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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은 경외함에 있다

LNCK 2011. 4. 13. 20:09

◈친밀함은 경외함에 있다            시25:14               출처보기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25:14

 

▲경외함이 있는 곳에, 친밀함이 있습니다.

경외함이 없는 곳에는, 친밀함도 없습니다.

한때 친밀했다 하더라도, 경외함이 사라지면.. 이전의 친밀함은 변질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친밀함이 아니라,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혼자 친한 척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과거에 한 때, 어떤 실력자와 가졌던 친분을 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우 초라한 언행이 됩니다.)

 

▲경외함이 없으면, 함부로 행동합니다.

경외함의 반대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28:14

또한 경외함의 반대는 방자함입니다.  잠14:16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을 피하나

어리석은 자는 조심 없이 함부로 행동한다.’ 잠14:16, 현대인의 성경

 

이처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스스로 악을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마음이 완악해지고 방자해집니다.

교만하여져서 조심 없이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경외함이 없으면.. 자기를 과신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 경외 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스스로 믿느니라’을 KJV는 ‘The fool is confident’ 라고 표현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교만입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신감’confident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반드시 ‘패망의 선봉’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떠나면..

어리석게도 나 자신을 과신하게 되면서.. 결국 교만하여 무너지게 됩니다.

 

무너진 다음에야..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너무 over-confident했음을 깨닫지만,

항상 이미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하나님에게서 경외함을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비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환상도 보고, 계시도 받고, 천사도 자주 만납니다.

주님과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심지어는 밤하늘의 별을 함께 바라보며 데이트도 합니다.

전쟁도 이기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안수기도와 축복도 받습니다.

대단한 체험의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대단한 믿음으로 오랫동안 인내한 끝에,

100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경외함을 주님에게서 직접 인정받은 것은

그보다도 한참 후의 일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하나님은 물론 아브라함의 중심에 있는 경외함을 이미 보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외함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을 통해

실제로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수준으로 온 세상에 보여진 것은

그가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한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떠난 삼일간의 여행...

그리고 그가 겪었을 고뇌와 찢어지는 심장...

마침내 그가 믿음으로 칼을 들어 이삭의 가슴을 겨눈 그 순간

그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고뇌와 찢어지는 가슴을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을 통해 온전히 표현해낸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그 순간까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시고자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고자

그토록 오랫동안 아브라함을 참고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약2:23, 사41:8

 

▲왕의 은총을 잠잠히 기다린 에스더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 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에5:2

 

에스더는 왕을 만나기 위해 삼일간 금식하고 왕후의 예복을 차려입고

왕의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왕비이지만

왕의 보좌 옆자리로 바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뜰에 섭니다.

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과 정결을 가지고 자기의 자리에 섭니다.

왕의 긍휼과 인자를 기다리면서, 왕이 옆자리로 불러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아무 때나, 제멋대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주님 옆자리로 나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과 방자함, 그리고 무모함입니다.

 

우리가 겸손과 정결함을 가지고

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섰을 때, 오직 주님이 불러주시기만 간절히 기다릴 때,

그때 자비로우신 왕께서 인자와 긍휼을 베푸사 홀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경외하는 자에게는

인자(시103:17)와 긍휼(시103:13)을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만왕의 왕께서

주님의 정하신 합당한 때와 기한에 맞추어

사랑스러운 신부를 당신의 품으로

사랑스러운 왕비를 보좌 옆으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왕의 은총(favor)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순간을

고요하고 평온한 심령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래서 우리의 기본자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즉 우리의 베스트를 다한 경외함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시119:3

 

주님은

경외하는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시25:14

 

주님은

경외하는 자들에게, 그 언약을 알리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또한 언약의 말씀도 반드시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중심이 바른 것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주님은 그 두 가지를 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사랑과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서 정말 보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가 진실로 겸손한가.

이 두 가지입니다.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5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시기 위해서, 사도로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물어보실 때,

“설교 잘하느냐? 믿음이 크고 능력이 나타나느냐, 충성되게 할 수 있느냐?”

이런 것을 물으시지 않고

 

집요하게 3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제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니까

“됐다. 합격이다. 다른 거 볼 것 없다. 됐다.”

그 다음에 “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게 주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뭐라고요?

‘예수님을 사랑해서 양떼를 먹이는 것’입니다.

‘내양을 치라’는 .. ‘내양을 먹이라 feed my sheep’는 뜻입니다.

 

오늘날, 양떼가 꼴을 충분히 먹고 있는지/없는지.. 관심 없는 목자가 있다면,

또한 양떼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양식을 공급하는 책임감이 없는 목자가 있다면,

-그 중심이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중심이 올바른 베드로 같은 목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양떼를 열심히 먹입니다!’

그 일에 늘 관심을 갖고, 매일 매시간 힘씁니다.

그 일에 자기 인생의 사활을 겁니다.

 

(그런데 중심이 올바르지 못하면, 자꾸 뭘 크게 벌이려고 합니다.

자꾸 사람들 불러내어, 북적거리게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사랑과 겸손이 왜 상호보완적인가 하면,

위에서 베드로 사도에게서 보듯이,

 

주님을 사랑해서, 양떼를 먹이는 일이.. 자기가 할 일이지만,

자기를 통해서, 자기 속에서, 주님이 하실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주도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겸손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하나님의 눈은 온 지구를 두루 살피면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성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 마음이 자기에게로 향합니다.

내 지혜, 내 지식, 내 재능, 내 학벌, 프로그램, 수단, 노력, 인격!

이것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다 교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눅10:21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은 교만의 의미로, 어린아이는 겸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 지혜와 슬기가 교만의 의미로 쓰였는가요?

자기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 슬기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이나 성실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왜 어린아이는 겸손한가요? 어린아이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의존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생활하는 것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그게 겸손입니다.

 

미가 6:6~8절 말씀에서, ‘겸손’이  또다시 재 확증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먼저 기본적으로 요구하신 게 뭐예요? ‘공의를 행하는 것’.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기 머물렀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 머물렀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거 원하십니다. 우린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20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는 수준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뭐예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의를 행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랑이고 겸손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언행을 단순히 보고 계신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중심이 뭡니까?

중심은 마음의 깊은 곳입니다. 마음의 속이요, 뿌리입니다.

그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을 사랑,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게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바로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클릭- 후, 화면 하단에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를 보세요.


 

*여기까지만 녹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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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신비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에는 세 단계가 있다.

 

▶1. 성전의 뜰에서 만나는 관계

 

주인과 머슴의 관계이다.

아직 가족 관계에 들어오지 못 했다는 뜻이다.

(아직도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남자하인은 실내에 들어오지 못 한다.

밥도 부엌에서 창문 틈으로 내 주면, 마당에서 창문을 통해 받아먹는다.)

 

서로 친밀한 인격적 (부자) 관계는 아니고, 하나님 편에 가담한 정도로 만족한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 분의 임재를 잘 체험하지 못 하고, 친밀한 만남과 교제가 없다.

 

▶2. 성소에서 만나는 관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단계,

아버지께 드리는 것에는 아직 인색하다.

 

실내로 들어오지만,

침실에서 잠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친밀하지는 못 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3. 지성소에서 만나는 관계

 

신랑과 신부의 부부 관계.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서로 감정을 교감하는 단계이다.

하나님을 부를 때, 내 주여! → 내 아버지여! → ‘내 님이여!’로 발전된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신다.

부부가 한 방에 쓰며 침실에서 서로를 기쁘게 하듯,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늘 궁리한다.  

 

신랑 되신 분을 위해 자기 몸과 마음을 늘 깨끗이, 거룩히 단장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결혼의 신비

 

이런 결혼/부부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의 신비, '하나님과 신부의 관계'를 체험한다.

남자와 여자가 부부를 이루어 함께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신부의 관계를 (미완성적) 체험하는 것이 결혼의 신비요, 신앙의 신비다.

 

▶부부 사랑의 발전 단계

 

1. 육체적 사랑(에로스)

젊은 부부가 육체적 사랑을 나누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것은 식어지기 마련이다.

 

2. 우정의 사랑(필레아)

나이가 들수록 부부는 정이 들게 되고, 우정이 깊어지고, 서로 신뢰하게 된다.

 

3.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부부 관계를 통해,

하나님(남편)과 교회(신부, 아내)의 관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 신비를 느끼고 음미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    <01.05.20. 이중표 목사님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