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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4강 다섯째 인 2930

LNCK 2011. 3. 25. 11:53

 

◈다섯째 인                   계6:9~11                 인터넷설교스크랩, 녹취



◑본문 설명/ 지상에서 순교적 삶을 살게 되어있는 성도들


▲6: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4인에서 전쟁, 기근, 전염병 등 재앙이 계속 등장하다가

5번째 인에 있어서 뜬금없이 ‘순교자’에 대해 나온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순교자 하면.. ‘예수 믿다가 살해당해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렇다면 천국의 제단 앞에는, 순교한 사람들만 갈 수 있다는 얘기일까? 물론 아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위 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 들은,

‘순교/살해당한 사람들’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성도의 총체를 뜻한다.

 

     

      마24:9 그때(말세)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하시면서

‘그 때는 사람들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고 하셨다. ↖

‘12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그들은 전체 교회를 상징한다.


즉,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그들을 다 순교자다.. 이런 뜻이다.

 

모든 교회/성도는 반드시 이 땅에서 환란, 궁핍, 핍박을 통과한다’..는 의미다.

그게 본문이 말하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증인의 삶’이다.


     지상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마치 죽임을 당한 것처럼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재단 앞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는데...  


▲6:10절,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기도는, 단순히 자기 억울함을 보복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랬는데,

그런데 하늘에 올라가면, 마음이 바뀌어서 ‘빨리 복수해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교회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능력과 위엄과 권세를 가지신 대 주재이시며, 죄를 증오하시고, 처벌하신다는 면에서 <거룩하시고>

자신의 말씀에 진실하다, 신실하다는 의미로 <참되신> 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성도들의 기도는, 그 거룩하시고 참되신 성부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세상의 구원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기도이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니까...


▲6:11,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참 잔인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죽어서 올라올 때 까지, 먼저 온 너희는 조금 쉬고 있어라.’

이런 식으로 들린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죽어야할 자들이 자 순교해서

그 숫자가 다 차면 완성될 거야, 그때까지 잠시 쉬면서 기다려라.. 가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죽임을 당할 자’로 표현하신다. ↙


계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교회를 뜻한다.)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지 보자. (죽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교회는 이렇게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6:9절의 ‘죽임을 당한 영혼’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 땅에서 환란과 궁핍과 핍박속에 던져져서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을 당하게 되는가?


교회/성도가 마치 순교자처럼,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 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우리는 새 생명,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옛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 안다.

 

그 옛 사람을 부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환란'이요, ‘순교자적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환란과 고통을 통해서.. 이 땅에서 '죽는다'.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하나 하나 죽여간다. 그러면서 거룩을 이루어 간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나?

우리의 죄악된 옛 육체가 되셔서 대표로 죽으셨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저주 받은 ‘내’가 되셔서, 거기서 대신 죽으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새생명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옛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예수가 죽으신 그 죽음을, 우리는 똑같이 고난에 동참하여 죽게 된다.

그래서 우리 삶속에는 당연히 어떤 모양으로든 환란, 궁핍, 고난이 있다.


그 '4가지 인'의 재앙이 우리 삶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도 그 4가지 인의 재앙에 그대로 노출된다. 하나님은 거기서 데리고 올라가시지 않고,

그냥 그 속에 놓아두신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벌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성도를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된다. (이 부분은 지난 '33강, 4마리 말'에서 나누었다.)


그래서 이 1~4인의 재앙과, 5째 인의 재앙이 붙어 있다.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4인의 재앙이 우리 삶속에 그대로 있으면서,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5째 인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세상에서 죽임 당하는 환란이 뒤따르는 것이다.


고난이 올 때마다 마귀는 우리를 속일 것이다.

그건 너희에게 고통일 뿐이다.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

너희도 그냥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아라. 욥에게 그랬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가짜 성도들은 거기에 다 넘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얻어낼 어떤 부산물(축복)들을

목적으로 삼고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환란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길가, 가시밭, 돌짝밭이 나오는 것이다.

다 옥토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 지상에서 성도의 삶의 본질을 잊지 마시라. 그것은 환란이지, 축복이 아니다.


옛사람을 죽여가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모든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든 고난에 던져지게 되어 있다.

 

그 옛사람을 죽이는데,

만사형통/행복/형통.. 이런 것들만 오면.. 자기 옛사람이 죽겠는가?

만약에 만사형통/행복/형통.. 이런 것들만 오면.. 그 사람은 천국 가기 힘들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인 것이다.


세상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내 살(육신)을 잘라내어야 하는 그 아픔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

거기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마22:15절 이하에 나오는 ‘세금 논쟁’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중략된 부분, 여기 클릭 해서 보세요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인생과 신앙생활을 허락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가이사의 것’을 실컫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반대로, ‘가이사 나라의 것’들을 하나 하나씩 포기하며 가는 것이다.

가이사 나라가 주는 편안함, 달콤함은 다 헛된 것이구나..

절대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구나..

그 허무함을 것을 배우고 살라고, 이 땅에 살려두신 것이다.


그래서 진정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구나,

가이사의 나라에 있지 않구나!

나는 오직 하나님 나라만 소망하며, 그 은혜와 사랑만 구해야 되겠구나’

 

그 헛됨과 그 참됨을 동시에 깨달으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최근 교민신문에 달마사 광고가 났는데

‘와서 복 받으십시오!’ 라는 글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어째서 거기서 하는 얘기가, 교회당에서 하는 얘기와 똑같은지 모르겠다...

어떻게 무당들이 하는 얘기와, 과거의 부흥사들의 얘기가 똑같은지 모르겠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죽을 때까지 고생하면서 신앙생활 했는데,

엉뚱하게 믿다가, 결국 나중에 천국에도 못 가면.. 안 된다.

자기 욕심이 있으니까, ‘복 받아라’는 소리에 혹해서, 자꾸 따라가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을 ‘광야길’이라 표현한다.


‘광야 길’이란.. 물도 없고, 메마르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아주 척박한 곳이다.

그럼 그 광야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거기서 뭐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이 ‘광야길’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아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그 훈련을 시키시려고.. 광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위에서 '성화'라는 말로 설명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가이사의 것’들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여호와가 나의 삶의 목적이며,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인간은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신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나..


재앙, 환란, 궁핍이 가득한 광야로.. 우리를 내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세상에 진저리를 내면서 관심을 끊고,

‘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평안, 보호, 사랑이 진짜구나!’ -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잠시 설교의 맥을 정리하면,

지금 우리는 ‘5번째 인 - 순교자적인 성도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그것을 각도를 약간 바꾸어 설명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며,

‘광야의 삶’과 같은 것이다... 라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보시라.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축복받았다고 행복해지고, 천국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신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 경고의 말씀처럼,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되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 종종 본다.

어렵고 힘들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사업 잘 되고, 부자 되면.. 신앙생활이 나태해지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야 훈련이, 또 반복해서 계속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분,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


     이 복을 ‘오복’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하다.

     참된 하나님과 영생의 즐거움을 아는 복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인용한 신8:3~15절을 요약하면,

광야에서 쌩고생 시키신 것은.. 마침내 영생의 복을 주기 위함이라.. 이다.


     성도의 지상의 삶의 본질은.. '광야'인데,

     그 쌩고생을 통해서, 성화되고..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열망하는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끊임없이 ‘가짜 복’으로 우리를 시험한다.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복 받았어? 부자 되었어? 성공 했어?

그렇다면 그걸 한 번 꺼내서 보여줘 봐!’


그러니까 신자들이 오기가 나서, 이를 꽉 깨물고 결심한다.

‘그래,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보란 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


그래서 교회적으로도,

일단 사람 많이 모여야 되고, 헌금 많이 모여야 되고..

그래서 그 ‘힘/능력/권세’를 보여주면서

‘봐, 하나님 믿으니까 이렇게 강해 졌잖아?’ 한다.

 

개인적으로는 

부모, 형제, 친척 돈 다 끌어서라도 사업을 거창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래서 신자가 피해를 준다.)

그 축복에 대한 열망, 성공에 대한 자기 신앙이 확고하니까, (잘못된 신앙인데.. 자기 야망인데..)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뜻(자기 성공)'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되어도 마땅한 것이다.

 

보니까, 기독교의 오리엔테이션이 완전히 잘못 되어 버렸다.

자기가 죽고, 십자가 지는 것이 기독교 방식의 승리인데,


교회/성도가 세상 방식과 똑같은 승리를 추구 하면서, 그런 와중에

본래 추구해야할 ‘십자가 방식’의 승리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경쟁도 불사하고..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일단 많이 모이고, 세를 과시 해야 되다 보니까..

(마귀가 뒤돌아서서 키득키득 웃고 있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름만 ‘하나님’으로 부르고, 섬기지..

실제로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우상)를 섬기는 것이다.

 

 

 

◑정리하면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서 ‘죽임을 당한 영혼’은

순교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다가 핍박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지상의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고 설명 드렸다.


그래서 4복음서에도, 예수님이 가장 빈번하게 말씀하신 것이

복 받아 부자되고, 성공하고, 네 힘을 과시하며 살아라.. 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본질이, ‘순교자적 삶’에 있다는 것이다.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기도는 ‘보복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가 속히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의 기도 내용은,

‘축복해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 복음 전파의 완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의 기독교는

그 오리엔테이션(기본 방향 설정)이 잘못 되었을 수 있으므로,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거기에 열심까지 보태지면.. 대재앙이 일어난다.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에 관한 관련글 ☞ 아르고스의 배와 십자가


6:11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기다리라) 하시더라.


지상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의 본질은,

‘죽임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 환란과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 것/'가이사의 것'들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배우고,

하나님과 그 나라,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것이..

(계6:11절의 표현에 의하면) 기다리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네 힘을 보여줘!’ 라고 유혹하는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 힘을 보여주는 순간.. 기독교는 그 정체성(십자가)를 잃게 된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다. 덩치는 클지 모르나..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삶에 닥치는 환란, 궁핍, 핍박, 고난은.. (이상한 게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이다.

광야생활을 40년 동안이나 허락하시는 것은.. 마침내 참 복을 얻게 하심 때문이다. 신8:16


     예수 믿으면, 그 오복을 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남편/물질/명예를 다 빼앗아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것 손에서 놓고, 참 복을 잡으라고!

   

     물론, 그런 과정을 다 통과하고, 욥처럼, 다시 갑절로 받는다.

     그러나 언제나 초점은 ‘오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다.

     그 복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누리게 된다면.. 그 오복들도 주실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그래서 4복음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결핍된 광야에서

마귀가 인간의 대표이신 예수님을 시험하셨는데,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로서 보기 좋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 섬겨라!’ 하시면서

 

네 현실적/물질적/힘을 보여줘! .. 하는 마귀의 유혹을 다 이기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보여주는 대신에,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고 말았지만,

예수님은 그 광야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이다.

보란 듯이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는/십자가를 지는’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간 사람은.. 십자가 죽음 후에 평안, 생명, 부요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어서, (십자가에서 죽지는 않고) 

     부자 되고/성공하고/힘을 과시하는 길로 가다가는..

     미끄러질 것이다. 그것 자체가 아예 ‘예수 믿는 길’이 아니니까!


60만 명이 출애굽 했는데, 2사람만 빼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는 일’이 생길 때.. 너무 낙심 마시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라.

 

저/설교자는 목사가 되어서도,

‘어쩌면 인간(나)은 이렇게 안 바뀌냐?’

정말 신앙생활의 길이 더욱 더 어려워짐을 느낄 때가 많다.

(그건 수도원에서 50년 산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괴롬 속에서도, 좁을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서 힘을 보여줘 봐!’ 하는데도,

계속 묵묵히 힘이 없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순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인 것이다.

 

 

아프리카의 자이레(콩고)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한

영국 여의사 헬렌 로즈비어의 간증이다.


자이레에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군은 헬렌 선교사를 잡아서 폭행했다.

50만 명 거주 지역에 의사는 자기 혼자뿐이었는데,

그를 잡아다가 고문하는데..

헬렌 선교사는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군요’ 라고까지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분명한 깨달음이 왔는데

‘헬렌, 너는 분명 21년 전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니?

바로 이게 그 특권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고난은 네 고난이 아니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야

예수님은 잠시 네 목숨을 빌리시는 것뿐이야,

네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야,

너는 그 죽음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특권을 얻는 거야!’


헬렌 선교사는, 그 고통 속에서 이 깨달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 쓰기를

‘예수님은 그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잔인함, 악함을 조금도 만류해 주지 않으셨다.

나는 여전히 아팠고, 두려웠고, 여전히 고통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오고 나서부터 나는 달라졌다.

이제 이 고통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 영광스런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십자가의 삶, 순교자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방법으로 쓰여진다는 감격에.. 나는 잘 참아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헬렌 선교사가 고통에서 피하도록 안 말려 주셨다.

(물론 말려주시는 경우도 있고, 안 말려 주시는 경우도 있다.)


이 헬렌 선교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17살 난 한 아이가 구원을 받는다.

나중에 그 아이가 자이레의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되어서,                                             ▣ 계시록  

그를 통해.. 자이레의 복음전도가 시작된다...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에 관한 글 보기 http://blog.daum.net/rfcdrfcd/15972442 (하단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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