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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의 구조적 위험 / 정원

LNCK 2011. 4. 25. 13:05

◈사역자의 구조적 위험인 교만, 자신을 드러냄        막7:6        정원 목사님 글 스크랩



◑사역자의 구조적 위험 - 자신을 드러냄


예수님은, 모든 이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매섭고 냉정한 평가를 하신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내게 가까우나 그 마음은 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7:6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일단 그의 사역이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을 받으며

그가 사역하는 교회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욕망은

그가 주님 자신을 알고, 그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 보다

‘외적 사역 자체’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교회에 갑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사역자는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교회에 갑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가 좋던 나쁘던

시간이 되면 강대상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주님을 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직업적으로 주님을 대하기 쉬운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자신 안에서 은혜와 감동이 사라지고

주님과의 거리에 무엇인가 막힌 담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괴로워합니다.

- 이들은 비교적 건강한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적지 않는 사역자들은

그들과 주님과의 거리와 관계 자체보다

그들의 사역이 외형적으로 별로 열매 맺지 못하는 모습을 통하여.. 실족하고 낙담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이

좀 더 많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의 영적 어두움은 교회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역자들의 영혼이 맑고 아름다우며

주의 풍성한 임재와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복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교회에 어떤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

이에 대해서 일반 평신도들이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을 거스르는 이들은

대부분 사역자들 이거나 평신도의 지도자들입니다.


주님과 주의 제자들을 공격했던 이들도 이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신도들이 은혜 받고 변화되고 성장했다는 이야기는 흔히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졌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역을 한다는 것,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사역자가 쉽게 주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대적할 가능성이

사역자들에게는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조적으로 그러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의 위험성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요?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악한 영들의 공격을 많이 받기 때문일까요?

아마 그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근원적인 것으로서

구조적으로 사역자의 위치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자는 앞에 서서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앞에 서게 되고 드러나게 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자신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기가 쉽습니다.


주님의 통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은근히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크게 사용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자신이 좀 더 크게 쓰여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여지고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 도대체 저는 뭡니까?

왜 저는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하소연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미 그가 구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지, 주님의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자신이 주의 영광을 취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서부터 모든 재앙이 시작되는 데

사역자는 그러한 위험성을..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구조적으로 틈타기 쉬운 - 교만


자신이 드러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사역자가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눈을 뜨지 않으면

그의 영원한 미래는 얼마나 비참해질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주님은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 그럴리가요! 주님은 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항의를 하지만

주님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실제적인 것인지,

우리의 찬양과 기도가운데 주님이 친밀하게 임하시며

우리 가운데 그분의 풍성함을 드러내시는지,


아니면 어떤 벽과 거리가 느껴지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멀리 느끼고 있다면

영원한 세계에 간다고 해서 그 관계가 갑자기 아름답고 친밀하고

풍성한 관계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상대방들이 듣기를 원하는지

주님이 인도하시고 허용하시는 상황인지에 상관없이

그저 가르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감동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끼어있는 성경공부모임이나 기도 모임은 잘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을 하게 되면

그 순간에 흑암의 영들이 그 공간을 덮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영적으로 예민한 이들은

심령이 답답해지고 무기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충분한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젊은 전도사들이나 신학생들은 그러한 증상이 더 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간의 지식이나 머리로 깨달은 것들을

자랑하고 늘어놓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 공간에는 주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어두운 모임이 되지요.


주님을 높이지 않는 모임은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있다고 하더라도

악한 영들이 장난을 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연세가 드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학식도 많고,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사역하시면서 목회하셨는데

한동안 몹시 억울한 모습으로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어떤 사역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그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면이 전혀 없는데

왜 그 사람은 성공했고 자신은 이 모양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성공의 기준인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유명하다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온전한 성공이 되는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이 교수님이 가지고 있는 억울함과 상처는

자신의 성공과 명예에 대한 것이었고


주님의 영광과 원하심에 관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역자로서 아주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진정한 사역자는

성공이나 명예나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관심은 주님을 알아 가는 것에 있으며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주님의 원하심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주님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이 허락하신 그 귀한 교제와 주님 자신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며

자신의 입장이나 삶이나 죽음 같은 것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취하고 싶어하는 사역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역자들이 주님의 깊으신 은총과 교제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며,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합니다. 구조적인 위험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의 영성을 과장합니다.

체험하지 않은 것을 체험했다고 하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과장과 거짓의 영’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높은 곳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누리는 영광


사역이란.. 주님께서 허락하신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역자가 순진하고 순수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있기를 원하며

자신이 영광과 존경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주님은 그에게 임하시고 그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거기에는 천국의 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며 영광을 받는 것을 사모한다면

거기에는 지옥의 임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앙은 시작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릴 때 그곳에는 천국이 임합니다.

천사들이 오며 능력과 역사와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드러나게 될 때 그곳에는 지옥이 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만과 분쟁과 탐욕과

흥분과 거칠음과 판단과 미움과

각종 세상의 영들이 오게 됩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을 불러도

그것은 지옥의 영들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잠시 은혜를 받고 흥분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별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온전하게 엎드려지게 될 때

그는 진정 아름답고 놀라운 천국과 빛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는 빛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빛을 나누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빛을 받은 이들은

천국의 영광이 거룩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느끼고 맛보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가 주의 도구와 통로가 된다는 것 - 그처럼 복스러운 상태도 또 없을 것입니다.

사역자가 단순히 주님과 천국에 대한 개념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실재하는 천국을 보여주며 나누어주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빛과 영광은 확산되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

 


◑지식에 은혜가 더해져야 한다.                         인터넷 펀 글, 정리              

 

     여러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십시오...    벧후3:18


오늘은 온종일 학교에 나무를 심고 땅에 울타리를 치는 작업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주님을 불렀는데.. 내안에 주님이 이런 감동을 주셨다.


“사람들은 많은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가 되려면

그 진리가 내게서 살아서 나와야 하고

살아서 나오지 않는 진리는.. ‘죽은 지식’으로 남고,

그 ‘죽은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려는 욕망만 살아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사와 목사들이 있는가...

그 많은 신학교들이 배출한 사역자들은

과연 주님의 분신으로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자인가?


없다면 다만 주님의 십자가아래로 내가 돌이켜 다가가는 것이 은혜이다...

가르치려는 유혹을 떨치고, 주님을 살아내기를 기도하자.”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빛을 보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이제 모든 것을 이루었고,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한다면...


누군가의 결점이나 허물을 지적하고

즉석에서 그에 맞는 성경구절과 메시지를 즉시 갖다 대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마치 훈련교관처럼 늘 가르치며 살지만

‘타인’들이 많은 거친 장바닥이나 직장에서는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항상 직장을 그만두고 봉사를 갈망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거친 가시덤불 같은 세상에서

얼마의 월급과 생계를 위해 살도록 세상 속에서 배운 대로 살도록 허락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내가 성경에서 배운 것을 써먹기에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다만 나를 계속 죽음에 넘기우게 한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자는, 성도를 섬길 줄 알아야하고

성도들 섬기려면..

가르치는 것을 지식이 아닌, 은혜로 가르쳐야 하고

은혜로 살아야 한다.


가르치려는 사람보다, 나 자신이 먼저 배우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말하자면 자신이 지식을 배우되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유능하고 완벽하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주님을 잘 섬겼다면

일할 일꾼이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떡을 뗄 식구들도 몇 되지 않는 곳에서

내가 만약 주님을 누릴 수 없다면..


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고,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많은 교훈(내 약점)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사랑’을 빼고, ‘교만’을 더하면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오늘날 라오디게아가 다른 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이 배운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한 자는 라오디게아가 될 수 없다.

지식은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사람의 마음이 돌짝밭이 될 때도 있고,

길가 대로변이 되어서, 새가 와서 뿌려진 말씀을 주워 먹을 때도 있고,

옥토가 될 때도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밭이다.


나는..

비워지지 않고 욕망과, 자신의 이기적 열심으로 가득 찬 그릇인가..

아니면 주님의 은혜만을 갈구하는 비워진 그릇인가...?


우리가 구원(고침)받아야 할 항목은

내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는 우위에 선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리고 함께 생활하는 몸의 지체이다.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님)


내가 은혜아래 있다면, 어떤 불평이나 지적도 없고

다만 은혜와 찬양과 감사만 있을 것이다.


말씀은 일면으로는 양식이 되기도 하고, 다른 면으로는 죽이는 독이 되기도 한다.

내안에 독이 쌓였다면, 그것을 씻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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