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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 고전12:7 11.04.13.설교녹취
◑1.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가장 주된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12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고,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이런 구절들을 보면,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주된 목적, 혹은 이유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교회’라는 말은,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뜻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덕담을 나눈다’ 또는 ‘서로 서로 후덕하고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이 아니고,
벽돌을 쌓듯이, 건물을 차츰 세워가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운동을 해서 몸을 가꿔간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성도들을 영적으로, 믿음으로 세워가는 것을 뜻한다.
은사가 주어진 가장 핵심적/주된 목적은,
성도(교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은사는.. 다른 지체들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다른 말로,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1)
위에서 ‘유익하게’ 하심은..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다른 사람)를 유익하게 한다는 뜻이다.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성령의 은사들 중에, 자기의 유익을 위한 은사는.. 방언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주2)
나머지 대부분 은사들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예를 들어, 신유의 은사를 생각해 보자.
내가 아픈 환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는데, 그 환자가 정말 나아버렸다.
(그래서 병이 나은 사람보다, 기도해 준 사람이 더 놀라는 때도 있다.)
어쨌든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서, 그 혜택은 고스란히 환자가 받는다.
이와 같이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
즉 은사의 시행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위한 것이란 뜻이다.
또 예를 들어, 지금 어려운 문제 가운데 헤매던 성도가,
답이 안 보여서 고민하고 전전긍긍 하던 중
교회의 지도자와 상담하다가, 어떤 성경구절을 통해서
자기의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얻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그 지도자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이 한 가지만 올바로 인식해도,
성령의 은사로 인한 수많은 부작용들이 멈춰질 것이다...
▲은사를.. 자기를 위해 시행하려고 할 때.. 넘어지고, 올무에 빠진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자기 개인의 유익을 위한 목적으로 ‘사모하기 쉬운데..’
그 은사의 나타남과 시행을 통해서
자기가 유명해 진다든지,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내세운다든지..
자기 경건의 깊음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든지..
그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완전히 교회의 봉사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진다. 그것으로 끝이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넘어질 일도 없다.
그런데 은사가 잘 나타나는 사람이.. 잘 넘어진다.
그 은사의 시행을 통해서.. 은연중에 자기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은사의 시행은.. 교회(다른 성도)를 위한 것이다’라는 말은,
‘은사를 개인적 교만의 도구로 결코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왜 강조해야 하는가 하면,
많은 은사자들이 꽈당 넘어지는데...
보니까, 그 은사를 시행하는 자신을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은사를, 자기 높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은사의 나타냄과 시행은.. 철저히 교회(성도)를 위한 것임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그럼 은사를 나눠주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저들을 회복시키시고, 저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그 일에 우리 각자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그것 말고, 은사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에 맞지 않다.
그래서 이처럼 성령의 은사의 목적이
자기가 아니라, 교회(다른 성도)의 덕을 세우기 위함임을 살펴보았다.
◑2.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교회(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은사를 사모하자.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열망해야 한다. 사모해야 한다.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성도들이 도움을 받든지/안 받든지..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나하고는 상관없거든..’
만약 그런 이기적인 이유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할 일이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기 위한 것이니까,
우리는 교회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하고/사모하고/열망하고/추구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은사가 풍성하기를 간구하라고 했다.
고전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것이 더 풍성하도록 간절히 기도로 구하라는 것이다.
위 구절은, 일차적으로 ‘예언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이지만,
모든 은사로 확대해서 봐도 무방하다.
여러분,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시면,
‘성령의 은사는 좋은 것이야’
이 정도 수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풍성하기를 간절히 구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권면이 아니고, 강력한 명령문이다.
▲은사로 인해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고전1장에, 고린도교회가 모든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나타난 교회였다. 고전1:5, 7
뿐만 아니라, 그 은사 때문에 문제가 나타났었던 교회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서신을 써서 가르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극적인 은사가 강력히 나타나는 성도가,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은사가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멸시했던 것 같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은사가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쉽다.)
그런 이유가, 고린도교회가 시끄러운데 한 몫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은사가 없는 사람들도 ‘더 귀한 지체’라고 옹호한다.
고전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이와 같이, 몸을 보더라도 오히려 연약한 지체를 더 중히 여겨 보호한다고 했다.
눈은 자기 스스로 먼지도 못 막는다. 눈꺼풀이 대신 닦아주어야 한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더 극적인 은사가, 더 훌륭한 은사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열등감이나/반대로 우월감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은사로 인해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은사가 더욱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교회는, 그들이 예배로 모이면, 서로 방언으로 말/기도했던 것 같다.
그런데 통역이 안 되니까.. 그 은사로 인해.. 소동만 일어났다.
또 예언할 때도,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무질서하게 예언했다.
그러니 그 은사도.. 교회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은사로 인한 무질서’한 일이 일어난 교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여러분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쓴다면, 뭐라고 쓰겠는가?
이렇게 은사가 남용되고 있고, 은사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고,
은사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 이 교회에,
만약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편지를 쓴다면,
‘성령의 은사들을 잠깐 내려놓아라,
그거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지만, 더 성숙할 때까지 좀 잠잠히 있어라.
은사를 당분간 시행하지 말아라...’ 라고 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은사로 인해 문제가 많은 교회에다
더 큰 은사가 나타나기를 열망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
고전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은사의 부작용에 대한 해답은,
그것을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은사가 자유롭게 더욱 더 활발하게 나타나는 교회이다.
그래야 성도들이 유익을 얻으니까! (교회의 덕이 세워지니까)
작금의 일부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그 모든 은사들의 시행을 눌러서 막는 분위기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은사로 인한 시행착오보다 더 겁낼 것은, 아예 은사가 안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로 인해서, 과거에 한국교회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실 ‘성령의 은사로 인한 문제’가 매우 적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 지역교회에 거의 안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숙해서, 그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성령운동이 위축되어 있어서,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 인한 문제’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가 없다고 해서, 좋아할 일은 절대 아니다.
잠언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여러분, 마구간에 소가 없어서 깨끗한 것이 좋은가,
소 때문에 마구간이 지저분해도, 소가 있어서 농사에 도움 얻는 것이 좋은가?
더 리얼한 예로,
집에 아기가 없어서, 똥 기저귀 안 갈아주는 게 좋은가?
아니면 집에 아기가 있어서, 똥 기저귀 갈지만, 행복한 것이 좋은가?
‘나는 깨끗한 게 좋아’ 하면서
성령의 은사가 안 나타나는 것을, 정말 원하시는가?
은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은사로 인한 부작용이 없다고 해서
결코 정상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수많은 일들을 이루기 원하시는데,
아예 그런 일들이 싹 조차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은사로 인한 부작용이 없습니다.’ 하면서 만족하면 안 된다.
사도바울은 더 강한 성령의 은사들이 자유롭게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익하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원했다.
그렇게 ‘성령이 은사로 나타나시는’ 일들이 우리가운데 항상 일어나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를 추구해야 한다.
▲저/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인데도,
또한 저희 교회는 성령운동을 강조하는 교회임에도,
성경의 이런 부분을 볼 때,
사도 바울이 말한 만큼 제가 그렇게 은사를 적극적으로 강조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
은사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 제 자신을 본다.
방언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있던 고린도교회에게,
사도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 고전14:39
바로 그런 교회에게,
‘나는 너희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전14:5
성경에 말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이, 우리에게 잘 보여지기를 바란다.
◑3. 은사를 잘 사용하려면, 은사자의 성숙이 필요하다.
▲수돗물 예화
집에서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었더니, 녹물이 섞여 나왔다.
이 녹물은, 상수원에서 온 것은 아니다.
거기서는 깨끗한 물을 보냈는데,
그 수돗물이 집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땅속 파이프에 녹이 슬어 있으니까,
집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녹물이 나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완전한 것들이다. 약1:17
은사는, 온전하고 완전한 것인데,
문제는 그 은사가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위 예화에서 수도관과 같다.)
우리 속에 상처, 왜곡된 가치관, 그릇된 삶의 태도와 습관..
이런 것들이 있으면, 은사가 나갈 때,
우리의 모든 쓰레기들이 함께 섞여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수돗물에 녹물이 함께 섞여 나오게 된다.)
성령의 은사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인데,
수돗물에 녹물이 섞여 나가면,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은사를 시행한다면서, 도리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은사는 완전하지만, 결과는 부정적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꿈도 많이 주시고, 환상도 많이 주시지만,
주어진 성령의 은사와 감동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열매로 나타난다.
그러면 그 은사자가 아직 성숙되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그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특별히 은사자들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은사자들 가운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은사를 시행하면서도, 그 말 때문에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겸손한 은사자
성령의 은사는, 상대방의 유익,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는, 은사가, 우리가운데 더 풍성하게 나타남을 사모해야 한다.
그야말로 교회 가운데
더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추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올바른 자세로 은사를 통해 섬길 수 있도록
꾸준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다.
늘 주님을 찾으면서, 친밀히 교제하면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은사를 강력히 시행하면서도, 늘 겸손해 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데,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만약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즉, 자기 권위, 입지, 유익을 높이는 일에 사용한다면,
자기 스스로 ‘거짓선지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4. 은사도 다듬어져야 한다.
위 ◑3에서 ‘은사자의 인격이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단락에서는 ‘은사도 잘 다듬어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은사는 다이야 원석과 같다.
다이야몬드 광산에서 캘 때는 원석을 캔다.
디자이너들이 원석을 잘 깎아야,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된다.
마찬가지로, 은사가 주어질 때는, 마치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다.
은사가 처음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다듬어진 채로 오지 않고, 원석처럼 온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원석인 은사를, 잘 다듬어야 한다.
(물론 그 은사를 활용할 자신의 인격도 잘 다듬어져야 하지만...)
이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서,
자기 은사가 점점 더 잘 계발되어져 갈 것이다.
▲오늘 2부예배에 오신 여러분, 이 숫자만이라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은사가 여러분을 통해 나타날 때, 그것을 성숙한 태도로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잘 섬긴다면...
하나님이 이 숫자만 가지고도 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으시겠나!
이 숫자만 그렇게 은사로 각자 무장된다면, 진짜 놀라운 일을 시행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게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받은 원석 같은 은사를.. 수년에 걸쳐 깎고 다듬고,
또한 그 은사를 사용하는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으면..
점점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될 것이다.
어떤 분들은, 겸손해서 그런지,
자기가 리더이면서도, 조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꺼려한다.
‘자기가 좀 더 성숙한 후에, 조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사는, 자꾸 사용하면서 갈고 닦여지는 것이지,
가만히 갖고 있으면서, 쓰지 않으면서, 그것이 성숙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도, 가만히 갖고 있으면, 은사는 계발되지 않는다.
내가 기도해 줬는데,
그의 질병이 낫지 않고, 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망신당할 것을... 염려하지 마시라.
‘내가 망신 좀 기꺼이 당하리라’고 아예 각오 하시라.
주님의 일을 하다가(기도 사역)
망신 좀 당하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렇게 사람이 실수도 하면서, 자기 은사가 점점 계발되는 것이지..
가만히 품 속에 넣고,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
주1)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성령의 나타남’이란 표현은,
성령의 은사를 자기가 소유했다고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꺼내서 쓸 수 있지는 않다.
자기가 무슨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그 은사가, 위에서 나타내주셔야 ... 비로소 그 은사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가수가 노래를 잘 부르고, 어떤 화가가 그림을 잘 그리지만,
평소에 자기에게 그런 은사가 내재되어 있지만,
필이 꽂힐 때가 있다.
갑자기 노래가 간절히 부르고 싶어지고, 그림을 미친 듯이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24시간 365일 내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때 가수가 노래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정말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자기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더라도, 그걸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성령이 ‘기름부으심, 나타내심’을 주셔야 한다. (위에서 ‘필이 꽂힌다’는 것과 비슷)
‘성령의 나타남’이란.. 그런 뜻이라고 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님의 자신의 의지로, 나타나실 때가 있는 것이다.
주2)
방언의 은사는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것과 같다.
과거에 각 집에 안테나가 설치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TV가 잘 안 나오면,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안테나의 방향을 틀어서 맞추곤 했다.
방언의 은사는,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더욱 예민해지고, 민감해진다.
그래서 방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는데 많은 유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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