, 7영, 7촛대의 연관성
▲에스라, 느헤미야, 스가랴서의 성전 재건은.. 신약 교회의 탄생/재건을 의미한다.
성경에 성전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스가랴서, 학개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다.
이 성전 재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묘사할까?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무너뜨리라. 내가 사흘 만에 새로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구원의 모습, 새 창조/새 교회의 모습을
구약의 성전재건의 모습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 구원은 완성되고야 만다.. 를 읽어내셔야 한다.
(그래서 슥4장의 환상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 일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다.
오직 성령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슥 4장에 ‘7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며,
그 환상에 빗대어,
요한은 묵시적으로 계1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7촛대, 7영의 묵시적 표현을 동원해서..
▲성령과 교회의 연관성
계1:20절은, 7촛대는 7교회라고 말씀한다.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하늘에 올라가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래서 교회를 완성하셨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다.
성령이 오셔야,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리하면,
지금 스가랴서 4장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고 있다. 그 기름은 성령님이시다.
그래서 그 기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촛대(교회)는 탄생되고,
성령님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심으로 탄생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와 충만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사한다.
▲적용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여러분 각자가 교회이다. 여러분은 이미 '불이 붙은' 교회이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빛을 발하면서 살게 된다.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된다.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7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교회
라고 이렇게 (슥4장을 묵시적으로 표현하며) 설명하고 있다.
▲마치는 말
우리는 '보좌 앞의 일곱 영', 즉,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들이다. 나그네들이다.
주님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신다.
감람나무에서는 지금도 계속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 등불/촛대는 불타고 있다. 빛을 발하고 있다.
여러분, 힘 내셔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좌 앞에 일곱 영’이란 말만 듣고도
(슥4장을 떠올리며) 그렇게 힘을 얻었다면,
우리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한다.
(슥4장을 떠올리며)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를 극복하고,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해 지었듯이,
하나님은 반드시 속히 그 교회를 지어가실 것이고, 완성하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으랴? 그러므로 힘을 내시라.
하나님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시라. 평강을 찾으시라. 은혜와 평강(계1:5) 그것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증인들이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수천만 불짜리 건물 짓고 사람들 모아서.. 대단한 일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서.. 우리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교회의 멤버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많이 모이고, 건물 큰 것 사는 것이.. 부흥인줄로 (잘못) 안다.
참된 부흥은 우리가/이 ‘교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는 존재로 잘 지어져 가는 것이 부흥이다.
하나님 보좌 앞의 여호와의 일곱 영이, 그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슥4:6, 계1:4
....................... 더 읽으실 분 ......................
▲(성막에서) 촛대는 지성소 앞의 성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보좌(지성소) 앞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촛대에 불을 밝혀서
1년 365년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 레24:1~4
제사장 아론의 사명은, 그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레24:3~4
성막에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공급해서 등불이 꺼지지 않게 했다.
그게 제사장들이 했던 주요 업무 중 하나이었다.
그래서 옛 성전,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다.
그런데 슥4장, 스가랴 환상은, 감람나무에서 직접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다.
옛언약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했었다.
새언약에서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기름/성령님이 하신다.
성막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그 성막 안에 촛대(교회/성도)는,
그 하나님 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존재이다.
그 무리가 교회(성도)이다.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 교회(성도)는 일단 불이 붙여지면, 영원히 불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치 않으면...
당시 유대인들은 ‘보좌 앞에 7영’ 이란 말을 듣는 순간, 계1:4
슥4장의 7촛대(등잔)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성막에서 지성소 하나님의 보좌 앞에 7등잔/금촛대가 있고, 거기에 기름이 공급되고 있으니까)
그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 슥4:6
바로 이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스룹바벨 성전은 기어코 완성되어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슥4:9a
그러면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재확인 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이렇게 소심하게 겁쟁이처럼 살 수 없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하지..' 하면서 결단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교회이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이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그 빛이 비춰지고 있는가? 그 삶이 나오고 있는가?
그 불은 이미 2천 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다.
여러분의 심지에 그 불이 붙어있는가? 빛이 나오고 있는가?
▲당시 계시록의 수신자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먹고 있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자폭하고 싶을 만큼 고통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요한계시록을 받았다.
누군가가 이 계시록을 감동적으로 읽어주었을 것이다.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읽었을 때, 계1:4~5
그들은 감격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 우리는 지금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이루시겠구나’
그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 옆에 있는 그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이 계속해서 공급되어서, 그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듯이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교회는 성령으로 탄생되었고,
성령의 기름공급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새하늘과 새 땅에 끌고 가시겠구나.. 하면서
평강을 얻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이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평강은.. 아무 근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나지만,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고통이 없는 게 아니라, 고통이 있지만,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리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의 평강이다.
하나님은 왜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놓으셨는가?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존재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과 경건을 연급하고 훈련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게 기독교요, 교회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훈련교관을 붙이신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분냄, 짜증, 핍박, 횡포.. 이런 것들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그러면 우리는 인내, 사랑, 용서, 온유를 배운다.
‘어떻하다가 내 삶에 저런 원수를 만나서 내가 이 고생인가?’ 하지 마시고,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를 지금 가르치고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핍박과 환란을 기뻐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이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여러분을 만들고 가고 계신다.
지어 가고 계신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보다’는.. 타토트리조마이/반영하다/반사하다/거울에서처럼 보다.. 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 있다.
이 시제는 현재형이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 진행형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내는 촛대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위 말씀들은 그 빛을 발하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리는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빛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을 통해서이다.
요일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세서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처럼, 너희는 교회다. 라는 뜻이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빛이다’ 이다.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 교회(성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빛으로서, 빛을 발하며 사는 것이다.
무엇이 빛을 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가?
빛으로 살다 가신 분(예수님)의 삶을 닮아 가면 된다. 그 삶을 본 받으면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다.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 빛이 왜 왔느냐 하면, 우리를 빛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서,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해서,
그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
주1) 완전수 7
레16: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7배나 더 징치할지라.
여기서 ‘7배’도 딱 ‘7배나 더 벌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 전체, 충만 이런 뜻이다.
너희들에게 내려진 벌은, 중한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란 뜻이다. *필연적 : 완전과 연결되는 이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70번씩 7번 용서하라 하셨는데,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응징하라는 뜻이 아니고,
‘7’이란 ‘완전 숫자’의 의미를 놓고 볼 때
끝없이, 완전히 용서해라.. 는 뜻이다.
주2)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聖父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聖靈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聖子
위 구절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일곱 영>의 전과 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배치되는 것을 보면, ↖
<일곱 영>을 ‘성령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은 맞다.
주3)
계1:12절의 촛대는 헬라어 '루흐니아' 인데, 이 말은 70인역에 히브리어 '메노라'의 번역이다.
히브리어 '메노라'는 슥4장에 나오는 그 등장(촛대)이며, 성막의 성소에 있던 촛대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계시록 수신자 유대인들은, 촛대(루흐니아)란 말을 들었을 때,
금방 슥4장의 촛대(메노라)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덴뿌라 하면 오뎅이고, '이까'는 오징어이듯이, 루흐니아는 메노라이다.
주4) 스룹바벨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런데 주전536년,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한다.
스룹바벨은 1차포로귀환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총독)이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손자이다. 그는 왕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도하여 성전을 재건하는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다.
스가랴 선지자는 주전520년 경부터 사역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페르샤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있었다.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는데, 앗수르가 혼합정책을 쓰기 시작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데려갔고, 앗수르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심어놓았다. 그래서 피가 섞였다.
남유다가 포로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북이스라엘인(사마리아 인)들이 자기들이 성전재건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남유다 귀환민들은, ‘너희 같은 더러운 혼혈자들과 협력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이 받아서, 그 성전재건을 오히려 방해했다.
그 현장에 시체를 갔다 놓기도 했다.
그리고 (요4장 수가성 여인이 말한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근처 그리심 산에다 자기들 자체로 성전을 지었다.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 ▣ 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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