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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의 세 가지 면 / 정원

LNCK 2011. 4. 20. 21:16

www.youtube.com/watch?v=AquqIYTvqbE&feature=youtu.be

◈임재의 세 가지 면                 창28:16                             출처보기, 정리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 

 

◑1. 첫째로 주님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 입니다.

 

나는 어떤 분이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전달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아니고

어떤 개념, 어떠한 진리 어떠한 깨달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유익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 계신 주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요?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교훈이나 가르침이 아닌

주님 자신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실제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어떤 교훈이나 지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맛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주님을 가까이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그는 자기가 만난 그 주님을, 자신이 경험한 그 주님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제적인 가까우심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또 설명합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날카롭고 독창적인 깨달음과 해석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이 충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을 듣고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가까이 교제해서 안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경험한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책을 읽어서 알게 된 주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흑백 TV와 컬러TV의 차이가 난다고 할까요?

 

오늘날 설교의 트랜드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인정받는 설교는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체험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도>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진부합니다.

그런데 ‘내목회자가 기도해 보니까 이렇더라..’ - 이건 어필이 됩니다.

 

<봉사>에 대해.. 무슨 설명을 해 주는 것.. 이제는 별로입니다.

그런데 ‘내목회자가 봉사해 보니까 이렇더라..’ - 이건 설득력이 있습니다.

 

‘내목회자가 기도, 봉사해 보니까 안 되더라. 어렵더라.’ -

이것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 안 되면, 그 분야에 많은 체험을 쌓으신 분을 초빙하거나,

그 분의 간증을 인용해서라도.. 성경지식과 더불어 체험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히 성경에 나타난 개념들을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것으로, 청중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맛본 주님의 향취와 영광과

그 놀라우신 사랑에 대하여, 설교자는 나누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없다면

다만 추론에 불과한 많은 이야기들을

지루하게 계속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 봉사, 말씀, 경건, 전도, 찬양, 사랑, 인내, 충성, 긍휼 등

이런 기독교 신앙의 덕목들을 <체험화해서 제 것으로 만드는데>

속성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수도자 생활’이 요구될 것입니다.

 

그런데 늦었더라도 지금부터 그 수도자/구도자 생활이 시작되어야,

나중에 10년 후에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평생 수박 겉핥기 하다가 그칠 것입니다.              *관련글 회복되어야 할 도인, 이판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는 주님의 인격성입니다.

어느 다른 종교도 이와 같이 인격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도 부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지만

부처 안에 거하고 부처를 사랑하며 부처를 먹고 마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어떤 하나의 교훈이 아니고,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고 주님의 소유가 되며

나를 깨뜨려 주님의 손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교훈의 차원이 아니고 (불가피하게) 체험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박지성 선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박지성 선수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 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대방에 대하여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실제이며

모든 능력과 자유함과 풍성함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수많은 깨달음과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굳이 다른 종교를 찾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남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삶의 교훈 차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훈이나 진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 자신을 붙듭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교훈이나 진리 자체는

생명이 아니며 인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가운 것이며 기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생명이시며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진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주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만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신 생생한 실제입니다.

 

주님을 경험할 때

그분은 바로 옆에 계신 살아 계신 분이며

개념이 아니라, 임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어떤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접촉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신학에 따라 바뀌어 집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선명한 실재이며, 인격이신 그분을 믿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움직이시고 말씀하시고 내 방안을 걸어 다니시는...

그러한 분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불신자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 참... 예수 믿는 이들을 보면 신기하다...

기도라고 하면서... 혼자서 계속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 다 외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참 희한하다..."

 

물론 그가 보면 신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볼 때, 기도란 분명히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결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며

살아계신 분과의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대화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기도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이미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실제적으로 주님을 접촉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경우에 그의 기도 생활은

그리 즐겁고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실제적인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주님의 임재를 실제로 경험하는 수준만큼

달콤하고 행복해지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로 가득하게 됩니다.

 

임재는 실제적인 주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가 주의 사실적인 임재에 예민해질 때

우리는 기도, 예배, 찬양,

그리고 일상의 모든 삶에서

아주 새롭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것은 10년 이상에 걸쳐 천천히 성숙될 것입니다.)

 

 

◑2. 주님은 지금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은 응답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은 자기 혼자 말하는 것이며

응답은 환경을 통해서 나중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금 바로 자기 곁에서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그들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기를 원하시며

그들과 실제적으로 대화를 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너무나 고독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의 상태에 대하여 느끼고 알게 되며

주님의 임하심과 말씀하심에 대하여 기대하고 조금 예민해진다면

 

그들은 기도할 때에 많은 어떤 예감이나 느낌, 감동,

기쁨이나 슬픔, 소원... 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차츰 그러한 것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 시간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며

응답은 결코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현실로는 미래에 나타나더라도, 응답은 즉시 얻습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임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차츰 경험을 쌓아가게 되면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막혀 있어서

그것들을 허물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즉 그들이 지금 임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될 때

그들의 기도와 찬양, 예배는 아주 실제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개념적인 기도나, 개념적인 예배나 교제가 아닌

실재이인 주님과 바로 그 시간에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와 주님과의 교통은

우리가 언젠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온전한 영의 몸을 가지고 하는

온전한 상태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님과 좀 더 실제적인 교통과 만남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주의 놀라우신 은총과 능력과 역사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은 바로 이곳에 임하십니다.             *2항과 3항은, 영어로 here & now 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있는 그 공간에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과 영혼> 이라는 영화를 보면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그의 사랑하는 이에게 나타났을 때

그가 알아보지 못하고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생활을 할 때

바로 곁에 계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여집사는

이혼 후에 몸도 연약한 상태에서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녀가 퇴근 후에 자기 집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은

몹시 피곤하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여집사는 기도하다가, 자기 모습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뭘 잘 보는 일부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그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가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그 높은 언덕 위에서

주님이 미소를 띠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이

"힘들지? 어서 오너라..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마친 후 말했습니다.

하루의 삶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도중 환상을 통해서,

자신이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주님이 자기 곁에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이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같이 실제적으로 거하시고 함께 하시며

우리가 거하는 그 공간, 그 곳에 바로 같이 계신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과 의식이 다른 데에 가 있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거나 아주 영적인 사람에게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예민하게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삶은 분명히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주위 아주 가까이에 있는 주님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당신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예배당은, 아무래도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에 유리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집, 자기 방에서도 주님을 깊게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교회에서나 기도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에서 만나게 될 때

그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개념이 아니고 실제이며

나중이 아니고 지금 임하시는 분이며

멀리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알고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은

진정 새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재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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