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공감의 능력 -펀 글, 출처보기-
▶놀이터에서 아이 두 명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네 옆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온다.
아이들은 고양이를 잡아보려고, 뒤뚱뒤뚱 달려가다가 꽈당 넘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어디에선가 두 엄마가 뛰어온다.
한 엄마가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며 혼낸다.
엄마의 호통에, 아이는 더 크게 운다.
“그러게 엄마가 항상 조심하라고 그랬지! 고양이는 왜 건들려고 그래!
뚝 그쳐! 얼른 그치지 못해?”
계속 엄마가 무섭게 다그치자, 아이는 겨우 울음을 삼킨다.
그런데 다른 아이의 엄마는 약간 다른 태도를 보였다.
“넘어져서 아팠구나. 어디 좀 봐. 많이 아프니? 고양이에게 인사하려고 그랬나보네~”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친다.
“엄마, 고양이는 어디로 갔어?”
▶두 엄마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모두 아이가 넘어진 것이 걱정스럽고, 안정시키고,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엄마 모두 의도가 이루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한 엄마는 호통을 쳤고,
다른 엄마는 아이의 관심사를 헤아려주었다.
혼나서 울음을 그친 아이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으면 더 혼날 것이기에.. 우선 울음을 그쳐야 했고,
다른 아이는 울음은 자연스럽게 잊고.. 자신의 호기심을 계속 펼쳐나가고 있다.
▶앞으로 이 두 자녀가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혼난 아이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뒷전이고,
엄마가 지시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혼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랬듯이, 엄마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절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고,
그 자리를 엄마가 차지한다.
자기 관심사를 헤아림 받은 아이는 이후로 커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엄마에게 말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엄마는 나의 가장 큰 지원자이자 안내자일 테니까.
내가 아파서 울고 있으면.. 항상 나를 걱정해주고, 내 관심사를 이해해준다.
그러니 엄마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그냥 불필요한 생각일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면 된다.
▶시간이 흘러 이 두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더 극적인 차이가 생긴다.
아이를 혼낸 엄마는
자기 아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랬듯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엄마가 관리했기 때문에,
엄마의 역할이 곧 성적으로 증명되는 것일 테니까.
필요하다면 여러 개의 학원과 과외로 아이의 생활을 꽁꽁 싸매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 엄마에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엄마가 아이에게 설정한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아이의 관심사를 살핀 엄마의 경우에도
아이가 공부를 못하고 성적이 뒤처지면, 걱정이 되기는 매한가지겠지만,
적어도 아이의 생활을 통제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와 기타 여러 가지 분야의 성취도에 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다 자녀에게 옮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녀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걸 이루는 성취감이 동기부여가 됨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광경은 놀이터뿐만 아니라, 지금의 교육풍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수험생이 상담을 신청해서 고민이 무엇인지를 들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안 나오는 성적, 혹은 공부시간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
잠이 너무 많거나 게으르고, 장래희망을 잘 모르겠다는 고민.
그런데 장기간 마음을 터놓고 깊게 이야기해보면
갖고 있는 고민의 대부분이
가정 내의 잘못된 교육방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꾸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녀의 관점에서 보는 것, 자녀의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이 뒷전이 되었다.
시험을 망치고 시무룩해있는 자녀의 마음을 위로하고
성적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만드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있지만,
어떤 부모는 먼저 다그치는 반면... 어떤 부모는 먼저 이해한다.
자녀가 시험을 망치고 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위로를 받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모님께 혼날 걱정부터 하고 있는가..
부모님과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분명 자녀는, 부모의 교육관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가정 내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교육 담당이 되어버렸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어머니가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인식되고,
어머니들의 모임은 항상 자녀교육 이야기로 분주하다.
(그래서 ‘엄친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아이에 대한 책임이 교육 쪽으로만 쏠려있는 것은 큰 문제다.
성적 향상을 위해 고액 학원비를 대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자녀 대신 입시요강을 꿰고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아이에게는 단 한 명뿐인 엄마가 해주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공감’이다.
세상 그 누구도 엄마만큼 아이의 모든 것을 공감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①이미 지금 그 사실을 절감하고, 좀 더 바람직한 교육관과 책임의식을 심어주고 싶어도
그동안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알아서 혼자 공부하게 만들고 싶은데
너무 안하니까, 불안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뭔가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심해지면, 처음에는 공부를 강요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부모가 아이의 눈치를 보며, 공부를 ‘부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②두 번째 문제점은, 다른 엄마들은 다 해주는데
우리 아이만 못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보다 잘해주지는 못해도 뒤떨어지게 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은 인지상정이므로
주위 사람들이 모두 교육에 극성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녀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자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모든 어머니가 갖고 있다.
(그러나) 마치 고양이에게 가다가 넘어져서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두 엄마처럼,
‘자녀의 공부’를 공통적 목표로 둔 엄마들의 교육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집에서 인터넷만 하고 있는 자녀를 마냥 공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간섭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고등학생쯤 되면 교육방식을 바꾸기 위한 시도는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때쯤이면 이미 자녀들 나름대로 생각의 틀이 잡혀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기초한 사고가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자녀교육은, 조기유학이나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평생 지속된다.
그러므로 중고등학교에 갑자기 교육방식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매일같이 잔소리하던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풀어버리면,
아이는 자기주도적 학습습관을 갖기 이전에.. 자유를 즐길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가장 효과적인 교육정책은.. 대화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나름의 사고방식이 있는 중고등학생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은 부작용이 크다.
교육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교육관과 양육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때 자녀의 생각을 반영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조금씩 이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엄마→자녀 나중에 아빠의 최종판결> 방식의 일방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엄마, 아빠 ↔ 자녀]의 방식으로 쌍방향으로 소통해서 어떤 일이든 결정해야한다.
가령 학원을 다닐지 안다닐지, 어떤 문제집을 언제까지 풀지를 정할 때
아이가 관심이 없는 것을 억지로 시키려고 한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심한 선생님’이 되어버린다.
만약 아이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는 또다시 부모의 호통을 겁내고,
이번엔 좀 더 강한 의무가 지어질 것이다.
그런데 자녀의 생각과 동기를 쌍방향 소통을 통해 공유하게 되면
자녀들은 성취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렇게 했는데.. 설사 실패했다고 해도,
자신의 열정과 의욕을 전제했으므로, 그 결과는 아이가 스스로 지게 된다.
(엄마 탓을 안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잘못된 방식의 의사소통방식 일방적 소통방식 을 가진 학생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없다.
성공했을 때에.. 위에서 내려진 의무 하나를 완수했을 뿐이므로 기쁘지 않고,
실패했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선 예민하다.
그래서 ‘나는 뭘 해도 잘 못하는 아이’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에 부모만큼, 특히 엄마만큼 아이를 완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자녀가 이것을 직접 경험하면,
수 십 점이 오른 대박 난 성적표보다 훨씬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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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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