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들이 아는 것들 스크랩 글, 출처보기
*아래글은 애린양로원 2006년 4월 회보에 실린 박경철 교수님의 글입니다
▲제(박경철 교수)가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은 어두워지고 폭풍우가 불어왔어요.
후우욱~ 휙익~ 우르릉 쾅 쾅 휘익~
모세는 지팡이를 잡은 손을 바다위로 쭈~욱 펼치더니 하늘을 향해 높이 올렸어요.
겁에 질려 부들 부들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바라다보았어요.
그때 모세가 ....”
제가, 양로원 할머니들 앞에서,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별의 별 몸짓을 다해 가며, 열을 내며 설명하던 중이었다.
그때 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힘없이 한 말씀하셨다.
“목~사~님~~ 그 얘기 다~~ 알아~~”
제가 애린 양로원에 처음 예배드리러 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오래동안 신학 공부만 하던 내가, 농촌교회에 부임하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독일유학을 떠났다.
만 10년이 넘는 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나는 성경을 들고 교회가 아닌 학교 강단만을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녔다.
16세기 유럽의 부패한 교회를 향해 신학교 교수였던 마틴 루터의 개혁적 외침 때보다,
오늘날의 교회가 더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마치 나 혼자만 이 부패(?)한 한국교회를 벗어나
교회 개혁을 외치는 깨끗한(?) 목사인양 자부해 오고 있던 터었다.
나는 한 손엔 성경을 들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 성경이 전해져야 하는 교회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당당했던(?)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여기고,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하여,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게 한 곳이 다름 아닌 임상교회이고, 애린원이다...
옛 독일에서의 전원생활이 그리워
시골의 전원적인 모습을 갖춘 임상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내게 교회, 특히 농촌교회는 한 없이 마음 편한 쉼터 같이 여겨졌을 뿐이다.
김제들녘에 지는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한가로움이 한동안 내게 있었다.
▲고 염천 한삼용 장로에 대해 알게 되다.
임상교회에 부임하고 얼마 뒤
(아마 교회 부설) 애린양로원 창립 79주년 기념축사를 준비하던 내게 큰 변화가 왔다.
원고준비를 위해 들여다 본 애린양로원 홈페이지에 실린
애린양로원 설립과 관련된 짤막한 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라’는
삼애(三愛)의 정신에 세워진 애린 양로원과
설립자 고 염천 한상용 장로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설립자 염천 한상용 장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섬 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들녘의 붉은 저녁노을의 한가로움에 취해있던 내 발걸음은
애린양로원 마당에 세워져 있는, 고 염천 한상용 장로의 기념비로 자연스레 옮겨졌고,
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를 점차 하나 둘씩 느끼기 시작했다.
고 염천 한상용 장로, 낡은 비문에 얽힌 그 뒷얘기는 이렇다:
<...기미년 삼일만세운동 다음 해인 1920년에 (임상)교회를 세운 염천은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땅을 주어 이들을 해방한다.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부러 이들을 멀리 떠나게도 한다.
1925년 갈 곳 없는 노인들을 업어와 돌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양로원인 현 애린원을 세운다.
그것도 3월 1일에!
전주에서 군산까지 잘 닦인 도로가,
한반도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의 쌀들을 일본으로 빼내 갔던 일제수탈의 도로였다고 들었는데,
당시 염천은 김제 들녘에서 이미 한편으론 봉건의 마지막을 훌훌 털어버리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일제 침탈에 앞서 우리의 땅을 지켜내는 일들을 위해
농우회를 조직해 나간다.
나라 잃은 설움이 못 배움으로부터 왔음을 직시한 염천은
암울한 시대, 서슬 퍼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중생학원을 세우고,
밤에는 교회에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에 헌신한다.
일제가 물러난 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염천은 길거리로 내몰린 전쟁고아들을 데려다 염천애육원(현 염천 기념관)을 세우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도시의 빌딩 숲속에서 자라온 나에게,
머나먼 이국땅에서 월드컵을 치룬 “대~한~민~국”의 한 일원임을 자랑하며
IT 강국을 뽐내던 나에게
농촌은 잠시 도시인이 쉬어가는 한가로운 쉼터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던 나에게,
염천 한상용 장로에 얽힌, 끊길 듯 이어지는 옛 이야기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참으로 얼마나 귀중한 땅이며,
거룩한 땅인지를 새삼 소스라치게 한 것들이었다.
▲어르신들은, 사회복지 대상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그 순간에도
애린원의 ‘어르신’들은 나에겐 여전히 ‘양로원’의 ‘할머니,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양로원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른바 배운 지식인 목사에겐
보다 잘 사는 사회가 만들어 가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대상들>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그래서..
거동을 잘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잠시 내가 손을 잡아 주는 일이면.. 충분해 보였다.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목사가 할 수 있는 예배와 성경공부란
단지 재미있는 구연동화 정도만으로 때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잘 난(?) 목사에게 던진 한 할머니의 외마디가,
“목~사~님~~ 그 얘기 다~~ 알아~~”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니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내게,
당신들은 '(우리들은) 다 안다'고 하신 것이다.
▲그만큼 내가 그 어르신들을 몰랐고, 또한 나 자신을 몰랐다.
우선은 평생을 지역교회를 섬겼던 분들이 계셨음을 몰랐다.
염천 한상용 장로를 통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다시 보면서
농촌이 도시인의 잠시의 쉼터가 아니라,
생명의 보금자리임을... 내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 할머니의 '다 안다'는 외마디는
지금까지의 '나는 배운 지식인이다. 나는 다 안다'의 모든 것을
'아냐, 나는 아직도 많이 모른다'로 고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안다'고 했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이제 내가 진정 더 '알아야 하는 것'들이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다시 수첩에 하나씩 하나씩 적어가게 된 것이다.
많이 공부한 내가
작은 농촌교회를 선택했다는 것이
점점 나의 자랑거리(교만)가 되어가고 있던 와중에,
그것이 나를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르신 들은 정말 아시는 분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은
주일날 예배시간이 10시나 10시 반인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언제나 30분전에, 아니 한 시간도 더 이른 시간에 교회에 나오신다.
'많은 것을 아는' 도시의 지식인들은,
11시 예배에, 제 시각에 오거나, 10분 늦게 오기도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어르신'들은
예배 30분이나 1시간 전에 오셔서, 기도하며 기다리시니..
사실 누가 진실로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인가?
일제시대부터 평생을
지역교회를 지키면서 신앙생활 해 오신 분들이
지금 묵묵히 '교회를 마치 새신자처럼' 다니신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신다.
사실 누가 진실로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인가?
▲교회 밖에 모르는 사람
교회를 오고 가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내야하는 한 할머니에게, 제가 물었다.
“교회 다니시기 힘들지 않아요?”
“내가 뭐가 있어? 난 교회 밖에 없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양로원 밖의 젋은 교인들은
교회 밖 세상에 '할 일이 많아서' 교회가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양로원의 어르신들은
오직 '교회밖에,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시니..
그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 찬송의 신앙고백을
그분들은, 삶으로써, 자기 몸으로써 직접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 제가 애린양로원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은 더 이상 힘없는 노인들로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가 받들고 모시고 새로 배워야 하는 '스승이요, 어르신'이었던 것이다!
.........................................
◑존 뉴턴의 <종의 도리>
하늘에 있는 두 천사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았다.
한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에 가서 통치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천사는, 가장 더러운 마을에 가서 그 거리를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임무만 알뿐, 상대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사실 그 문제 즉, 두 천사의 임지가 하늘과 땅처럼 완전히 다른 그 차이는,
두 천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런가?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나라에 가서 통치하는 것이 꼭 위대한 명령이라 할 수 없고,
가장 더러운 마을에 가서 청소하는 것이 덜 중요한 명령이 아니다.
둘은 하나님의 명령, 사명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순종, 수행하고 있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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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순종
엘리야 선지자가 하루는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항해서
싸워 이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왕상 18장
엘리야 선지자가 하루는
저 이방 시돈 땅 사르밧의 한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거기에 가서 오래 살았다. 왕상 17:9
엘리야 선지자가 하루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가서
거기서 강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물어주는 음식을 먹고 살아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거기 가서 오래 살았다. 왕상 17:3~4
우리 생각에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는... 위대한 일이고,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나, 사르밧에서 기거한 일은...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셋 다 똑같은 무게감을 갖는 일이다.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셋 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순종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생각에는,
규모가 큰 일을 하면... 큰 일을 하는 것 같고,
규모가 작으면... 작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건 우리 인간적인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순종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크고/작은 일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잭 하일스「성령님을 만나세요」에 나오는 재미있는 비유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얘야, 저기 가게에 가서 빵과 우유를 좀 사 오너라!”
“네 아버지 갔다 오겠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하고, 다른 아이들과 싸우지 말고,
길에 넘어진 아이들 보면,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해!“
“네 잘 알았습니다!”
얼마 후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얘야, 빵과 우유 사왔니?”
“제가 가는 길에 옆집 아저씨를 만나서,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잘했구나, 그런데 얘야, 빵과 우유 사 왔니?”
“아버지, 제가 가게 앞에서 어떤 애가 넘어지길래,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 어머니가 저를 많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참 잘했구나, 그런데 빵과 우유 사 왔니?”
“아버지, 제가 오고 갈 때 찬송을 부르며 아주 기쁘게 걸어다녔습니다.
가게에 줄이 길게 늘어선 것을 보고, 짜증내지도 않았습니다.”
“빵과 우유는 어디 있니?”
“(변명 계속...)”
여러분, 이 예화의 의미를 이미 다 파악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심판 때,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가 똑같이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기쁨 주시고, 평화의 사람 되게 하시고, 근면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고,..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 목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지상 명령 the great commission>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을 국내와 해외에 널리 전하는 것!
그것이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궁극적 목적이요,
마지막 심판 때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물으실 질문이다.
▲성령을 보내신 목적
“너 세상에서 몇 명이나 전도했니?”
“주님, 제가 세상에서 꽤 착하게 살았습니다.”
“너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했냐?”
“주님, 제가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는데 많이 공헌했습니다.”
“참 잘 했구나! 그런데 너를 통해 몇 명이나 구원받았냐?”
“주님, 제가 세상에 있을 때, 그래도 늘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잘 했구나, 그런데 너는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변명 계속...)”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얼마나 구원했느냐?’ 그것을 물으실 것이다.
‘지상 명령’(마28:19~20, 행1:8등)이란, 가장 중요한 명령(至上)이란 뜻이다.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켰어도,
가장 중요한 명령에 무관심한다면... 큰 잘못이다.
우리는 <성령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를 꼭 명심해야 하겠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임을 절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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